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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아이 이야기일상/book 2018. 7. 16. 01:59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 엘레나 페란테 / 한길사>
"사라토레의 지성에는 뿌리가 없어. 그러니 자신의 신념을 위해 투쟁하기보다는 권력자의 호감을 사는 것을 더 좋아하는 거야. 니노는 아주 충성스러운 관료가 될 거다."
―p. 90
이 얼마나 혼란스러운 삶인가. 우리 몸은 폭발이 일어나 수많은 파편으로 조각난 것처럼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실비아, 마리아로사, 프랑코와 함께 환멸에 빠진 논리학자 같은 태도로 이러한 흩어짐에 대해 이야기했다. ···프랑코는 '객관적으로' 혁명적이었던 시대의 종말이 가까이 다가왔다고 했다. 프랑코는 '객관적'이라는 수사를 냉소적으로 사용했다. 혁명의 종말과 함께 지금껏 나침반 역할을 하던 모든 계급이 사라지고 있다고 했다.
―p. 95
"우울한 사람은 글을 쓰지 않아. 자기 상황에 만족하는 사람들이나 글을 쓸 수 있는 거야. 여행을 하고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나 글을 쓸 수 있는 거라고. 말도 그런 사람들이 하는 거야. 궁극적으로 자기 말이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말이야."
"시늉을 하는 것은 거의 생리적인 일이야. 이른바 혁명 주창 세력이었던 우리는 혼돈 속에서도 질서를 만들어냈고 모든 일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잘 알고 있는 시늉을 했지. ···무슨 일이 있어도 혼란스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은 정말 굉장한 거야. 상처가 덧날 일도, 꿰맨 흔적이 남을 일도, 어둠 속에서 두려워할 일도 없지. 문제는 어느 순간 그런 속임수가 통하지 않게 된다는 거야."
―p. 96
차이가 있다면 첫 번째 책을 출간했을 때는 당시만 해도 혁명은 보편적인 감정이었기에 언제나 혁명의 필요성을 호소하면서 행사를 마무리지었지만 지금은 혁명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대신 '반항하는 것은 합당한 행위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여기에 사회적 합의의 범위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국가라는 체제의 존속 기간이 예상했던 것보다 연장되었으니 국가를 제대로 통치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시급하다고 했다.
―p. 105
'지금까지 저지른 실수만으로도 충분해. 이제 모든 사람의 낯짝에 침을 뱉고 떠나도록 해.'
―p. 142
"그 먼 곳에서 바다가 보여봤자 얼마나 보인다고. 푸른색이 조금 보일 정도지. 바다를 보려면 가까이에서 봐야지. 그래야 그 바다가 쓰레이투성이에 흙탕물같이 더러운 오염된 오줌물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너희 같은 식자들은 진실보다 거짓을 더 선호하지."
―p. 174
동네 사정이 얼마나 악화됐는지에 대해 우울하게 말을 늘어놓던 어머니는 갑자기 다른 때보다 더 열렬히 자신이 릴라를 지지한다는 것을 드러냈다. 어머니는 릴라야말로 동네를 제대로 굴러가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했다. 릴라는 좋든 나쁘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이룰 줄 안다고 했다. 물론 후자에 더 능하지만, 어머니는 릴라는 모르는 게 없으며 누가 어떤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도 다 알지만 절대 사람을 정죄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릴라는 누구든 실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고 했다. 자기도 그랬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눈에 릴라는 큰길에서부터 공원, 오래된 건물과 새로 지은 건물을 복수의 빛으로 비추는 성스러운 여전사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p. 205~206
그때 릴라는 분명 '경계의 해체'라는 표현을 썼다. 릴라가 그 표현을 쓴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릴라는 힘겹게 그 말의 뜻을 설명했다. 릴라는 내가 '경계의 해체'가 무엇인지 이해해주기를 바랐다. 그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알아주기를 바랐다. 릴라는 숨을 헐떡이면서 내 손을 더 세게 쥐었다. 릴라는 사물과 사람의 경계는 섬세해서 무명실처럼 잘 끊어진다고 말했다. 릴라는 자기는 항상 어떠한 사물이나 사람의 경계가 해체되어 그 내용물이 다른 대상 위로 쏟아지는 모습을 봐왔다고 했다. 이질적인 물질이 녹아 서로 합쳐지고 뒤섞이는 모습을 목격해 왔다고 했다. 릴라는 평생 삶의 경계가 단단하다고 믿으려고 애써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우리의 삶이 상처나 충격에 내구력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고 했다.
