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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잃어버린 문명일상/book 2018. 7. 22. 11:59
<아프가니스탄, 잃어버린 문명―사라진 바미얀 대불을 위한 헌사 / 사회평론 / 이주형>
지도를 펴놓고 보면, 유라시아 대륙의 정중앙에 아프가니스탄이 있다. 유라시아의 동반부와 서반부가 만나는 위치이다. 우리가 관례적으로 쓰는 '동(East)'과 '서(West)'라는 말에는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에 있는 조그만 조각에 불과한 유럽(즉 서양)의 관점에서 세계와 역사를 보는 정치성과 허구성이 숨어 있다. 지난 몇 백 년 동안의 역사를 통해 세계의 주인 행세를 해 온 구미(즉 서양)를 그만큼 과장하는 것이다. 'West'는 하나지만 'East'에는 'Near East'도 있고 'Middle East'도 있고 'Far East'도 있는 것이 그 점을 단적으로 알려준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를 넓혀 유럽과 더불어 유럽의 적으로서 서로 변증법적 관계에 있었던 중근동을 '서'라 하고, 사상과 종교 면에서 연결되었던 인도와 동아시아를 '동'이라 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이렇게 본다면 아프가니스탄은 구대륙의 한가운데 동과 서의 접점에 위치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p. 18~19
어려서는 예의를 배우라, 젊어서는 스스로를 절제하라, 중년이 되어서는 공평하라, 노년에는 좋은 조언을 주라. 그리고 후회없이 죽으라
―p. 56
탈레반이 무자비한 우상파괴를 자행하기 이전의 바미얀 불상(서대불)
무엇보다 바미얀을 유명하게 한 것은 암벽을 파고 조성한 두 개의 거대한 불상이다. ···당연히 이 상은 비단 불교도뿐 아니라 이 상을 볼 기회가 있었던 모든 사람에게 경탄과 두려움, 때로는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이 거대한 상의 신화는 오늘날의 고미술과 고대문명 애호가들 사이에 다시 살아나 많은 사람을 매혹시켜 왔다. 나도 사진에서 이 대불을 처음 보았을 때, 거대한 불상과 그 발 아래 조그만 티끌 같은 사람을 견주어 보며 경이로움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불상이 세워졌던 감 앞에 실제로 처음 섰을 때, 오히려 특별히 크다는 느낌은 오지 않았다. 부분적으로는 어떤 정서적 감흥을 일으킬 만한 인간의 형상이 감실 안에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큰 것을 너무 많이 보아 와서 크기에 감동받는 감각이 무뎌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불상만 해도 우리나라의 일부 불교도들이 '동양 최대'와 '세계 최대' 불상을 하도 좋아하다 보니, 이에 못지않게 큰 불상을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p. 143~145
현장은 큰 불상을 그냥 '석불 입상'이라 하고, 작은 불상을 '석가불 입상'이라고 했다. 석가불을 이렇게 거대하고 장중한 모습으로 표현한 것은 여기 제시된 석가모니 붓다가 단순히 중생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열어 준 불교의 개조(開祖)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을 통어(統御)하는 거대한 우주의 원리와 같은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라 해석된다.―p. 149~150
큰 불상, 즉 서대불은 어떤 붓다를 나타낸 것인지 않을 수 없다. 일본 학자 미야지 아키라는 이 상이 미륵불을 나타낸다고 한다. 미륵불은 석가모니 붓다가 열반에 든 뒤 56억 년 뒤에 이 세상에 출현할 미래의 붓다이다. 그런데 미륵불이 출현할 때에는 지금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보다 훨씬 좋은 세상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수명도 우리보다 훨씬 길고 신장도 훨씬 크다고 한다. 그래서 미륵 붓다의 신장도 석가모니 붓다의 열 배가 된다고 하는 경전도 있다. 미야지는 이 무렵 아시아 각지에서 만들어졌던 거상은 대다수가 미륵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p. 150
카불의 역사가 얼마나 올라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고대 인도의 성전인 『리그베다』와 조로아스터교의 성전인 『아베스타』에는 '쿠바'라는 강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것이 지금의 카불 강에 해당하는 듯하다. 강의 이름으로는 역사가 매우 오랜 셈이다. 기원후 150년경 프톨레메우스는 '카부라'로 불렀고,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에서는 '카풀'이라 불렀다. 이것이 '카불'로 변한 것이다.
