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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라시옹/장 보드리야르/민음사>
이제는 지도가 영토에 선행하고―시뮬라크르들의 自轉―심지어 영토를 만들어낸다. 오늘날에는 영토의 조각들이 펼쳐진 지도 위에서 서서히 썩어들고 있다. 지도가 아닌 실재의 잔해들이 여기저기, 제국의 폐허가 아니라 우리의 폐허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실재 그 자체의 폐허에 이른 것이다.
···이젠 더 이상 지도나 영토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인가가 사라져버렸다 : 추상의 매력을 낳았던, 어떤 것에서 다른 것 사이에 개재되었던 지고의 <다름>이 사라져버렸다. 지도의 서정과 영토의 매력, 개념의 마술과 실재의 매력을 낳는 것은 다름이기 때문이다. 지도와 영토를 이상적으로 일치시키려는 지도 제작자들의 광적인 계획 속에서 절정을 이루고 또 수그러든 재현적 상상 세계는 시뮬라시옹 속에서 사라진다. 이 시뮬라시옹의 작용은 핵분열적이고 발생론적이지, 전혀 사변적이거나 담론적이지 않다. 사라져버린 것은 모든 형이상항이다. 더 이상 존재와 그 외양을 나누던, 실재와 그 개념을 나누던 거울이 없다. ···실재는 이제는 조작적일 뿐이다. 사실 이것은 더 이상 실제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상상 세계도 더 이상 실재를 포괄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재는 대기도 없는 파생공간 속에서 조합적인 모델들로부터 발산되어 나온 합성물인 파생실재이다.
―p.13~16
인종학이 살기 위하여는 그의 대상이 죽어야 한다. 대상은 발견된 데 대한 복수를 죽음으로서 하고, 이로서 그를 파악하고자 하는 과학에 도전한다. 이렇듯 모든 과학은 그의 앎 속에서 그의 대상이 사라지고, 이 죽은 대상은 다시 되돌아와 그에게 잔혹한 책임 전가를 하는 역설적인 비탈면 위에서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 오르페에 그 유리디스처럼 과학은 항상 너무 일찍 뒤돌아보고, 그 대상은 동시에 지옥으로 다시 떨어진다. ···과학의 논리적 진화는 그 자신의 대상으로부터 항상 더욱더 멀어져서, 결국은 그 대상이 없어도 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p.29
우리에게는 우리의 종말을 보장해 줄 어떤 가시적인 과거, 눈에 보이는 지속, 근원에 대한 눈에 보이는 신화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근본적으로는 거기에 대해 전혀 믿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제화하여 제거하는 데는 람세스를 발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미이라는 벌레에 의해서는 썩지 않는다. 부패와 죽음의 지배자인 상징의 느릿한 체계로부터, 더 이상 아무것도 지배하지 않고, 자신을 선행했던 것을 부패와 죽음에다 바쳐버리며, 이어서 과학에 의해서 그것을 다시 부활하려고 애쓰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우리의 체계로, 역사와 과학과 박물관의 체계로 이동함으로써 미이라는 죽기 때문이다. 이는 곧 모든 비밀에 대한 치유할 수 없는 폭력, 비밀이 없는 문명의 폭력, 모든 문명 자신의 기초에 대한 증오이다.
이처럼 도처에서 우리는 이상하게 원본과 유사한 세상에 살고 있다. 사물들은 거기서 자기 자체의 각본에 의해 이중화하여 있다. 그러나 이 이중화가 전통에서와는 달리 그들 죽음의 촉박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이미 그들이 생존에서 축출되는 것보다 더욱 잘 죽음으로부터 축출되어 있다. 그들 모델의 빛 속에서 훨씬 더 잘 미소지으며, 훨씬 진본과 같은 것들, 초상집에서의 얼굴들도 그러하다.
―p.37~39
모두가 자신의 추방된 형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자신의 반대 용어로 변신한다. 모든 권력과 제도들이 시뮬라크르된 죽음에 의해 그들의 실제적인 고통으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하여 자신에 대해 부정으로 말한다. 권력은 존재와 정당성의 미광을 재발견하기 위하여 자기자신의 살해를 연출할 수 있다.