···릴라는 자기는 절대로 정신을 놓을 수 없다고 했다. 잠시라도 정신을 놓으면 거칠고 고통스럽게 뒤틀린 사물의 본모습 때문에 두려워진다고 했다. 릴라는 사물의 거짓된 모습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잘 정돈됐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 마음을 안정시킨다고 했다. 그런 사물의 거짓된 모습을 사물의 본모습이 밀쳐내 버리면 자기는 혼란스럽고 끈적거리는 현실의 나락으로 떨어져 감정에 뚜렷한 경계를 그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고 했다. 촉각이 시각으로, 시각이 후각으로 녹아내린다고 했다.
"아! 세상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지금 너도 봤잖아, 레누. 확실하게 정의내릴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어. 그런 건 아무것도 없어."
―p. 238~239
"그날 나는 총 때문에 두려웠던 것이 아니었어. 내가 두려웠던 건 불꽃 색깔이 너무 예리해 보였기 때문이었어. 특히 녹색과 보라색이 너무나도 날카로워 보였어. 그 불빛에 난도질당할 것 같았어. 폭죽이 지나가면서 남긴 비행운이 물건을 가는 데 쓰는 줄처럼 리노를 쓸고 지나가 리노의 살이 찢어져 그 안에서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리노의 다른 모습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어. 그 순간 바로 원래 몸속으로 그것을 집어넣지 않으면 그것이 덤벼들어 나를 해칠 것만 같았어.
레누, 나는 평생 그런 순간에 저항해왔어. 마르첼로가 두려우면 스테파노를 이용해서 나 자신을 보호했고 스테파노가 두려우면 미켈레를 이용해서 나 자신을 보호했어. 미켈레가 두려우면 니노를 이용해서, 니노가 두려우면 엔초를 이용해서 나 자신을 보호해왔어. 사실 보호라는 말 한마디로는 부족해. 내가 몸을 감추기 위해 지금껏 꾸며낸 크고 작은 일들을 네게 일일이 다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거야. 결국은 하나도 소용이 없었지만.
이스키아 섬에서 내가 얼마나 밤하늘을 두려워했었는지 기억해? 너희들은 모두 밤하늘이 아름답다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어.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달걀 껍질과 흰자 속에 갇힌 논색 빛이 감도는 상항 노른자 맛이 입 안에 느껴지는 것 같았어. 깨져서 속이 드러나 보이는 삶은 달걀 말이야. 입 속에 독이 든 달걀 같은 별을 머금은 느낌이었어. 고무 같은 질감의 하얀 별빛이 새까만 아교 같은 밤하늘과 함께 이빨에 쩍쩍 들러붙는 것 같았어. 구역질을 참으면서 그걸 잘게 부수면 입 속에서 모래알 부서지는 느낌이 났지.···내 머리는 언제나 틈새를 찾아내거든. 사방팔방에서 현실 너머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 곳이 보이는 틈새를 찾아내고 말지. ···나는 도무지 가만히 있지 못해. 항상 무엇인가를 하거나 다시 시작하지. 진실을 감추기도 하고 밝혀내기도 하고 뭐든 튼튼하게 만들었다가 갑자기 파괴하거나 부서뜨려 버리지.
하지만 그래도 소용없어.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거든. 두려움은 정상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 있는 틈 속에 언제나 존재해. 그곳에서 적당한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레누. 언제나 그럴 거라고 의심해 왔었는데 오늘 저녁 확신을 가지게 됐어.
―p. 240~242
두려움은 내 안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용암도, 모든 것을 녹여버리고 지구 내부에서 흐르는 상상속의 불타는 강물마저도 나를 두렵게 하지 못했다. 모든 두려움은 내 머릿속에서 정돈된 문장과 조화로운 이미지로 정리되어 나폴리의 길처럼 까만 돌로 포장된 도로가 되었다. 그 도로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나였다. 한마디로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공부든 책이든 프랑코든 피에트로든 아이들이든 니노든 지진이든 그 무엇이 내게 부딪혀 올지라도 결국 다 지나갈 것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늘어나는 나의 수많은 자아 가운데 그 어떤 것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터였다. 나는 연필심이 원을 그리는 동안 움직이지 않는 컴퍼스의 고정된 축이었다.
