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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일상/book 2018. 7. 15. 19:42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 엘레나 페란테 / 한길사>
차라리 떠나라고 말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서 멀리, 영원히 도망가라고. 모든 것을 이룰 수 있고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그런 곳에 자리를 잡으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나는 그때 내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실은 길이가 길어질수록 고리가 커지는 사슬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향 동네는 나폴리와, 나폴리는 이탈리아와, 이탈리아는 유럽과, 유럽은 전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제야 나는 생각한다. 병든 것은 우리 고향 동네가 아니라, 나폴리가 아니라 지구 전체다. 유일한 우주 또는 무수히 많은 우주가 모두 병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조차 사물의 본질을 숨길 줄 아는 능력이다.
―p.22
'세상은 본질적으로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곳이며 그렇기 때문에 변화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미 제국주의와 스탈린식 관료주의가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는 주장이나 이탈리아를 위시한 유럽노동당들의 개혁 정책은 결국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종속적인 유보 상태로 머무르게 할 뿐이다. 이러한 유보적 태도는 혁명의 불길에 찬물을 쏟아붓는 격이다. 그러므로 만약 세계가 교착 상태에 빠지고 사회민주주의가 승리를 거두면 결과적으로 수세기 후에는 자본주의가 승리하게 될 것이고 노동계급은 강제적 소비주의의 먹이가 될 것이다.'
―p.59
나는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게 교육을 많이 받았고 어떤 면에서는 너무 무지했다. 나 자신을 통제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다른 이들의 사상과 사건을 머릿속에 꾸역꾸역 집어넣느라 열정 없는 인생을 사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게다가 결혼과 안정적인 삶이 너무 빨리 시작될 예정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그곳에서 이미 몰락해버린 기존의 질서 체계 속에 너무 깊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p.85
마리아로사는 학생운동에 니노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하며 그런 사람을 잘 돌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잘 성장시키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고 했다. 마리아로사는 그렇게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소시민적 민주주의자나 전문 기업인, 맹목적인 현대화 신봉자의 본능이 숨어 있기 때문에 그들을 잘 이끌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함께 보낸 시간이 부족했음을 아쉬워하며 다음 기회를 기약했다. 나는 호텔에서 가방을 찾아 나폴리로 향했다.
―p.109
릴라는 엔초에게서 무엇을 분 것일까. 나는 릴라가 엔초에게 본 것이 그녀가 지난날 스테파노나 니노에게서 본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릴라는 엔초를 통해 모든 것을 바로잡기를 원했다. 스테파노의 경우에는 일단 돈이라는 보호막이 사라지자 실체 없고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니노의 경우에는 지성이라는 보호막이 사라지자 릴라에게 이름만 남기고 시커먼 연기처럼 증발해버렸다. 지금 이 순간 엔초만큼은 릴라에게 예기치 못한 아픔을 줄 것 같지는 않았다.
―p.137
'나는 선량한 사람들의 유복한 삶이 어떤 건지 알고 있지만 너는 진짜 가난이 어떤 건지 상상조차 못할걸?'
―p.162
'그래. 나를 겁주려는 사람한테는 겁을 주어야 해. 다른 방법은 없어. 폭력은 폭력으로 맞서는 수밖에. 내 것을 빼앗기면 어떻게 해서든 다시 빼앗아야지. 당한 만큼 고스란히 되갚아주어야 해.'
―p.200
'아, 리나 체룰로. 너는 정말 구제불능이구나. 대체 왜 그 목록을 적은 거지? 착취당하고 싶지 않아서? 너 자신과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근무 조건을 향상시키려고? 지금 투쟁을 시작하면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승리의 행진에 합류라도 하게 될 것 같아? 이런 곳에서 일하고 있는 주제에? 저기 저 사람들을 데리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쓰디쓴 노동의 노고를 감내하게 하려고 만들어낸 흰소리일 뿐이다. 끔찍한 실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나. 이 끔찍한 실태를 나아지게 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완전히 해결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어린 시절부터 보아오지 않았나. 상황을 나아지게 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우리는 더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네 자신은 예전보다 나아졌나?
···맞아. 모든 악의 근원은 네 머리에 있어. 머리가 만족하지 못해 몸까지 병드는 거야. 이런 자신이 지긋지긋해. 모든 것이 넌덜머리가 나. ···지금 내가 뭘 자른 거지? 걸쭉한 누런 액체가 사방에 튀네. 역겨워라. 그래. 그래도 다행이야. 지구는 돌지만 돌다가 떨어지면 부서져버릴 테니 말이야.'
―p.220~221
해변을 따라 이어진 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바다는 고요했지만 강한 체취를 내뿜었다. 매일 아침 우리 동네가 아니라 저 멀리 해안 근처에 들어선 건물에서 눈을 뜰 수 있었다면 나폴리에 대한 내 감정이 지금과는 달라졌을까. 나는 무엇을 바라는가. 내 출생성분을 바꾸기라도 하려는 건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태생도 바꾸려는 건가. 빈곤과 탐욕 때문에 괴로워해본 적도 없고 원한과 분노를 알지도 못하는 시민들로 이 황량한 도시를 다시 채우고 싶은 건가. 태초에 이 땅에 거주하던 신처럼 이 황홀한 풍경을 있는 그대로 즐길 줄 아는 그런 사람들로 이 도시를 다시 채우고 싶은 건가. 내 안에 있는 악마를 만족시키고 악마에게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건가.
