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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사 / 조길태 / 민음사>
카스트 제도가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리스 사람들의 기록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기원전 4세기보다 늦을 수는 없다. ···카스트 제도라는 독특한 사회제도가 인도에서 발달하게 된 것은 외부세계와의 활발한 교류를 방해하고 있는 지리적 폐쇄성에서도 기인하고 있다. 힌두교의 하부구조인 카스트 제도의 특징은 배타성에 있다. 후일 모슬렘을 비롯한 이민족의 지배 아래서 힌두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로마 제국의 기독교 승리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다른 종교와의 타협을 철저히 거부함으로써 그들만의 독특한 제도를 강화해 나갔기 때문이다. 사실 카스트 제도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인도의 기본적인 종교관념인 윤회(輪廻)와 업(業) 사상이다. 개인의 구제는 자신의 카스트에 대한 의무에 전념하는 것이며 전생의 행위에 따라 행복하게 또는 불행하게 태어날 수 있다는 업 사상은 사실상 카스트 제도에 대한 철학적인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p.51~53
베다 시대 종교의 특징은 다신교라는 점인데 이는 브라만교에서 힌두교로 이어지는 인도 정통종교의 두드러진 경향이기도 하다. 인도인들은 수많은 신을 섬기고 있었는데 그들의 신은 선악을 고루 갖춘 인간의 속성을 갖고 있었다. 신들은 때로는 동물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천둥, 비, 바람 등의 자연현상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
『리그 베다』에는 30여 명의 힌두 신의 이름이 나오고 있으며 특히 전쟁과 승리의 신 인드라, 세계질서를 주관하는 바루나, 폭풍과 빛의 신 시바 그리고 불의 신 아그니 등의 남신이 가장 중요한 지위로 부상하고 있으며, 여신 프리티비, 아디티 등은 하위에 속하고 있다. 이 점은 여신이 남신보다 오히려 상위에 있었던 인더스 문명 시대의 종교와 대조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또 인도인들은 여러 신을 섬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다 시대의 종교의 한 특징은 일신교의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p.55
우파니샤드 철인(哲人)들은 창조의 세계 뒤에 숨어 있는 궁극적인 진리에 대해 진지한 탐구의 자세를 보였다. 그들은 권위와 인습의 속박으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브라만(범(梵))과 아트만(아(我))의 동일성에 대하여 다양하게 견해를 표현하였다. 우파니샤드 철학의 정수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우주는 브라만이고 브라만은 곧 아트만>이라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이다.
···아트만은 모든 것에 충만해 있으며 또 객체를 밝게 비추며, 항상 불멸의 것으로 남아 있는 주체를 의미한다. ···브라만은 모든 것을 초월하며 모든 것의 배경으로서 그것들을 뒷받침한다. 생멸을 영원히 반복하는 현실세계는 진실될 수가 없다. 그것은 다만 외형이며 환영일 뿐 진정한 초월적 실재는 브라만이다. 최고의 것, 그것을 넘을 것이 없는 것이 브라만이다.
인도철학에서 관심의 대상을 우주와 자연의 법칙을 규명하려는 태도보다는 무목적의 고통스런 인생의 굴레에서 벗어나 절대적인 삶을 추구하려는 인간철학의 방향으로 돌렸던 것은 우파니샤드 철인들의 커다란 공로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p.58~60
기원전 6~5세기경은 동서양을 포함하여 고금에 독보하는 사상적인 황금기를 열어 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인도에서는 장차 세계종교로 발돋움할 불교가 출현하였으며, 같은 시기에 중국에서는 공자의 유가 사상을 비롯한 이른바 제자백가 사상이 훌륭하게 꽃피었다. 중국 사상은 정치와 도덕에 깊이 관련된 현실적이라는 점에서 인도의 내세적인 불교와 대조적인 면을 보이며 동양 사상의 두 원류를 이루어 놓았다.