이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해석이 구구하다. 16세기 무갈 왕조의 창시자인 바부르는 이 도시를 아담의 아들인 카빌(카인의 페르시아어형)이 세웠다고 믿고 카빌의 무덤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곳은 카불의 오래된 성인 빌라 히사르 남쪽에 있었다고 한다. 또 19세기에는 이 도시를 세운 카쿨과 하불이라는 형제가 도시의 이름을 어떻게 지을지 다투다가 타협하여 '카'와 '불'을 따서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p. 176
근대화의 일환으로 야심차게 카불의 신시가지에 세워진 다룰라만 궁이 처참한 폐허가 되어 남아 있다
'평화가 깃든 곳'이라는 뜻을 지닌 '다룰라만'의 의미가 무색하다
19세기 초 아프가니스탄은 왕권을 둘러싼 혼란에 빠져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이 분열되어 싸움에 열중하고 있는 동안 이 나라에 대한 열강들의 각축은 고조되고 있었다. 영국은 인도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이 다른 열강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나폴레옹이 유럽에서 승승장구하자, 프랑스가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인도로 침공해 올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1814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실패해 퇴위하면서 프랑스에 대한 공포는 사라졌으나, 이제는 프랑스를 물리치고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국으로 등장한 러시아가 문제였다. 19세기 초부터 강력하게 남진정책을 펼치고 있던 러시아는 1828년 투르크만치 조약을 체결하면서 이란으로부터 아르메니아를 빼앗고 사실상 이란을 손에 넣었다. 또한 아랄 해 남쪽의 중앙아시아로 영역을 넓히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p. 201~202
다룰라만의 신시가 건설도 아마눌라가 개혁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추진한 것이다. ···'다룰라만 궁'만을 프랑스인 고다르에게 의뢰했다. 독일인을 무척 싫어했던 고다르는 독일인이 지은 집들이 다름슈타트나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건축을 베낀 것에 불과하며 아프가니스탄의 기후나 생활여건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격앙된 어조로 비판했다. 그러나 그가 설계한 다룰라만 궁도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이나 전통, 어느 것도 잘 반영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물론 당시에는 이런 건물이 아시아 곳곳에서 근대화의 상징으로, 혹은 식민 통치의 상징으로 세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의 경우나 고다르만 탓할 것은 없다. 아무튼 이 건물이 서구식 근대화를 지향한 아마눌라의 강한 의지의 상징적 표현이었다는 점에는 의문이 없다.
―p. 216
왕이 된 나디르 샤는 황폐해진 카불을 복구하고, 전통 종교 세력과 부족 세력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아마눌라가 추진했던 개혁을 대부분 되돌리거나 대폭 완화시켰다. 이로써 시대를 너무 앞서갔던 아마눌라의 개혁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나디르 샤의 통치기간에 아프가니스탄은 다시 안정을 찾았으나, 그는 4년 만인 1933년 암살되고 말았다.
―p. 225
1930년대에 아프간인들은 고고학 조사와는 또 다른 측면에서 고대 역사에 주목하게 되었다. 바로 아리아인의 신화이다. 20세기에 들어서서 독일에서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의 영향 아래 아리아인의 신화를 신봉하는 경향이 등장했다. 이 경향은 스스로를 아리아인인 고대 튜턴족의 후예로 여기고 아리아인의 세계 지배를 꿈꾸는 비밀스러운 툴레회라는 결사로 발전했다. 글기ㅗ 1920년대에 부상한 나치의 신화적인 상징이자 이념이 되었다. 나치가 고대 아리아인의 상징으로서 스와스티커를 택한 것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1930년대 이래 독일의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경제지원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이 신화적인 역사관도 아프간 지식인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아프간인들은 자신들 역시 아리아인의 후손이라는 독일인들의 견해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더 나아가 자신들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아리아인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조상이 앗시리아에서 실종되었던 유대인 부족에서 유대인을 탄압할 역사적 임무를 띠고 있다고 하는 아리아인으로 바뀐 것이다.
―p. 226
마찬가지로 다룰라만에 위치해 있으면서 격동의 근대를 견뎌내지 못한 카불 박물관
제3세계 국가에 박물관이 처음 개설되는 것은 그것이 자발적이건, 식민 지배자에 의한 것이건 서양식 근대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인도에서는 영국인들이 1814년 캘커타에 문을 연 벵골아시아학회박물관이 최초의 박물관으로, 이것이 캘커타 인도박물관으로 발전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뒤인 1876년에 근대적 기제의 하나로서 최초의 박물관이 농상무성 관할로 개관했다. 서양식 근대화가 식민 지배자에 의한 것이었다면, 박물관은 식민지배자가 식민 지배 단위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펼치는 장이었으며, 식민 지배를 통해 들여온 근대 문물을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근대화가 자발적이었던 경우에도 박물관은 근대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기관이었으며, 종종 새로 설림된 근대국가의 아이덴티티와 통합을 상징하는 기관으로 발전했다.
