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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이름의 이야기일상/book 2018. 6. 30. 00:17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엘레나 페란테/한길사>
불평등에는 고약한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나는 드디어 깨달았다. 그것은 내면 깊은 곳에서 작용하며 금전적인 문제를 초월하는 것이다. 식료품점과 구두공장과 구둣가게에서 벌어들이는 돈으로는 우리의 출생 배경을 숨기지는 못한다. 릴라가 계산대 서랍에서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꺼낸다 해도, 그 액수가 3백만 리라가 되었든 5백만 리라가 되었든 돈으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p.170
"네가 말하는 일은 이미 과거의 일이야. 우리는 세로운 세대이고."
―p.182
릴라가 그런 아이였던가. 원래부터 나처럼 고집스러울 정도로 성실했던 게 아니었던가. 이때껏 오직 내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그토록 많은 생각을 하고, 구두를 만들고, 글을 쓰고 이야기를 하고, 복잡한 계획을 짜고, 분노하기도 하고, 새로운 것을 창작해낸 것이었단 말인가. 그녀가 이토록 방황하는 이유는 그런 목적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인가. 릴라가 이루어낸 모든 일이 실은 매번 자신이 처했던 혼란스러운 상황의 결과물이었단 말인가. ···"내가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보이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아."
―p.195
"여기 눈 뒤가 아파. 뭔가가 누르고 있는 것 같아. 저기 저 칼들 보여? 날이 서 있지? 지금 막 칼갈이에게 맡겼었거든. 살라미 햄을 자르면서 사람의 몸에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르는지 생각하곤 해. 너무 많은 것을 욱여넣으면 뭐가 되든 망가지는 법이야. 그렇지 않으면 불꽃이 일고 불타오르게 되는 거지. 그 사진이 불타버려서 다행이야."
―p.196
"그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그래왔기 때문이야. 하지만 머릿속에 정말 자기 자신이 힘들여 생각해낸 것은 하나도 없어. 모르는 게 없는 척하지만 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이야."
―p.221
어느 날 오후 릴라가 니노에게 부자와 빈민 간의 갈등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조용히 말했다. ···"왜?" ···"하류층은 상류층으로 올라가고 싶어 하지만 상류층 사람들은 자리를 지키고 싶어 하니까. 결국에는 어떤 식으로든 서로의 얼굴에 침을 뱉고 발길질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거든."
―p.289
'행복한 나날들'이라니. 말도 안되는 문장이었다. 왜냐하면 위니의 인생에서 행복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행동에서도 생각에서도 행복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책에서 위니보다도 인상적인 인물은 댄 루니였다. 댄 루니는 장님이지만 괴로워하지 않았다. 시력을 잃은 인생이 더 나았기 때문이다. 귀머거리에 벙어리가 되어야만 삶다운 삶을 살게 되지 않겠느냐고, 삶을 있는 그대로 더 순수하게 살아가게 되지 않겠느냐고 자문하는 인물이었다.
―p.295
나는 대체 왜 항상 이 모양일까. 너무나 간절하게 부와 명예와 칭찬과 성공을 갈망하는 본심이 두려워서 오히려 내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려는 것일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그 간절함이 마음속에서 폭발하여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될까봐 두려운 것일까. ···그래서 나는 언제나 한걸음 다가가다가도 즉시 물러설 태세를 갖추는 것일까. 그렇기에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언제나 상냥한 미소를 머금은 채 행복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일까. 그래서 내게 고통을 주는 이들을 위한 합리적인 변명거리를 내가 먼저 나서서 제공해주는 것일까.
―p.330~331
나는 타인의 요구에 복종하는 존재였다. 나는 릴라와 니노를 통해서만 의미를 얻는 드러나지 않는 존재였다. 릴라와 니노가 텅 빈 집에서 포옹하고 입맞춤을 하는 장면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들의 열정이 나를 덮쳐와 혼란스러웠다. 그 둘을 사랑했기에 정작 나 자신은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만의 열망을 느끼고 붙잡지 못하는 것이다. 릴라와 니노처럼 그 열망을 위해서라면 장님에 귀머거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p.397
모든 것이 아슬아슬하다. 위험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위험을 가무하지 않는 이들은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평생을 구석에 처박혀 인생을 낭비하게 된다. 불현듯 왜 내가 아닌 릴라가 니노를 차지하게 됐는지 이유를 깨달았다. 나는 감정에 몸을 내맡길 줄 모른다. 감정에 이끌려 틀을 깨뜨릴 줄 모른다. 내겐 니노와 단 하루를 즐기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릴라와 같은 강인함이 없었다. 나는 항상 한 발짝 뒤에서 기다리기만 했다.
―p.404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나는 너무 두려운 나머지 모든 것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악몽 속의 괴물들이 내 영혼을 먹어치우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나는 저 암흑 속에서 미친개와 독사와 전갈과 거대한 바다 괴물이 나타나기를 바랐다. 바다 끝자락에 앉아 있는 동안 한밤의 암살자들이 모습을 드러내 나를 고문하기를 바랐다.
―p.405
릴라는 언제나 감각이 둔한 상태였다고 했다. 온몸이 탈지면에 꽁꽁 싸여 있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현실세계가 아닌 자신의 육체와 자기를 감싼 탈지면 틈새에서 상처가 빚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했다. 곧 죽게 될 거라는 상상은 너무나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 아무것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이 사라졌다고 했다. 아무것도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모든 것이 망가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불현듯 극단적으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격렬한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했다고 했다. 멜리나처럼 미쳐버리기 전에, 대로변을 가로지르다 트럭에 치여 끌려가기 전에, 그런 릴라를 변화시킨 것이 바로 니노였던 것이다.