시기적으로 좀 더 올라간 느낌이 있지만 페르시아에서는 다분히 권선징악을 강조하는 이원론적인 조로아스터교가 완성되었고, 좀 늦게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윤리적인 인간행위를 문제삼는 철학사상이 발달하였다. 그리스의 철학은 더 나아가 진정한 실재인 이데아론을 내세운 플라톤의 이상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구체적인 현실주의가 발전하여 인간철학의 웅대한 전형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p.63
프로테스탄티즘, 특히 칼뱅교에서 강조한 금욕주의 윤리가 저축에 근거한 재산축적의 계기를 마련했던 바와 같이 우리는 비슷한 경우를 자이나교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자이나교는 기독교의 프로테스탄티즘과 마찬가지로 <소유의 기쁨>은 반대할 만한 것이지만 소유, 이익 그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서양의 경우와 같이 금욕주의의 강제적인 저축이 소비나 지대(地代)를 위한 자금으로보다는 투자자본으로서 축적되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p.68
윤회전생(輪廻轉生)은 고통이며 열반은 고통의 정지를 뜻한다. <불을 끄다>의 어의를 가진 열반(涅槃, Nirvana)은 단순한 소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천하고 가엾고 무섭도록 만드는 개인의 탐욕스런 목적을 소멸하는 것을 말한다. 열망이 꺼짐으로써 모든 욕망에서 벗어난 사람에게 찾아드는 평온한 상태를 일컫는 열반은 영원한 평화와 행복의 경지로서 슬픔과 욕망, 질병과 노쇠, 삶과 죽음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의미한다.
p.72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는 승단(僧團)의 규율이나 행동규범 등에는 큰 차이가 없지만 그들의 이론에는 크게 다른 점이 있었다. 소승불교는 자이나교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사실상 신이 없는 종교였다. 업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소승불교는 개인 자신을 위해서 또 자신에 의해서 구원됨을 강조하였다. 소승불교는 개인 자신을 위해서 또 자신에 의해서 구원됨을 강조하였다. 소승불교는 개인의 구원을 최고의 이상으로 생각하는 데 비하여, 대승불교의 이상은 전체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다. 대상은 더 큰 수레 혹은 더 큰 배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새로운 불교는 보다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어서 고해(苦海)인 윤회로부터 열반의 해안으로 안전하게 이끌어가는 것이다. 소승불교에서는 구원의 관념이 부정적이고 이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데 비하여, 대승불교에서는 열반을 정신적 고통의 부정적 정지가 아니라 긍정적인 축복의 상태로 믿는 것이다
p.131~132
대승불교의 보살에 관한 이론은 기독교의 삼위일체설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보살은 그 존재의 처음 형태로서는 오직 열반을 경험했었다. 부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기독교 삼위일체설의 두번째의 형상과 같이 인간이 되었다. 그러나 부처는 고통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 인생은 덧없으며 그 앞에 놓인 목표는 오직 열반뿐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였다. 부처는 본보기를 통하여 인류를 구했을 뿐이지 인류의 죄를 대신할 상징적인 희생을 통하여 구원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석가모니에게 악이라고 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 무상(無常)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p.132~133
요컨대 대승불교의 출현은 신을 무시했던 초기불교가 석가를 하늘의 영원한 부처님의 화신으로 인정한 수정불교로 변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돌아가신 스승인 석가에 대한 숭배가 살아 있는 구세주에 대한 믿음으로 변한 것이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대승불교는 열반, 신의 화신 및 신앙 등에 관해서는 힌두교의 관념에 더욱 가까워졌다. 따라서 대승불교는 옛날의 불교와 힌두교 사이에 새로이 다리를 놓은 것이다.
p.134
간다라 미술은 인도 불교 미술과 그리스 미술이 융합된 형태이므로 인도·그리스 미술 혹은 그리스·불교 미술이라고도 불린다. 이 미술은 한 마디로 그리스 미술 기법이 불교 미술에 영향을 주어 예술적 성공을 거둔 것이다. 초기 불교도들은 석가를 너무나도 숭배한 나머지 감히 사람 모양의 불상을 만들지 못하였다. 그들은 석가를 단지 발자국, 혹은 빈 좌석 등으로 표시하였다. 이른바 무불상(無佛像) 시대의 5가지 상징은 법륜(法輪), 불탑(入滅), 연꽃(淸淨), 보리수(成佛), 공백(존재) 등이었다.
p.136
굽타시대 이전 혹은 그 초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마누 법전은 힌두의 법과 사회관습에 관한 가장 포괄적인 기록이었다. 성자이며 입법자로 알려진 전설적인 인물 마누에 의하면 국가는 일곱 개 부분 즉 왕, 장관, 국토, 성(城), 국고, 군대 및 동반자(국민)으로 구성되어 하나의 신체를 이룬다고 보았다. 왕권은 신권에서 연유하였는데 신은 모든 창조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왕을 지상에 내려보냈다. 왕에게는 신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포상하고 응징하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왕은 신민을 잘 보살피기 위해서 반드시 훌륭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왕의 의무조항으로는 농업을 장려하고, 도로를 개수하며, 광산을 개발하는 일이 있었다. 또 삼림을 제거하고, 황폐한 땅을 일구도록 이주시키며, 코끼리를 길들이고, 성과 교량을 건설해야 했다.