―p. 243
"어렸을 때부터 나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랐어. 물론 내가 생각하는 것과도 달랐지. 나는 속으로 생각하곤 했어. '내 안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어. 이름조차 없는 어떠한 존재가 내 혈관 속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어.' 하지만 나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어. 무엇보다도 그 존재가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몰랐어. 그러다 리나가 내게 억지로 리나 모습의 일부를 취하게 한 거야. 달리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 리나가 어떤지 잘 알잖아. 리나는 이렇게 말했어. '이것부터 한번 해봐.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자.'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섞이기 시작했어. 정말 재미있었어. 이제 나는 예전의 나도 아니고 리나도 아니야. 조금씩 뚜렷한 형태를 갖춰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거야."
―p. 291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정당이란 동의를 얻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혜택을 제공하는 유통업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야. 사상이란 그저 장식물 같은 존재일 뿐이지."
―p. 314
나는 릴라가 나를 상류사회의 일원이기는 하되 그들과는 다른 존재로 생각해주기를 바랐다. 릴라 자신도 내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릴라는 내가 내 동료들에 대해 비아냥거리는 말을 들으며 재미있어 했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이 계속 내 동료로 남기를 바랐다. 가끔 릴라가 내가 정말로 대중에게 현실을 가르쳐주고 어떤 방식으로 생각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려고 나에게 집착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릴라는 내가 책을 쓰고, 잡지와 신문에 기고하고 가끔 텔레비전에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이어야만 내가 고향에 남기로 한 결정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게 그런 후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릴라의 친구이자 릴라와 이웃으로 지낼 수 있는 전제 조건인 것 같았다.
―p. 374
릴라는 표현의 자유나 후진성과 현대화의 충돌 따위에는 하나도 관심이 없었다. 릴라는 오직 '암울한 지역 분쟁'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릴라는 내가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알아왔고 따라서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는 실존 인물들과의 싸움에 이바지하기를 원했다.
―p. 418
'대체 어찌된 일이야? 그 두 얼간이에게 제대로 맞서지도 못할 거면 왜 고향으로 돌아온 거야? 너무 소심해진 거야. 천민과 어울려주는 척하는 민주적인 사모님 노릇이나 하고 싶었던 거야. 신문에는 내가 태어난 곳의 현실과 교감을 잃지 않기 위해 고향에 살고 있다고 했지만 너는 꼴불견이야. 교감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잖아. 토사물 냄새나 피 냄새나 더러운 냄새만 맡아도 기절하는 주제에.'
―p. 431
그동안 내 작품세계는 방향이 달라졌다. 고향이라는 소재는 뒤로 밀려났다. 어느 정도의 명성과 온갖 혜택을 누리고 있는데도 스스로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한 장소에만 머무르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위선적인 태도가 아닐까. 그곳에 머물러 봤자 내 형제자매와 친구들, 그들의 자식과 손자손녀의 삶이 기울어가는 모습을 불편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말이다.
···나폴리는 일찌감치 기술 발달과 과학과 경제 발전, 풍요로운 자연환경, 역사는 진보한다는 이념과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 따위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똑똑히 보여준 유럽의 대도시였다. 이런 나폴리에서 태어나서 좋은 점은 딱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요즘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주장하는 바를, 끝없는 진보의 꿈은 사실 잔인함과 죽음으로 점철된 악몽일 뿐이라는 사실을 어렸을 때부터 거의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p. 470~472
"우리 모두 그 시궁창 속에 떨어졌어. 돌아다녀보면 사회에서 존경받는 사람들은 이미 그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정말 안타까워, 엘레나. 정말이지 안타까운 일이야. 노동자들을 위한 정당에 희망 없이 버림받은 정직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p. 481
나에 비해 릴라는 언제나 자기 공포의 중심에 있었다. 릴라가 다른 데 관심을 쏟을 때는 고통을 느낄 때뿐이었다. 릴라의 해독제는 새로운 고통이었다. 새로운 고통 앞에 릴라는 전투적이고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물에 빠져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물에 떠 있으려고 팔다리를 움직이는 사람 같았다.