―p.53
한정된 권력은 한정된 세상 위에서만 지배할 수 있지, 시뮬라시옹의 이처럼 무한한 연쇄적 발발 위에서는, 실재의 중력 법칙에는 더 이상 복종하지 않는 무중력의 성운 위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다. 권력 그 자체도 이러한 공간 속에서는 해체되어 버리고 권력의 시뮬라시옹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결여에 대항할 권력의 유일한 무기, 그의 유일한 전략은, 도처에 실재와 지시물적인 것을 재주입하고, 사회적인 것의 사실성에 대하여 경제의 즉 심각성과 생산의 목적성에 대하여 우리를 설득하는 것이다. 그를 위하여 권력은 기꺼이 위기의 담론을 사용한다. 또 욕망의 담론을 사용 못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p.57
맨 처음으로, 모든 지시물적인 것의 파괴와 모든 인간적인 목적의 파괴를 먹고 산 것은 자본이며 그의 권력의 튼튼한 법인 등가와 교환이라는 기본법을 안치하기 위하여 참과 거짓, 선과 악의 모든 구별을 깨뜨렸던 것은 자본이다. 자본이 맨 처음으로 견제, 추상, 해체, 탈영역화 등을 하였다. 그리고 맨 처음으로 사실성과 사실성의 원칙을 썩도록 한 것이 자본이었다. ···오늘날 바로 이 사실성을 죽였던 동일한 논리가 이제 와서 사실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자본에 반대하여 치열해진다. 사실성의 최후의 미광을 퍼뜨리면서 자본이 대파국적인 이 나선형에 대해 대항하고자 할 때, 이 사실성의 미광 위에 권력의 최후의 미광을 설립하고자 할 때, 자본은 사실성의 기호들만을 증폭시키며 시뮬라시옹의 유희를 가속화할 따름이다.
―p.58
더 이상 노동의 <실제> 동작 혹은 상태와 착취의 <객관적> 과정을 보이지 않게 가릴 전통적 윤리, 즉 노동의 이데올로기 문제가 아니다. 노동 시나리오 문제다. 마찬가지로 더 이상 권력의 이데올로기 문제가 아니라, 권력 시나리오 문제이다. 이데올로기는 기호에 의한 사실성 횡령에 해당하고, 시뮬라시옹은 기호에 의한 사실성의 느닷없는 절단과 사실성의 재이중화에 해당한다. 객관적인 과정을 복원하는 것은 항상 이데올로기적 분석의 궁극성이고, 시뮬라크르 아래에서 진실을 복원하려 하는 것은 항상 거짓 문제이다.
―p.65
역사가 격렬히 살아 있던 시기에는 신화가 상상적인 내용물로서 영화를 침범하였다. 이 시기는 전제적이고 전설적인 것들의 부활 황금기이다. 역사의 격렬함에 의하여 현실로부터 쫓겨난 신화가 영화에서 피난처를 발견한 것이다.
오늘날은 역사 자신이 동일한 시나리오에 따라 영화에 몰려든다. 세계적 차원에서는 평화공존, 일상적 차원에서는 평화로운 따분함이라는 이름을 가진, 일종의 거대한 중성화에 의하여 우리의 생으로부터 추방당한 역사의 내기 말이다.
역사는 우리의 상실된 지시물적인 것, 즉 우리의 신화이다. 이러한 자격으로 역사는 은막 위에서 신화를 교대한다. 마치 <대학에 정치학이 들어가는 것을> 기뻐하였듯이, <영화에 의한 이 의식적인 역사 포착>에 대해 기뻐하는 것은 환상일 것이다. 똑같은 오해며 똑같은 속임수이다.
―p.91
학살의 망각도 학살의 일부이다. 왜냐하면 학살의 망각은 또한 기억의 학살이며, 역사의 학살이고, 사회적인 것 등의 학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망각은 또한 사건만큼이나 본질적인 것이다. 이 망각은 또한 너무 위험하여, 인위적 기억에 의하여 이 망각을 지워야 한다. 이러한 인위적 기억은 학살 장면을 다시 무대에 올려놓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늦어서, 너무 늦어서, 이 기억이 진정한 파란을 일으키거나, 뭔가를 깊이 뒤흔들지는 못한다. 텔레비전은 모든 사건의 역사성에 종지부를 찍는 진정한 해결이다. 유태인들을 화장터나 가스실로 다시 들어가게 하는 것이 아니고, 소리와 이미지의 테이프에, 기독교적 화면에, 소형 정보처리기로 다시 통과시킨다. 망각, 근절은 이리하여 마침내 그의 미학적 차원에 도달한다.