p.148
힌두 설화문학이 산스크리트로 다시 씌어졌다. 세계 최장의 서사시인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가 오늘날의 형태를 갖춘 것이 이때였다. 최고의 지식, 지순(至純)의 사랑, 가장 명료한 행동의 길을 제시해주고 있는 경전 『바가와드 기타』도 굽타시대보다 늦을 수는 없으며, 고대인도의 역사적 사실과 전설의 보고(寶庫)인 『뿌라나』도 이때에 현재의 형태로 완성되었다. 굽타시대에 힌두 문학을 산스크리트로 다시 쓴 동기는 그리스인, 쿠샨족, 파르티아인 드 ㅇ이민족이 인도인들의 생활에 도입시킨 비아리아적인 이국적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p.156
브라만교의 의식은 주로 희생물을 바치는 것이었는데, 새로운 힌두 신앙의 그것은 보통 그들의 신상을 놓고 참배하는 것이었다. 비싼 제물을 바치는 형식적인 제의를 타파하고 신도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인 것이다. 요컨대 희생물을 바치는 것을 중요시하던 인습적인 의식이 신상에 대한 경건한 믿음으로 대체되었다. 새로운 힌두교의 의식은 단순히 기도하고 경의를 표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꽃과 과일 등을 바치는 것이었다. 힌두교에서 주장하는 인간의 4대 목표는 믿음으로 덕을 실현하는 다르마, 경제적 행복을 누리는 아르타, 안락을 누리는 까마, 그리고 영혼의 구원에 이르는 모크샤 등이다. 앞의 세 개의 목표는 모크샤로 인도하는 과정이다.
p.170
불교가 인도에서 쇠퇴한 데 대해서는 여러 가지 원인이 지적될 수 있다. 불교의 속인(俗人) 조직단체의 결여가 그 본고장인 인도에서 불교가 거의 사라지게 만든 결과를 가져왔다. 불교는 실제로 부처의 가르침에 깊게 따르는 사람들, 즉 승려들에게만 구원이 한정된 느낌이 있었으며 승단마저도 최소한에 머물렀다. 불교는 구원의 종교이면서도 속인에게 깊은 관심을 갖지 못함으로써 그 외적인 취약성을 갖게 되었다. 온갖 포용력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불교는, 속인계급과 종교 지도자와의 밀접한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힌두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와 경쟁할 수 없게 되었다.
p.171
불교가 인도에서 쇠퇴하게 된 이유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불규와 힌두교가 구별하기 힘들게 된 점에 있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인도의 전통적 종교 관념인 윤회와 업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힌두교와 가장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불교가 무신론이며 카스트 제도를 배척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대승불교의 출현은 결과적으로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게 된 계기를 만들었고, 동시에 그러한 종교적 변화는 브라만교가 부흥하고 있는 증거이기도 하였다.
p.173
악바르 대제는 비모슬렘에게만 부과해 왔던 성지순례세와 인두세를 폐지하였다. 당시 제국의 주요한 세원이었던 이들 세금을 폐지함으로써 정부는 엄청난 재정 손실을 보았으면서도 대제는 그러한 희생 위에서만 인도에 하나의 국민국가가 수립될 수 있다고 믿었다. 대제의 관대하고 화해적인 태도가 힌두, 특히 라즈부트족을 그에 대한 철저한 지지자로 바꾸어 놓았다. 악바르의 무갈제국이 카불에서 벵골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라즈부트족의 협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p.204
무갈제국의 통치는 군사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관리는 모두 군인 명부에 올라 있었다. 제국의 행정조직은 관리와 군사 부문의 구별이 없는 관료정치적이었다. 페르시아어에서 유래한 맨삽다르(Mansabdar)라고 불리는 장교는 33등급으로 분류되었다. 등급은 비상시에 황제를 위해 군대를 일으켜 봉사할 것으로 기대되는 숫자에 근거하였다. 장교는 각각 적게는 10명에서 많게는 5천 명까지 거느릴 수 있었다.
p.224
무갈제국이 출범하는 시기를 전후하여 새로운 종교들이 나타났는데 시크교와 악바르 대제의 절충적 종교가 그것들이다. 시크교는 나나크에 의해 창시되었다. 나나크는 15세기 초에 활약했던 종교개혁가 까비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까비르는 힌두교와 이슬람교 사이에서 화합 정신을 북돋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인물이었다. 까비르는 사랑의 종교를 강조하였다. 이슬람교의 알라 신과 힌두교의 라마 신은 다만 이름이 다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두 종교의 동질성을 역설하였다.
p.237
악바르의 종교정책에 대하여 관용을 모르는 모슬렘 사이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특히 벵골과 펀잡 지방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났는데, 악바르는 반란을 진합한 후에는 지나친 방향으로 나아가 스스로 새로운 종교를 모색하였다. 1579년에는 유명한 절대불류령(絶對不謬令)을 발포하여 황제가 종교적, 혹은 일반적인 모든 문제에 있어서 최고의 조정자로 군림하였다.