―p. 488
"눈물이 고통을 의미하는 건 아니란다."
"맞아요. 하지만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어떻게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알 수 있죠?"
"고통스러워할 수 있고말고. 눈물 없는 고통이야 말로 더 큰 고통이란다."
―p. 492~493
릴라는 지적이었지만 이를 활용해 뭔가를 얻어내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돈이란 저급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귀부인처럼 자신의 지성을 허비했다. 니논느 바로 릴라의 이런 점, 즉 대가를 바라지 않는 릴라의 지성에 매료되었다. 이러한 릴라의 특성은 다른 수많은 여성과 차별되는 것이었다. 릴라는 그 어떠한 가르침이나 필요 또는 목적에 굴복하지 않았다. 릴라는 제외한 우리 모두에게는 무언가에 굴복했던 경험이 있었다. 우리는 그런 경험을 통해 시험과 실패와 성공을 겪고 나서 우리 자신을 현실에 알맞게 재조정했다. ···릴라는 달랐다. ···릴라는 구제받고 싶어 하지 않는 프롤레타리아였다.
―p. 564~565
"상처도 누군가를 사랑해야 받을 수 있는 거야.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니 상관없어."
―p. 568
엘사는 즐겁다는 듯이 내게 학교를 그만두기로 결정했다는 말을 남겼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맹신하는 내가 우습게 느껴졌다면서 책이 선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 좋은 책을 쓰는 거라고 했다. 엘사는 리노가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않았지만 선한 사람이라고 했다. 자기 아빠는 선한 사람이기 때문에 훌륭한 책을 썼다고 했다. 책과 사람과 선한 의지를 연결하는 엘사의 담론은 거기서 끝났다. 나는 끝내 그 담론 속에 끼지 못했다.
―p. 570
복잡한 시대였다. 우리가 성장했던 세계의 질서가 사라지고 있었다. 올바른 정치 노선에 대해 오랫동안 공부하고 연구하며 습득한 기존의 능력이 언젠가부터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무정부주의자니 마르크스주의자니 그람시 추종자니 노동자니 하는 표현들은 어느덧 한물간 구호나 심한 경우 야만을 상징하는 것으로 취급당했다. 지난날 혐오의 대상이었던 타인에 대한 착취와 최대 이윤 추구의 법칙이 지금은 장소를 불문하고 자유와 민주주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그러는 동안 국가와 혁명 조직 내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일들이 합법적이거나 불법적으로 혹독하게 정산되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너무나 허무하게 살해당하거나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고 평범한 사람들마저 우르르 떼를 지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p. 595
지난날 국가를 무너뜨리려 했던 세력 앞에 겁에 질려 물러났던 민중은 이제 여러 명분 아래 국가를 섬기는 척하면서 사과 속에 생긴 거대한 벌레처럼 국가를 먹어치운 이들에게 신물이 나 뒤로 펄쩍 뛰었다. 화려한 권력의 향연과 신중치 못하고 오만한 언어의 홍수 아래 숨어 있던 검은 파도가 점점 더 드러나면서 이탈리아 전역에 흘러넘쳤다. 유년 시절 우리 고향만이 국가의 혜택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나폴리만 구제 불능이었던 것이 아니었다.
―p. 607
"아버지는 계획적으로 이것저것 조금씩 바꾸면 된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어중간하게 바꾸다보면 거짓으로 만들어진 체제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게 돼.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처럼 거짓말을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체제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거지."
―p. 609
"아, 이 얼마나 찬란하고 중요한 도시란 말이니. 임마야, 여기서는 세상의 모든 언어가 다 사용되었단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세워졌다가 무너져버렸단다. 이곳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은 절대로 믿지 않으면서 정작 자기들은 매우 수다스러웠지. 나폴리에는 베수비오 화산이 있어서 권력자들의 가장 위대한 업적조차도, 가장 눈부신 예술 작품마저도 화염과 지진과 재와 바다 앞에서 순식간에 무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매일 일깨워주지."