···릴라는 여러 장에 걸쳐 부활의 의미를 다루었다. 부활이란 무아지경에 빠지는 것이다. 기존의 모든 구속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형용할 수 없이 기쁜 새로운 구속에 얽매이는 것이다. 다시 생명을 얻는 것이자 기존 현실을 뒤집는 봉기이기도 한 것이다. 니노와 릴라, 릴라와 니노는 함께 인생을 다시 배우게 되었다. 인생에서 독기를 제거하고 오직 사유와 삶의 즐거움만으로 재구성하게 된 것이다.
―p.413~414
'이렇게 생겨먹은 이상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어. 사투리를 쓰고 돈은 땡전 한 푼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그러니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가질 수 있는 만큼만 가지자. 참아야 할 때는 끝까지 참자.'
―p.427
"아름다움이란 공포 위에 뿌린 가루와도 같아서 아름다움을 걷어내면 우리는 홀로 각자의 두려움과 마주하게 되는 거죠."
―p.452
그렇다. 내 글쓰기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바로 릴라다. 나는 평생 내게 일어난 일이 릴라에게 일어났다면 어떻게 됐을지 끊임없이 상상해왔다. 릴라에게 내게 일어난 것과 같은 행운이 따랐다면 릴라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릴라의 삶은 계속해서 내 삶에 투영된다. 내 말에서는 릴라가 한 말의 메아리가 느껴지고 내 결연한 행동은 릴라의 행동을 재각색한 것이다. 내 부족함은 릴라의 과함 때문이었고 내 과함은 릴라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함이었다. 릴라는 굳이 말하지 않고도 내게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힌트를 주었고 릴라에 대해 전혀 몰랐던 사실도 나중에 릴라의 공책을 보고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이 모든 사건을 서술하면서 어느 정도의 여과와 시간차, 부분적인 진실과 반쪽짜리 거짓말 등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는 언어라는 불확실한 도구를 기반으로 힘들게 지난 시간을 측정한 결과물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p.470~471
평생 릴라는 '경계의 해체' 현상이 사물보다 사람에게 더 심각하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그 형태가 허물어져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가장 두려워했다. 지난날 가족 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오빠의 경계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 기운을 잃었고 스테파노가 약혼자에서 남편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망가지는 것을 보고서도 큰 충격을 받았다.
―p.496
"내 생각을 혼란스럽게 했잖아. 너는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 같아. 똑, 똑, 똑 소리를 내며 떨어지지. 네 마음대로 될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아."
―p.503
솔라라 형제, 파스콸레, 안토니오, 도나토 사라토레 같은 사내들은 스타일은 서로 달랐지만 여자를 원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 없었다. 공격적인 여성을 좋아할 수도 있고 종속적인 여성을 좋아할 수도 있고 털털한 여성을 좋아할 수도 있고 섬세한 여성을 좋아할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여성을 원한다는 사실이었다. 노르말레 대학교 시절 내 애인이었던 프랑코도 이들 부류에 속했다.
하지만 알폰소, 엔초, 니노 같은 사내들은 달랐다. 이들 역시 여성 취향이 서로 다르기는 했지만 여성을 대할 때 항상 어느 정도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냉정한 태도를 취했다. 여성과 남성 사이에는 벽이 있는데 그 벽을 뛰어넘는 일은 여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p.511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책은 읽지 말아라 상처만 줄 뿐이야." ···"상처받을 만한 일이 어디 이것뿐인가요?"
―p.531
두 부녀를 바라보면서 내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을 평생 가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뭐라고 딱 꼬집어서 말하지는 못하겠다. 사회 문제를 아주 사적인 문제로 만드는 일종의 훈련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회 문제를 그저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정보로 과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말 현실적인 문제로 인식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모든 것을 개인적인 문제나 실력을 인정받기 위한 이용 수단으로 축소하지 않으려는 사고방식이었다.
―p.5??
그 이야기를 쓰는 데 20일이 걸렸다. 그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고 식사할 때만 밖으로 나갔다. 마지막으로 몇 페이지를 다시 읽어보니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글을 그만 쓰기로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안정을 되찾았다. 수치심이 내게서 공책으로 옮겨간 것 같았다.
―p.605
"잔뜩 구겨진 종이뭉치로 책을 만들어도 재밌을 것 같아. 문장을 시작하다가 잘 안 되면 구겨버린 종이를 모아 책을 만드는 거지. 벌써 몇 장 모아놓기까지 했어. 구겨진 그대로 인쇄하게 하려고. 그러면 우연히 만들어진 종이 구김이 만들려다 만 미완의 문장과 뒤섞이는 거야. 이것이야말로 사실 오늘날 유일한 문학일지도 몰라."
―p.611
순간 나는 내가 거기까지 릴라를 찾아간 것이 교만심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좋은 마음에 애정을 가지고 한 행동이기는 하지만 그 긴 여행이 결국 릴라가 잃어버린 것을 나는 얻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릴라는 내가 자기 앞에 나타난 순간 이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동료와의 마찰과 벌칙금을 낼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지금 나에게 내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살아가면서 승리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자신의 인생은 나만큼이나 다양하고 무모한 모험으로 가득하며 시간은 그저 별 의미없이 흘러가기 마련이니 가끔 이렇게 만나 한 사람의 머릿속에 떠오른 터무니없는 생각과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메아리치는 정신 나간 생각을 나누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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