이 칙령은 모든 사람에게 구속력을 가지며 이를 거역한 자는 내세에서 천벌을 받게 되며 현세에서는 종교적 특권과 재산을 잃게 될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이 포고령은 상충하는 종교적 의견 가운데 하나를 악바르 자신이 마음대로 택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결국 악바르는 세속적인 왕이면서 동시에 종교적 최고의 권위까지 행사하게 되었다.
p.243
포르투갈은 동양에서 100년 동안 지속된 모험의 역사에서, 내륙 깊숙이 제국을 건설하려는 노력을 보이지는 않았다. 인도의 강력한 세력체와 패권을 겨루는 충돌도 없었다. 포르투갈 인은 다만 공해의 지배에만 관심이 있었고 그들의 목표는 항상 중요한 항구를 장악하여 이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이 목표를 위해서는 유능한 행정가보다는 용감성과 인내심을 갖춘 군인과 항해자가 필요했었다.
원주민과의 혼인에 의한 식민정책이 알부케르케의 통치 전략이기도 하였다. 이른바 Luso-Indians 즉 고아인이라는 인종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주로 혈통은 인도인이면서 종교는 카톨릭이고 사고 방식은 매우 서구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상인, 혹은 전문직업인으로 인도 여러 곳에 퍼져나가 이익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약탈과 노예무역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p.245~246
영국이 세계를 무대로 본격적인 해상활동을 시작한 것은 엘리자베스 여왕 때부터였다. 여왕은 해상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으며 재정적 또는 정치적으로 지원한 대가로 이익금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다. 대부분의 서구 강대국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영국의 해상활동도 처음에는 결코 자랑스럽게 말할 수 없는 해적 행위, 밀수 및 노예무역으로 출발하였다.
p.271
영국의 동인도 무역은 처음부터 국가에 의해서 추진되었던 것이 아니고 국왕에게서 특허를 얻은 일개 주식회사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동인도회사의 출현은 영국의 상업자본이 성장한 결과를 의미하였다. 중세의 길드적 상인들은 주로 소상점주와 장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상인과 수공인과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았다. 점차 상인과 기능공이 분명히 구별됨에 따라 도매상인 집단이 출현하게 되었다. 외국 무역의 중요성이 증대되고 영국 상인 자본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자 상인 모험가들의 회사들이 나타나서 유럽의 특수지역,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등의 무역을 독점하려는 행동을 표면화하고 나섰는데 그것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나타난 집단이 동인도 회사였다.
p.272~273
영국 왕실이 동인도회사를 지원한 동기와 태도가 항상 일관된 것으 ㄴ아니지만, 국왕은 동인도 무역의 번영을 위해 회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국왕이 동인도 무역을 지원한 이유는 우선 국민 생활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 동인도 회사는 왕의 신민에게 지금까지는 외국 상인으로부터만 구입할 수 있었던 동양 산물을 공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동인도회사의 무역활동은 궁극적으로 조선사업을 조장시킬 뿐만 아니라, 상인해군을 강화시키는 결과도 기대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이전의 노예무역과 해적 활동 등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퇴시키는 데 공헌했던 사실에서 증명된 바 있었다. 또 영국 왕실은 동인도회사로부터 때때로 빚을 얻어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점도 계산하였다.
p.273
중상주의의 요점은 중금주의(重金主義)와 무역차액제에 있었다. ···그렇지만 당시 동인도회사가 인도로 수출하는 상품량보다는 인도에서 사가는 상품량이 훨씬 많았으므로 영국에게는 불리한 무역 불균형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또 영국이 인도로부터 수입해 간 상품은 완제품의 성격을 띠었으므로 영국의 국내 산업을 침체시킬 우려가 있었다. 영국이 좋아하는 향료나 직물 등은 소비상품으로서 이러한 물품을 구입하기 위하여 영국의 금과 교환하는 것은 중상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심각히 우려할만한 현상이었다.
p.277
뒤늦게 동야으로 진출한 홀랜드가 매우 호전적으로 포르투갈과 대결하면서 포르투갈의 세력근거지를 공격하였던 큰 이유는 종교적 대립 때문이었다. 신교 국가인 홀랜드는 식민지 쟁탈전과 무역로의 활보를, 구교 국가인 스페인의 전제정치에 대한 자유투쟁의 대의를 수행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포르투갈은 1580년부터 1640년까지 스페인에 병합되어 한 국왕의 지배 아래 있었다.