―p. 617~618
"지난 수세기 동안 모든 사람은 커다란 항구와 바다, 배와 성, 갑자기 불길을 내뿜는 거대하고 시꺼먼 베수비오 화산과 원형극장 모양의 도시, 정원과 공원과 궁전에 찬사를 보냈어. 하지만 그 후 수세기 동안 모두 이 도시의 비효율성과 부패와 육체적 정신적 빈곤을 불평하게 되었지. 외관과 명칭만 그럴싸할 뿐 제대로 돌아가는 정부기관이 하나도 없어. 돈 받고 일하는 사람이 그렇게나 많은데도 말이야. 이해할 수 있는 규율 같은 것도 없어. 무질서하고 통제할 수 없는 사람들이 별의별 물건을 다 가져다 파는 상인들로 가득한 길에 북적대고 있을 뿐이지. 부랑아에서 거지들까지 모두 귀청이 찢어질 정도로 소리를 질러대. 아, 정말이지 나폴리처럼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도시는 어디에도 없을 거야.
우리는 한때 우리 고향에만 폭력이 만연하다고 생각했었어. 우리 주위는 태어날 때부터 폭력으로 가득했지. 폭력은 평생 우리 곁을 스쳐지나가거나 우리 몸에 손을 댔어. 그래도 우리는 그저 우리가 운이 나빴다고만 생각했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주려고 얼마나 많은 말을 만들어냈는지 기억해?
···베르길리우스 시인은 카르보나라 광장이라고 불리던 그곳에서 매년 '카르보나라 놀이'를 하도록 명령했다. '카르보나라 놀이'는 가짜 검투사 놀이였어. 'morte de homini come de po è facto' 그러니까 사람들을 진짜로 죽이지는 않았어. 'il homini ali facti de l'arme' 즉 사람들에게 무기로 연습을 시키는 거였어. 얼마 지나지 않아 놀이는 유희나 훈련이 아니게 되었고 동물의 시체와 쓰레기를 버리던 그곳이 인간의 피로 흘러넘치게 되었지. 돌팔매질 놀이도 그곳에서 시작된 것 같아.
···그 후 카르보나라 광장에서는 돌멩이가 아니라 진짜 무기로 싸우기 시작했어. 카르보나라 광장은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쏟아내야 끝날 수 있는 싸움을 벌이는 장소가 됐지. 걸인과 귀족과 왕족이 모두 달려와 복수하기 위해 죽고 죽이는 장면을 구경했지. 그러다 잘생긴 소년이 죽음의 모루에 날을 간 칼날에 찔려 목숨을 잃기라도 하면 걸인과 귀족과 왕과 여왕은 그 즉시 하늘을 꿰뚫을 정도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아, 사람을 베고 사지를 찢고 살육하는 폭력이라니."
―p. 625~627
릴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땅 밑으로는 인간의 피가 흐르는데 땅 위에는 신과 평화와 기도와 책이 있는 거야."
"성당이나 수도원이나 책으로 가리려고 해도 소용없어. 책이 정말 중요한 것 같지? 그러니 너도 책에 네 평생을 바쳐왔겠지. 그래봤자 소용없어. 악은 결국 예기치 못한 곳에서 바닥을 뚫고 기어 나오는 법이야."
"사방이 너무나 고요할 땐 별 생각이 다 떠오르곤 해. 너무 신경쓰지 마. 모든 사람이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올바른 말을 하고, 모든 일에는 그에 따른 결과가 있고, 호감과 비호감,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나오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위안을 받게 되는 것은 형편없는 소설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야."
―p. 628~632
"글을 쓰려면 삶의 의미가 될 정도로 간절히 원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해. 그런데 나는 살고 싶은 마음도 없어. 나는 한 번도 너처럼 강렬하게 살려는 의지를 가졌던 적이 없어. 우리가 지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 순간 나 자신을 지워버릴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해질 것 같아. 그런 내가 글이라는 당치도 않아."
"컴퓨터는 겉보기에나 깨끗하지 실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어. 주변을 지저분하게 만드는 물건이야. 사람들에게 여기저기 흔적을 남기고 다닐 수밖에 없게 해. 아무데서나 쉴 새 없이 똥을 싸고 오줌을 누고 다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 나는 나와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컴퓨터 자판은 삭제키야."
"나는 내 이름이라는 매듭을 풀어버리고 싶어. 풀어서 내다버리고 싶어. 잊어버리고 싶어."