―p. 228~229
출신배경과 성향, 노선이 매우 다른 타라키와 카르말은 서로를 좋아하지 않아 늘 대립관계에 있었다. PDPA는 곧 1년 만에 이 두 사람을 양극으로 분열하게 되는데, 타라키 파와 카르말 파는 각각 '할크'와 '파르참'이라 불렸다. '인민'이라는 뜻의 『할크』는 1966년 몇 달 동안 타라키가 냈던 잡지으 이름이고, '깃발'을 뜻하는 『파르참』은 카르말이 PDPA를 나와 1967년 발간했던 잡지의 이름이다. 아민은 할크에 속해 타라키를 따르고 있었다. 이 세사람은 아프가니스탄 비극의 도화선이 된 1978년 공산혁명의 주역이 되었다.
―p. 239
혁명이 성공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할크파와 파르참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1978년 7월 할크는 정권 내에서 파르참 세력을 대부분 숙청하고 ···아민의 위치가 점점 더 부상했다. ··· 공산정부는 급진적인 개혁을 시행했다. 토지 재분배와 고리대금의 폐지가 대표적인 것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의 사회 발전을 위해서는 이런 개혁을 한 번은 시행할 필요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개혁은 아프가니스탄의 전통적인 사회관습과 생활 현실을 도외시한 채 이루어졌다. ···이 나라의 전통 촌락사회에서 땅주인과 소작민은 서로 친척이거나 하나의 공동체 안에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땅을 받는 것은 탈취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민심이 흉흉해지고 시골의 많은 사람들이 공산정부에 반발했다.
최저 결혼 연령을 정하고, 남녀를 불문한 문맹 퇴치와 마르크스주의 이념에 따른 교육도 시도되었다. ···정권을 잡은 공산주의자들은 처음에 이슬람을 내세웠으나 그들이 실상 '경멸할 만한 무신론자'라는 사실도 시간이 흐를수록 명백해졌다.
―p. 243~244
낙후된 농업국가에서 흥기한 공산혁명과 이후 소련정부의 무력정책에 반발하여 봉기한 무자헤딘
소련은 카르말을 대통령에 앉히고 유화정책을 폈다. 동시에 소련을 모델로 한 아프가니스탄의 소비에트화를 꾀했다. 1920년대에 공산화된 몽골처럼 아프가니스탄도 소련에 속한 공화국에 준하는 위성국가로 만들 수 있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소극적으로 그런 운명을 받아들였던 1920년대 몽골의 불교도들과 달리 역사적으로 어느 민족보다 용맹스럽고 호전적인 아프가니스탄의 무슬림들은 달랐다. 이들은 산악을 무대로 구식 총을 들고 무장투쟁에 나섰다. 무자헤딘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p. 246
미국이 공산정권 및 소련군과 무자헤딘간 전투가 격화되고 장기화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소련이 베트남전쟁에서 간접적으로 북베트남을 지원하여 미국을 괴롭혔듯이, 소련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데 대해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미국은 생각했다. 그래서 파키스탄을 통해 무자헤딘에게 막대한 무기와 자금을 지원했다. 미국 외에도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 등의 이슬람국, 또 소련과 적대관계에 있던 중국이 무자헤딘의 지원에 발벗고 나섰다.