죄의식의, 부끄러운 잠재태의, 말해지지 않는 것의 형태 하에 여전히 망각으로 남아 있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의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차후로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학살 앞에서 전율하고 울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실한 기호, 그러나 이렇게 싸게, 몇 방울의 눈물로 축출해버린 것은 사실상 결코 다시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p.101~102
핵과 텔레비전의 동등성은 이미지 위에서 직접 읽혀진다. TV 스튜디오만큼이나 핵발전소의 통제 및 원격조정 장치의 심장부에는 닮은 것이 없다. 그리고 핵발전소의 정보 송수신 장치도 TV의 정보기록 및 전파발송 스튜디오와 똑같은 상상 속에서 서로 섞인다. 따라서 모든 것이 이 두 극점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원칙적으로 이 사건의 진짜 심장부인 원자로라는 다른 <심장부>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이 부분은 실재와 같은 것으로서, 깊이 파묻혀 읽혀질 수 있다.
―p.106
사적인 노동공간이 없이 <복수가치적인> 공간에 배치된 직원의 행동에서까지도 똑같은 모순이 있다. 서서 돌아다닐 때 사람들은 <현대적> 공간의 <구조>에 적응하여 서늘한, 더 부드러운, 아주 현대적 기능에 맞는 미적인 행위를 연출한다. 그 구석이 꼭 하나만은 아니지만, 자기들 구석에 앉아서는, 그들은 어떤 인위적인 고독 같은 것을 분비하며 자신들의 개인적 <밀폐공간>을 다시 만드는 데 진력한다. 여기서도 역시 저지의 훌륭한 전략이 있다. 사람들은 그들이 모든 에너지를 이러한 개인적인 방어에 소비한다고 비난한다. 희한하게도 이런 동일한 모순을 보부르(퐁피두 센터)의 사물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유동적이고 불안하게 변하며 차갑고 현대적인 외부와 낡은 가치들 위에서 수축경련하는 내부가 그렇다.
―p.118
보부르는 문화의 저지적 기념물이다. 문화의 인간주의적인 허구를 구제하는 목적에나 사용되는 박물관적 시나리오 밑에서 실제 이루어지는 것은 문화죽음의 작업이며, 대중들이 즐거이 초대받았던 곳은 진정코 문화장례식이다.
그리고 대중들은 그곳으로 몰려든다. 이것이 바로 보부르의 최상의 아이러니다. 대중들이 이곳으로 몰려드는 이유는 몇 세기 전부터 그들이 실망하던 문화에 군침을 흘려서가 아니라, 그들이 근본적으로는 항상 경멸하고 싫어하였던 이 문화의 이 거대한 장례에 대중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처음으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보부르를 대중문화의 사기라고 비난하면 그 오해란 완전한 것이다. 대중들 자신은 여기에 몰려드는 까닭이, 문화의 극도의 예찬에 불과한 모든 반문화까지를 포함하여 마침내 정말로 제거되어 버린 문화의 조작적 매음행위를, 심장 해체를, 이 사형장면을 즐기기 위한 것이다. 대중들은 마치 그들이 대재난이 일어난 장소에 몰리듯이, 똑같은 거역할 수 없는 충동으로 보부르를 향해 몰린다.
―p.125
정보는 자신의 고유한 내용물을 삼켜버린다. 정보는 의사소통과 사회적인 것을 삼켜버린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1. 의사소통을 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정보는 의사소통을 연출만 하면서 소진되는 것이다. 꾸밈없는 인터뷰, 자연스러운 말, 청취자 전화, 모든 방향의 참여···정보는 더욱더 이러한 종류의 유령 같은 내용물, 실제가 아닌 어떤 유사한 것을 대체하여 접목하기, 의사소통의 몽유병에 의하여 침범된다. 관객 욕구를 연출하는 순환적 배열에 따라 의사소통의 가장된 연극을 반대한다는 반-연극도 결국은 관객을 배우로 만드는 연극이기에, 이 순환 배열은 전통적 제도를 부정으로 다시 개조하는 것이고, 부정적인 것을 통합한 회로이다.