―p. 638~639
아이들은 나로서는 아직가지 감히 생각조차 못하는 태도와 목소리로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권리를 주장하며 자의식으로 충만하다. 남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내 딸들과 같은 행운을 가진 것은 아니다. 부유한 국가에 만연한 평범한 속에는 부유하지 않은 세계의 공포가 내재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 공포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폭력이 우리들의 도시와 일상에 침투하면 그제야 흠칫 놀라며 불안해 했다.
지난해 텔레비전에서 성냥을 가볍게 부딪혀 불을 붙이는 비행기들이 뉴욕의 쌍둥이 빌딩에 불을 붙이는 장면을 보고 나는 두려움에 떨면서 데데와 엘사, 피에트로와 한참동안 통화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보다 아래에 있는 세계에는 지옥이 있다. 딸들도 그것을 알기는 하지만 글로만 배웠을 뿐이다. 딸을은 분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누릴 수 있을 때까지 삶의 기쁨을 누린다.
―p. 642
토리노도 나폴리와 별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이국적인 것이 침범해 그런 분위기가 어느새 일상이 된 것이 마음에 들었지만 막상 고향에 도착하자 우리 동네의 인류학적 풍경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알 수 있었다. 동네 사투리는 고유의 전통대로 미지의 언어를 받아들였고 서로 다른 음성항적 기능과 구문법, 과거와는 전혀 다른 정서를 받아들이면서 변화하고 있었다. 건물의 잿빛 돌벽에 갑자기 간판들이 내걸렸으며 과거의 함법적이고 불법적인 매매와 새로운 합법적이고 불법적인 매매가 뒤섞였다. 폭력도 새로운 문화에 문호를 개방했다.
―p. 646~647
나는 이내 모든 것이 내 상상일 뿐임을 알아차렸다. 나느 나도 모르게 불안과 질투와 증오와 애정을 더하고 있었다. 릴라에게는 그런 욕망이 없었다. 릴라에게는 평생 욕망이 없었다. 자기 이름을 연관지을 만한 계획을 세우려면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 릴라는 내게 자기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에게 좋아할 만한 점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우울증이 극에 달할 때면 나는 릴라가 자신의 비뚤어진 모습과 악의적인 반응과 목적의식 없는 지성이 티나에게 나타나는 것을 보지 않으려고 일부러 아이를 잃어버렸을 거라고 상상하기까지 했다. 릴라가 자기 자신을 지워버리려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릴라는 평생에 걸쳐 자기 자신을 지워왔다. 그렇기 때문에 숨 막히도록 좁은 공간 속에 자신을 가두고 세상은 국경이 없어져 가는데도 정작 자신은 그 틀을 더욱더 좁혀 왔던 것이다.
―p. 649
나는 릴라를 만나 릴라의 항변을 듣고 내 입장을 설명해줘야 했다. 때로는 죄책감이 들고 릴라를 이해할 수 있었다. 때로는 나를 자기 인생에서 이토록 깔끔하게 잘라 내버리기로 한 선택 때문에 릴라를 증오했다. 노년기에 들어선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서로의 존재와 유대감이 절실한 이 시점에 말이다.
릴라는 언제나 그랬다. 내가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나를 소외시키고 나를 벌아고 좋은 작품을 썼다는 만족감까지 손상시켰다. 나는 화가 났다. 이런 식으로 자기삭제를 연출하는 행위도 이제 내게 걱정보다는 분노를 자아냈다.
···타고난 천성과 자신이 처했던 환경 때문에 이루지 못했던 것을 내가 이루기를 바랐던 릴라와 그런 릴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나만의 문제일 것이다. 나의 부족함 때문에 화가 나서 나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도 자기처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려는 릴라와 수개월 동안 쓴 글로 그런 릴라에게 경계가 해체되지 않은 형태를 만들어주고 릴라를 이겨내 릴라에게 평안을 찾아주고 그로써 나도 평안을 찾으려 하는 나만의 문제일 것이다.
―p. 654
소설과는 달리 진짜 인생은 일단 지나간 후에는 명확해지기보다 모호해지는 법이다. 릴라가 이토록 명확하게 자신을 드러냈으니 이제 다시는 릴라를 보지 못해도 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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