―p. 247
무자헤딘은 공산정권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학교나 병원, 다리 등 공공시설을 파괴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여기에 더하여 정부의 지원을 받는 발굴사업도 사보타주의 대상으로 본 것이다. 흔히 무자헤딘은 선으로만, 소련 침략자는 악으로만 보기 쉽지만, 근원을 따지면 그런 요소가 있을지라도 실제로 선과 악의 구분은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또 개인적 이해 관계를 떠나 모든 아프간인들이 무자헤딘을 지지했던 것도 아니다. 늘 우리에게 더 두려운 것은 선을 독점하고 있다는 믿음과 역사의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믿음 없이는 싸움을 이기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p. 250
소련은 이 전쟁을 통해 실로 많은 것을 잃었다. 대외적으로는 제3세계의 비동맹국들과 더불어 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강대국으로 인식되던 소련도 실상 제국주의 침략자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대부적으로는 10년동안 공식으로만 1만 5,000명의 전사자와 3만 7,000명의 부상자가 났다고 하나, 실제 숫자는 그 몇 배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잘못된 전쟁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은 매우 좋지 않았다. ···결국 아프간 전쟁이 1989년부터 시작된 동구권의 탈공산화와 '소련 제국'의 몰락을 초래했다고 보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p. 252
아프가니스탄 내 비(非)파슈툰 족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로 분열되었던 무자헤딘과 달리
파슈툰족의 지지를 등에 업은 탈레반은 빠른 시간 안에 카불에 입성한다
불과 몇 달 동안에 성취된 탈레반의 성공은 모든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들은 정말 신의 가호를 받는 불패의 전사인 듯했다. 그들 스스로도 그렇게 믿었는지 모른다. 이슬람을 바로 세우겠다는 이상에 불타고 도덕적 우월감으로 가득 찬 지도자와 어린 전사들이 그 원동력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탈레반의 군사적 성공은 결코 우연이나 신의 가호 때문만이 아니었다. 아프가니스탄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평정되기를 바라고 이를 통해 중앙아시아까지 교역로를 열고자 했던 파키스탄의 정보국은 조직적으로 탈레반의 주축을 훈련시켜 침투시키고 막대한 무기와 자금을 지원했다. ···마침 칸다하르 일대의 아프가니스탄 남부 주민들은 공산정권이나 소련군에 못지않게 고통을 안겨 준 부패하고 타락한 무자헤딘 군벌들에게 몇 년째 시달리던 터라 탈레반의 등장을 환영했다. ···탈레반이 대부분 두라니계 파슈툰으로 구성된 점도 이들이 이 지역에 쉽게 뿌리내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미국도 탈레반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에 안정이 찾아오는 데 기대를 걸었다. 미국은 처음에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에 만연한 아편 재배를 막을 수 있기를 바랐다. ···이란이 지원한 시아파 '헤즈브 이 와흐다트'와 탈레반이 적대관계에 있다는 사실도 '기억력 좋은' 미국으로 하여금 탈레반에 대해 호감을 갖게 했다.
―p. 263~264
카불을 장악한 뒤 하루도 못 되어 탈레반은 포고령을 내렸다. 이제 카불 시민은 탈레반이 해석한 이슬람 율법을 따라야 했다. ···모든 여성은 밖에서 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바깥 출입시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가리고 눈앞의 조그만 망사로 된 창을 통해 밖을 볼 수밖에 없는 부르카를 걸쳐야 했다. 여학교도 모두 문을 닫았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반이슬람의 위협이 사라질 때까지라고 했다. ···도둑은 손과 발을 자를 것이고, 간음한 자는 돌로 쳐 죽이며, 술을 먹은 자는 채찍을 맞으리라 했다. 머지 않아 이 약속은 지켜져서 그 이름마저 의미심장한 '진선제악부(振善制惡部)'가 맡았다. 선을 진작시키고 악을 제압하는 부서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카불 시민들은 이곳을 '젊은 광신자들의 부서'라 불렀다.
―p. 266~267
마자르와 바미얀을 함락시킴으로써 탈레반은 이제 북쪽의 극히 일부분을 제외한 아프가니스탄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군사적 성공만큼 그들의 정치적 입지는 확고해지지 못했다. 아직까지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아미르국'을 승인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한 나라는 파키스탄과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의 세 나라에 불과했다. ···처음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던 미국도 적대적으로 돌아섰다. 러시아는 타지크·우즈베크족의 반탈레반 북부동맹을 지원했고, 이란도 하자라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탈레반은 국제적으로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국제사회와 외국 기관에 대한 극도의 혐오증에 빠진 탈레반은 유엔을 비롯한 국제단체와 비정부 구호기관(NGO)에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p. 272~273
탈레반에 의해 바미얀의 두 불상이 파괴되었던 같은 해에
나란히 무너져 내린 뉴욕의 세계무역 센터
2001년 2월 26일 물라 오마르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새로운 포고령을 발표했다. 아프가니스탄 내의 모든 상과 비이슬람 종교물을 모두 파괴하라는 것이었다. 세계는 경악했다. 21세기의 벽두에 이런 소식을 듣게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두 대불이 깡그리 파괴되기까지는 여러 날이 걸렸다. 결정적으로는 3월 8~9일 몸 곳곳에 박아 넣은 다이너마이트가 굉음을 울리며 폭발하면서 대불은 바미얀 분지를 가득 메운 먼지와 함께 산산조각으로 흩어졌다. 천 몇 백 년을 지켜 온 불상의 비극적인 최후였다.