―p. 315~316
헤겔에게 침을 뱉는 것은 남성 중심 문화에 침을 뱉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레닌에게 침을 뱉는 행위다. 유물론적 역사관과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과 남근 선망 사상에 침을 뱉는 것이며 ··· 나치즘과 스탈리니즘과 테러리즘에 침을 뱉는 것이다. 전쟁과 계급 간 투쟁과 무산계급 독재,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침을 뱉는 것이다. 평등이라는 이름의 함정과 모든 가부장적 문화의 징후와 제도적 형태에 침을 뱉는 것이다. 여성의 지성이 허비되는 것을 막고 사회에서 남성 중심적인 문화의 특성을 제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인-노예 변증법 따위는 집어치우자. 머릿속에서 열등감을 깡그리 없애야 한다. 여성의 자아를 되찾아야 한다. 여성은 남성의 안티테제가 아니다. 여성의 '다름'을 인정하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대학은 여성을 해방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 억압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관문이다. 이는 현명하지 않은 일이다. 남성의 영역이 우주까지 확장되는 데 비해 지구상에서 여성의 삶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 여성은 지구의 또 다른 얼굴이다. 여성은 예측할 수 없는 주체다. 동시대,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부터 남성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
―p. 393 ~ 394
"너 그거 알아? 너는 언제나 '사실 '진실'이라는 말을 참 자주 하지. 말할 때도 그렇고 글을 쓸 때도 그래. 아니면 '갑자기'라는 말도 참 자주해. 그런데 요즘 세상에 '진심'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며 '갑자기' 일어나는 일은 또 얼마나 돼? 세상일은 다 사기야.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법이야. 이런 것은 네가 나보다 잘 알잖아. 나는 어떤 일도 '진심'으로 하지 않아. 그리고 모든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갑작스러운' 일은 멍청이들에게나 일어나는 거라고."
―p. 450~451
무엇인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어린 시절부터 나를 사로잡았지만 나는 그제야 처음으로 그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무엇인가 되기를 원했다. 그 무엇인가가 뭔지는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물론 그동안 무엇인가가 되기는 했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뚜렷한 대상도, 진정한 열정도, 확실한 야망도 없이 말이다. 릴라는 중요한 사람이 되는데 나만 혼자 뒤쳐질까봐 무엇인가가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뭐라도 되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무엇인가 되기를 바랐지만 릴라의 영향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제 나는 다시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 이번에는 오직 나를 위해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 릴라에게서 벗어나 성숙한 인격체로서 말이다.
―p.495
나는 성숙이란 결국 삶의 굴곡을 호들갑 떨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일상적인 삶과 이론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고. 변화를 기다리며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정확하게 파악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p. 506
나는 돈이란 것이 고액 연봉과 거액의 수수료로 변하기 전에 얼마나 많은 뒷거래를 거치는지 생각했다. 밀수품을 나르거나 공원에 있는 나무의 가지를 자르거나 공사장에서 일하며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는 고향의 젊은이들이 생각났다. 어린 시절부터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입에 풀칠을 하던 안토니오, 파스콸레, 안초가 생각났다.
엔지니어, 건축가, 변호사, 은행가 같은 사람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돈도 비록 여러 단계를 거쳐 여과되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솔라라 집안사람들의 돈과 다를 바 없이 불법적인 거래나 파괴 행위를 통해 얻은 것이다.
···더러운 돈과 깨끗한 돈의 경계는 어디일까. 엘레오노라가 피렌체의 무더위 속에서 하루 종일 마음껏 뿌린 돈은 과연 얼마나 깨끗할까. 내가 선물로 받아 집으로 가져가는 이 물건들을 사기 위해 사용된 수표가 미켈레가 릴라의 입금을 지급하기 위햇 사용하는 수표와 다를 게 뭐가 있단 말인가.
―p. 535~536
신은 인간, 즉 'Ish'를 자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하는데 이때 남성형과 여성형을 만들어냈다. 어떻게 만들어냈냐고? 신은 먼지 흙으로 'Ish'의 형태를 만든 다음 콧구멍으로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런 다음 가공되지 않은 원자재 상태가 아니라 이미 형상을 갖추고 생명을 얻은 남성을 재료로 Isha'h, 즉 여성을 만든다. 신은 남성의 옆구리에서 여성을 취한 다음 즉시 살로 상처를 아물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Ish는 여성을 두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는 다른 모든 창조물과는 달리 나와 다른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내 살의 살이며 내 뼈의 뼈다. 신께서 나로부터 만드신 것이다. 내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신 다음 그녀를 내 몸에서 뽑아내신 것이다. 나는 Ish이고 그녀는 Isha'h이다. 여자를 부르는 명칭에서부터 그녀가 신성한 영혼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나에게서 유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여자는 내 어근에 붙은 접미사일 뿐이며 오직 내 언어 속에서만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다."
―p.52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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