2. 의사 소통을 한다는 이러한 극도로 자극된 연출을 하면서 계속 공격을 하는 대중매체와 정보는 사회적인 것의 저항할 수 없는 탈구조화를 초래하며 뒤쫓는다. 이와 같이 전혀 혁신의 증가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전적인 불확실도를 겨냥하는 일종의 성운 속에서, 의미를 분해하고 사회적인 것을 분해한다.
―p.145~147
매체들은 대중들의 조작에 있어서 권력 편인가, 혹은 의미의 제거에 있어서, 의미에 가해진 폭력 속에서 그리고 미혹 속에서 대중들의 편인가? 매체들이 대중들을 미혹 속으로 끌어들인 것인가, 혹은 대중들이 매체들을 구경거리 같은 것으로 우회시킨 것인가? 모가디시오-스탐하임 : 매체들이란 정치적인 목적으로 하는 공포 착취와 테러리즘을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운반체이지만, 동시에 가장 전적인 모호성 속에서, 매체들은 테러적인 행위에 대한 생경한 미혹을 전파하고 그들 자신들이 미혹으로 작용하는 만큼 자신들의 테러주의자들이다. 매체들은 의미와 대항의미를 운반한다. 그들은 동시에 모든 방향으로 조작하며, 아무도 이러한 진행을 통제할 수는 없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뫼비우스적이고 순환적인 어떤 논리에 따라 체계의 내적인 시뮬라시옹과 체계의 파괴적인 시뮬라시옹을 운반한다.
―p.151
죽음과 연결되어 있는 성적인 생식을 대체할 영원한 쌍생의 꿈, 분열생식적인 세포의 꿈, 이는 부모성의 가장 순수한 형태이다. 왜냐하면 이 형태는 마침내 다름이 없음을 허용해 주고, 동일한 것에서 동일한 것으로 가도록 허용해 줄 것이니까.
성을 가진 존재자들을 성에 의한 생산 이전의 재생산 형태를 향해 후퇴하도록 몰아가는 것은 죽음 충동이 아닌가? 형이상학적으로는 오직 동질성의 영속화만을 겨냥해서, 실제로는 오히려 다양한 우발적인 변수에 종속되어 있을 생식코드의 기입을 투명하게 단일화하기 위하여 이 죽음 충동은 성을 가진 존재들로 하여금 타자와 다른 모든 성질을, 같은 하나의 다른 것으로서의 변질을 부정하도록 몰아가는 것이 아닌가?
―p.167~168
사고의 세계에서는 가능한 역기능이란 없다. 따라서 변태도 없다. 사고는 죽음처럼 더 이상 신경쇠약의, 억눌림의, 잔재의, 위반의 질서에 속하지 않는다. 사고는 변태적이지 않은 새로운 쾌락 방식에의 입문이고, 사고는 죽음으로부터 출발하여 삶을 전략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으로의 입문이다. 죽음, 상처들, 사지 절단들은 더 이상 거세의 은유가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이거나 오히려 반대 이상이다.
―p.188~189
시뮬라크르의 세 가지 질서 : 이미지, 모방, 위조 위에 세워지고, 조화로우며 낙관주의자적이고, 신의 이미지에 따라 자연의 이상적인 회복과 그 이상적인 제도를 목표로 하는 자연적인 '자연주의자들의 시뮬라크르들'; 에너지와 힘 위에, 기계에 의한 물질화 위에, 그리고 모든 생산 시스템 속에 세워진 생산적인 '생산주의자들의 시뮬라크르들'―끝없는 에너지의 해방과 세계화 그리고 지속적인 팽창의 프로메테우스적인 목표; 정보, 모델, 정보통신학적 게임 위에 세워진 '시뮬라시옹의 시뮬라크르들'―완전한 조작성, 파생실재성, 완전한 통제 목표.