―p. 274~276
바미얀의 비극이 일어난 뒤 바미얀을 바라보는 세계는 하나가 되었다. 모두 한목소리로 탈레반의 반문명적인 만행을 질타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자신이, 또 서로가 탈레반과 구별되는 문명인임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었다. 비이슬람권은 그 사건이 이슬람에 배태된 문제임을 은근히 시사했다. 반면 이슬람권은 자신들을 탈레반과 구별 짓기 위해 탈레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그러나 탈레반이 문화유산에 대해 자행한 폭력이 어찌 남의 일이기만 한가? 이런 일은 실은 인류 문명의 한 부분으로서 역사 속에 거듭해서 일어났던 것이다. 유럽에서도 비잔틴 시대인 8~9세기에 두 차례에 걸쳐 성상 파괴의 시기가 있었다. ···16~17세기 영국에서는 종교개혁기에 헨리 8세가, 이어서 청교도들이 많은 구교의 성상을 파괴했다. 이러한 일은 독일에서 비롯된 신교의 종교개혁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 시기에 이런 무분별한 파괴 행위를 지칭하는 '반달리즘'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렇게 반달리즘이 횡행하는 속에서 긍정적인 발전도 있었다. 예술품으로서, 역사의 유물로서, 혹은 국가의 아이덴티티를 구성하는 유산으로서, 이러한 모뉴먼트가 보존되어야 한다는 문화유산에 대한 근대적 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문화유산 보존의 면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평화를 사랑한 것만은 아니다. 조선시대에 유생들은 곳곳에서 불상을 넘어뜨리거나 불상의 목을 쳤다.
―p. 290~292
우리나라에서도 1994년 조선시대 정궁인 경복궁의 정면을 가로막고 있던 일제 총독부 건물을 철거했다. 사람들은 민족정기가 곧 되살아날 것처럼 환호했다. 옛 총독부 건물이 어떤 방식으로든 보존될 가치는 없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재론하고 싶지 않은 만큼 너무도 복잡한 문제를 수반한다. 한 가지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많은 한국인들이 이 건물을 자신들이 믿고 싶은 역사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을 상기하면 탈레반이 바미얀 대불이 자신들의 역사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은 우리에게도 전혀 생소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문화유산을 인류 공동의 것이라 여기지만, 문화유산의 가치는 종교 신앙이나 정치적 신조, 국가나 민족적 아이덴티티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p. 294
수없이 여행을 다니는 J가 하루는 지나가듯 내게 말했다. 세계에는 입국 자체가 위험한 나라가 두 곳 있는데, 하나가 예멘, 다른 하나가 아프가니스탄이라고 했다. 하다 못해 내전 중인 시리아도 정부군이 확고히 점령하고 있는 지역―예를 들면 수도 다마스커스―은 적어도 그 지역 내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안전하니 말이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듯이하루가 멀다하고 벌어지고 있는 중동내 테러와 살육을 선정적으로 보도하는 서방언론이 중동을 지구상에서 아주 이상한 지역으로 조명하고 있다는 의견도 일견 타당한 것 같다. 그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리적으로는 중동, 문화적으로는 아랍, 종교적으로는 무슬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알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최근 제주도에 예멘 난민 수백명이 체류한 것과 관련한 문제도 그렇다. 우리가 예멘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은 '무슬림=테러리스트'라는 확고한 공식이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극렬 무슬림 원리주의자에 의해 무차별 테러가 발생하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고, 쏟아져 들어온 무슬림 난민들이 제각기 어떤 신앙을 갖고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병역 대체복무와 마찬가지로 난민을 종교적 이유로 수용하지 않는 것은 더욱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요지는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갖기 쉽다는 것이다. 개인의 두려움이 조직의 두려움으로 불어나고 그것이 한 나라의 두려움으로 발전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봐왔다. 이 책에서 소개되었듯이 20세기 후반 아프간 전쟁에 뛰어든 소련도 그렇고, 베트남 전쟁에 뛰어든 미국도 그렇고, 냉전시기 상대의 세력우위를 막고자 한 발 앞서 불필요하게 전쟁을 벌였고 결과적으로 이 두 국가에 심각한 후유증을 가져왔다. 또 유례없이 어마어마한 부채를 떠안은 양차 대전 이후의 독일에서 시민들의 불안감을 자극해 집권한 것이 나치정권이고, 서양식 근대화의 결과 몰락한 사무라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군국주의를 앞세웠던 것이 20세기 일본의 야만적 제국주의다.
이 책은 아프가니스탄에 관한 책으로는 매우 희귀한 책이다. 보통 중동에 관한 역사서 자체가 많지 않고, 있더라도 각국의 역사를 상세히 서술한 책은 극히 드물다. 고대 동쪽의 라운더바우트(roundabout)를 맡았던 아프가니스탄이 지금처럼 고립된 국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오늘날 자행되고 있는 이른바 '문명'의 파괴와 폭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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