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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부신 친구/엘레나 페란테/한길사>
살아온 세월이 길지 않을 때에는 혼란스러운 감정의 바탕에 있는 혼란의 실체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해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할 것이다. 어른들은 어제, 그제, 길어봤자 한 주 전의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를 살아가며 내일을 기다린다. 그들은 그 이상의 것에는 관심이 없다. 아이들은 어제의 의미, 엊그제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내일의 의미도 알지 못한다. 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현재이고 지금이다. 여기가 길이고, 우리 집 현관이고, 이 사람이 엄마이고, 아빠이고, 지금은 낮이거나 밤인 것이다.
―p.29
언젠가부터 릴라는 '예전에'라는 표현에 집착했다. 학교에서든 학교 밖에서든 말이다. 난 릴라가 단순히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일들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일들은 대개 어른들이 숨기려 하거나 마지못해 이야기해주는 암울한 것이었다. 릴라가 정말 알려고 했던 것은 '예전'의 기준이 되는 최초의 순간이 과연 존재했는지 하는 것이다.
―p.39
우리는 바다로 가야 했는데 가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릴라와 나의 사고방식이 뒤바뀌는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나는 비가 와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나는 익숙했던 모든 것에서 멀리 떨어진 느낌을 받았다. 처음으로 느껴본 그 거리감은 모든 걱정과 인간관계에서 나를 자유롭게 했다. 반면 릴라는 갑작스럽게 자신의 계획을 후회했으며 바다를 포기하고 우리 동네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나는 도무지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p.99
릴라는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여전히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동네에 있는 모든 것이, 돌멩이 하나에서부터 나무 한 조각에 이르기까지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존재했지만 우리는 이를 깨닫지 못하고,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성장해온 것이라고.
우리뿐만이 아니다. 릴라의 아버지도 마치 예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양 행동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도, 나의 어머니도, 나의 아버지도, 리노마저도 별다를 바가 없었다. ···파시즘에 대해서도 왕정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권력남용이나 폭정, 착취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그들은 이전에 일어난 일들은 모두 과거일 뿐이니 조용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모든 것을 그냥 덮어두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아직도 과거의 일에 영향을 받고 있었고 우리까지 그 영향권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자신도 모르게 과거의 일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p.210~211
나중에 릴라는 그때의 느낌을 이렇게 설명했다. 보름달이 뜬 바다 위로 하늘에서 거대한 태풍이 시꺼멓게 몰려오면서 빛이란 빛은 모조리 집어삼키고, 달의 경계를 침식하며 그 빛나는 원반의 형체를 망가뜨려 거칠고 비정한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p.229
릴라의 침묵에 내 걱정은 날로 커져만 갔다. 섬에서 보내는 나날들이 얼마나 즐거운지를 편지에다 표현하려고 하면 할수록, 강물처럼 넘치는 내 글과 이에 대비되는 그녀의 침묵은, 빛나는 듯 보이는 나의 삶은 실은 무미건조해서 남아도는 시간에 매일같이 그녀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데 비해 암울한 듯 보이는 그녀의 삶이야말로 실은 파란만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p.277~278
니노는 릴라처럼 내면의 괴로움에 시달리는 아이였다. 이것은 축복이자 고통이었다. 이들은 만족하는 일이 없고 쉽게 포기하는 법이 없지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도나토 아저씨는 이들과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쁘게 받아들였으며 매 순간을 밝게 살았다.
―p.294
릴라의 글은 얼마나 매혹적이었던가. 냄비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불안감이 커져 갔다. 릴라는 냄비의 광채를 좋아했다. 냄비를 닦을 때면 반짝거리게 하려고 특별히 정성을 들였다. 4년 전 릴라가 돈 아킬레의 목에서 뿜어져 나온 핏방울이 구리 냄비 위로 흘러내렸다고 이야기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이번에는 자신의 앞에 놓인 힘든 선택에서 비롯된 불안감과 고통을 구리 냄비에 묻어두었다가 일종의 계시인 양 터뜨린 것이다. 마치 자신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을 갑작스럽게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말이다. 릴라가 없었다면 내가 이런 상상을 할 수나 있었을까. 모든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고 이 모든 것을 내 삶에 녹여낼 수 있을까.
―p.305
"넌 아직도 이런 생각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거니, 레누? 우리는 지금 불타는 공 위를 날아가고 있어. 열기가 가라앉은 부분은 용암 위로 떠오르지. 사람들이 건물을 세우고 다리를 놓고 길을 내는 곳이 바로 그 부분이다. 그러다가는 가끔 베수비오 화산에서 용암이 흘러나오거나 지진이 나서 모든 것을 파괴하지.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죽게 하는 미생물도 있고 전쟁도 있어. 또 모든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빈곤이 있지. 매초, 매 순간 아무리 울어도 충분하지 않을 만큼 괴로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 그런데 너는 뭘 하고 있지? 성령이 무엇인지 공부하는 종교학 수업? 내버려 둬. 세상을 창조한 것은 성부도 성자도 성령도 아닌 악마라고."
―p.320
"어린 시절 체룰로가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던 아름다움은 피어나지 못했단다. 그 아름다움이 모두 얼굴과 가슴, 허벅지와 궁둥이로 가버렸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름다움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그런 곳들로 말이야."
―p.368
릴라는 자신이 디자인한 구두를 신었다.
"정말 못난 구두네" 그녀가 말했다.
"아니야"
그녀가 시무룩하게 웃었다. "아니긴. 이것 좀 봐. 머리에서 태어난 꿈이 발밑으로 추락했잖아."
―p.418
"허풍쟁이가 되려면야 소설을 쓸 수 있겠지.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그들이 쓴 책을 읽을 거야. ···하지만 정말 현실을 바꾸고 싶다면 그건 전혀 다른 문제야. ···나쁜 소설이나 기사가 나오는 소설을 너무 많이 읽으면 돈키호테 같은 사람이 나오는 거야. 돈키호테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폴리에서 풍차와 결투를 벌일 필요는 없어. 그런 것은 쓸데없는 용기일 뿐이라고. 우리에게는 풍차를 사용할 수 있는 법을 알고, 실제로 그것을 작동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한 거야."
―p.433
천민이 무엇인지 그 순간 깨달았다. 수년 전 선생님이 내게 물었을 때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우리 모두가 천민이었다. 음식과 와인을 둘러싼 다툼, 더 빨리 음식을 제공받고 더 나은 서비스를 해달라고 벌이는 싸움, 웨이터들이 분주히 오가는 더러운 바닥, 시간이 갈수록 수위가 높아지는 저속한 건배사야말로 비천한 것이었다. 포도주에 취해 금속공예품 상인의 음담패설을 진지하게 듣다가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아버지와 그 어깨에 몸을 기대고 있는 어머니도 천민이었다.
―p.430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계속 읽던 중이라 그런지 처음에 읽었을 때에는 깊이가 얄팍하다고 느꼈는데, 간결한 문제와 빠른 호흡을 통해 이야기를 다채롭게 엮어 나가는 것이 이 작품의 최대 장점이다. 요새 푹 빠져서 읽고 있는데, 때로는 릴라에게, 때로는 레누에게, 때로는 니노에게 내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어쩐지 인생의 덧없음이 느껴지기도 하고 용기를 얻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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