첫번째 질서에는 유토피아의 상상력이 대단한다. 두번째에는 그 본래 의미로의 공상과학이 상응한다. 아직도 이 세번째 질서에 대단할 어떤 상상이 있는가? 가능한 대답은, 공상-과학이라는 이 선량한 늙은이는 죽었고, 다른 무엇이 솟아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p.198
현실성의 원칙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상상은 실재의 알리바이였다. 오늘날 시뮬라시옹의 원칙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실재란 모델의 알리바이가 되었다. 역설적으로 실재가 우리의 진정한 유토피아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더 이상 가능한 것의 질서에 속하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상실된 대상으로서 거기에 대해 꿈을 꿀 수 있는 유토피아이다.
아마도 정보통신학과 파생실재의 시대에서 공상과학은 <역사적> 세계를 <인위적으로> 부활하는 데만 소진될 수도 있다. 즉 이전 세계의 우발적인 것들을, 그 의미와 원초적인 진행이 이제는 텅 빈, 그렇지만 회고적인 진실로 환각적인 이미지난 이데올로기들을, 사건들, 인물들을 아주 세세한 곳에까지 시험관 내에서 복원하려고 시도할 수밖에 없을 수 있다.
―p.200
지금까지 우리는 항상 상상의 여지를 가지고 있었다. 현실성 계수는 그에게 특수한 무게를 주는 상상의 여지에 비례한다. 이것은 지리학적인 그리고 우주적인 탐험에서도 역시 사실이다. 처녀지, 그러니까 상상이 관여할 수 있는 영역이 더 이상 없을 때, 지도가 모든 영토를 덮을 때, 현실성의 원칙과 같은 그 무엇이 사라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주공간의 정복은 지구상의 참조물의 상실을 향한 돌이킬 수 없는 문턱이다. 제한된 세계의 한계가 무한으로 물러나면, 이 세계의 내적 일관성으로서의 현실성이 출혈을 한다. 지구상의 정복 이후에 온 우주공간의 정복은 인간의 공간을 비현실화하거나, 시뮬라시옹의 파생실재 속으로 다시 확장된다.
―p.201
마소처럼 죽도록 짐을 나르던 동물들을 인간을 위하여 일해야만 하였다. 실험을 위한 동물들을 과학적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불려졌다. 소비를 위한 동물들을 산업적인 고기가 되었다. 정신적 질환이 신체질환으로 바뀐 동물들은 오늘날 <심리> 언어를 말하도록, 그들의 심리현상과 그들 무의식에 있어서 잘못된 것에 대하여 대답하도록 요구된다. 그들에게 일어났던 모든 것은 우리에게 일어난 것과 같다. 우리의 운명은 결코 그들의 운명과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이것은 동물에 대한 인간의 절대적인 특권을 온 힘을 다해 세웠던 인간이성에 대한 일종의 씁쓸한 복수이다.
―p.212
동물들은 말하지 않는다. 점점 더 커가는 말의 세계에서, 자백과 말을 하라고 조이는 세계에서, 동물들만이 벙어리로 남아 있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로부터 그들은 우리로부터 멀리, 진실의 지평으로부터 멀어져 물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그들과 내밀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환경보호론적인 생존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여전히 그리고 항상 그들의 침묵문제이다. 오직 말만 하도록 하는 도상의 세상에서, 기호와 담론의 패권에 연합한 세상에서, 그들의 침묵은 우리의 의미의 조직 위에서 더욱더 무겁게 압박한다.
―p.219
동물들은 무의식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역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들은 그들이 더 이상 영역을 갖지 않은 이래로 무의식을 갖는다. 영역과 변형이 동시에 인간들에게 박탈되었다. 무의식은 이러한 상실이 끝없이, 희망없이 연주되는 장례의 개인적 구조이다. 동물들은 이러한 상실된 것들에 대한 향수이다. 동물들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질문은 그러니까 이것일 것이다: 이성의 선적인 성질과 축적의 효과 저 너머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효과 저 너머에서, 우리는 차후로 유한공간 위에서의 무한한 회귀와 원의 생경하고 상징적인 양식 위에서 살고 있지 않는가? 우리의 문화, 아마도 모든 문화의 이상적 도식을 넘어, 에너지의 축적과 궁극적 자유의 이상적 도식을 넘어, 우리는 폭발보다는 차라리 함열을, 에너지보다는 차라리 변신을, 자유보다는 차라리 의무와 제의적인 도전을, 차라리 영역적인 원을 꿈꾸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동물들은 질문하지 않는다. 그들은 침묵한다.
―p.223~224
'나머지'는 국지적으로 제한된 두 용어로의 명확한 분할보다는, 회전적이고 회귀적인 구조, 항상 내재적인 회귀구조, 거기서는 어떤 것이 다른 것의 나머지인지 결코 알 수 없는 구조로 돌려진다. 다른 어떤 구조에서도 이러한 회귀를 혹은 이러한 끝없는 동일반복을 작동할 수 없다: 남성은 여성의 여성이 아니고, 정산인은 미친 사람의 미친 사람이 아니며, 오른쪽은 왼쪽의 왼쪽이 아니다. 오직 아마도 거울에서나 이러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실재와 이미지 중에서 어느 것이 다른 것의 반사냐? 이러한 의미로 나머지에 대해서 거울에 대해서처럼, 혹은 나머지의 거울에 대해서처럼 말할 수 있다.
―p.226
탄생은, 만약 새로운 시작에 의하여 상징적으로 다시 취해지지 않으면, 폐기물과 같은 것이다. 죽음은, 만약 장례 속에서, 장례의 집단적인 축제 속에서 해소되지 않으면, 폐기물과 같은 것이다. 가치는, 만약 교환의 원 속에서 흡수되지 않고 기화되지 않으면, 폐기물과 같은 것이다. 성은, 성적 관계의 생산이 될 때, 폐기물과 같은 것이다. 사회적인 것 그 자체도, <사회관계>의 생산이 될 때, 폐기물과 같은 것이다. 모든 실재는 폐기물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모든 폐기물과 같은 것은 끝없이 환상 속에서 다시 반복되도록 운명지워져 있다.
―p.230~231
5월 10일의 바리케이드들은 대학가인 라텡 구역, 이 대학이라는 낡은 가게를 방어하는 것처럼, 그래서 방어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 외양 뒤에서, 학생들이 권력을 향해 도전으로서 던진 것은 죽어버린 대학, 죽어버린 문화,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동시에 그들 자신들의 죽음이었다. 즉 즉각적인 제물로의 변형, 이것은 길게 보아서는 문화와 지식의 제거라는 체제 자체의 작업일 따름이었다. 그들은 소르본느를 구하기 위하여 거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자들의 면전에다 소르본느의 시체를 흔들어대기 위하여 거기에 있었다.
오늘날은 무엇을 흔들어댈 수 있을까? 지식과 문화의 잔재조차도 더 이상 없다. 잔재 자체들마저도 없어졌다. 우리는 그것을 안다. 우리는 7년 동안 낭테르 대학의 장례 사업을 하였다. 68년은 죽었으며 단지 장례의 환상으로만 반복될 수 있다.
―p.236~237
정치적인 질서에서 이 모든 것에 대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너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자본의 단말마적 고뇌가 우리에게 행사한 깊은 미혹에 저항하여, 우리가 실제 그 고통자인 자본에 의한 자기자신의 단말마적 고통의 무대화에 저항하여 싸워야 한다. 자본에게 자기 죽음의 주도권을 주는 것은 그에게 혁명의 모든 특권을 주는 것이다. 가치의 시뮬라크르에 의해, 그리고 자본과 권력의 환영에 의해 포위되어서, 우리는 가치와 상품의 법칙에 의해 포위된 것보다도 더 무장해제되고 무력하다. 왜냐하면, 체제는 자기자신의 죽음을 통합할 수 있음이 밝혀졌지만, 우리 생명의 책임이 우리로부터 박탈되어, 그에 따라 우리 자신의 생명의 내기도 우리로부터 박탈되었기 때문이다. 체제의 이러한 최상의 교활함, 자기 죽음이라는 시뮬라크르의 교활함은 모든 가능한 부정성을 흡수하여 제거하여 버렸다. 그 때문에 체제는, 이 죽음 시뮬라크르의 교활함을 통하여 우리를 산 채로 유지한다. 오직 더 우월한 교활함만이 이 시스템의 교활함의 방어를 할 수가 있다. 도전 혹은 상상의 과학, 오직 시뮬라크르들의 형이상상학만이 시스템의 시뮬라시옹 전략으로부터, 시스템이 우리를 가둔 죽음의 막다른 골목으로부터 우리를 빠져 나오게 할 수 있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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