p.283
플라시 전투는 영령인도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프랑스 세력이 인도에서 쇠퇴하고 유럽의 여러 세력을 제압한 영국은 이제 종래의 무역활동에서 벗어나 인도 경영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단지 벵골의 지배뿐만 아니라 영국이 인도아대륙을 지배하게 되는 첫 발판이 되었다. 영국은 지금까지의 평화적인 무역만을 추구하던 소극적인 태도에서 한 발자국 전진하여 그들의 상업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인도의 원주민 세력과도 실력으로 대결한다는 적극적인 강경책을 취하게 되었다. 한편 플라시 전투는 영국의 동인도 무역에 있어서의 중심지를 마드라스에서 벵골로 이동시켰다.
p.295
동인도회사의 이사회나 총독이 영구정액제를 추진하는 데는 세수액을 증대시키고 토지세제를 안정시킨다는 기본적인 목적 이외에도 세제의 빈번한 변동에 따른 농민과 자민다르의 불안감을 없애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
p.321
웰슬리 총독이 인도에 도착한 후부터 인도의 내정 불간섭과 상업위주의 정책이 급변하여 영토확장 정책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이러한 정책 변화의 배경에는 유럽 대륙의 정치적 정세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유럽은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미증유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영국에서는 피트 정부가 프랑스 혁명의 여파와 청년 장군 나폴레옹의 강한 도전을 받고 있었다. 더욱이 나폴레옹은 영국과 인도와의 관계를 차단하기 위하여 이집트 원정을 단행하고 있었다. 이 원정은 인도에 대한 중대한 위협을 의미하고 있었으며 나폴레옹은 인도 원정까지 공언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p.326
영령인도에 수립된 총독정부의 구성과 성격은 두 개의 특이한 대조적인 권위에서 나왔다. 하나는 무갈제국의 정치적 제도이고, 다른 하나는 영국 왕실의 특허와 하원에서 제정된 법들이었다 무갈 체제는 전제정치를 조장하는 방향이었으며, 다른 한편 영국의 법규는 입헌주의 정치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인도에서의 총독정부는 두 요소를 교묘하게 혼합하는 형태로 나아갔다. 입헌주의가 전제정치의 틀 속에서 발전해 나갔던 것이다.
p.345
영국의 상업 발전에 있어서 커다란 전환점은 동인도회사의 무역 독점을 철폐한 1813년의 특허법이었다. 이것은 산업혁명을 진행해오면서 새로운 제조업자들이 생산한 상품의 판로를 위해 보다 많은 시장을 요구해 온 결과로 나타났다. 새로운 개별적인 제조업자와 상인들이 동양무역의 활동무대에서 동인도회사의 지위를 빼앗은 것이다. 이 특허법은 4반세기 동안 계속된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의 와중에서도 영국의 사회경제적 분위기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가를 보여준 것이었다.
p.347
인도가 영국 의회의 통제를 받으면서도 분리된 입법권을 행사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를 갖기를 희망했던 것은, 마코올리뿐만 아니라 당시 영국 정치지도자들의 일반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특허법을 통하여 인도에 대한 식민주의적 억압을 위한 구조가 점차 조직하되어 갔지만, 진행이 급진적 변화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동인도회사라는 하나의 무역회사가 이제 실제적인 인도의 정부가 되어버렸다. 무역 조직망이 점차 거대한 국가의 통치를 위한 관료주의적 기구로 발전해 갔던 것이다.
p.348~349
번영했던 면직업이 붕괴되고 교역 활동이 특권층의 수중에 들어간 상황에서 무역과 공업에 종사하려는 마음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세계 저 쪽의 방적기 때문에 수많은 인도인들이 작업장에서 쫓겨났고 영국의 산업혁명이 인도의 경제 질서를 흔들어 놓자 이제 인도 경제는 비교적 번영했던 상호의존적이면서도 자급자족적인 상태로부터 불안하고 의존적인 농민 경제로 변모하고 말았다.
p.354
복음주의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인간성은 완전히 개조될 수 있다는 신념이었는데 그것은 교육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보았다. ···벤담을 대포로 하는 공리주의 학파의 이론인 <최대다수의 최대행복>과 선은 쾌락이요 행복이며 악은 고통이라는 주장은 이미 나타났던 것들로써 ···공리주의자와 복음주의자의 생각에서 우리는 넓은 의미에서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공리주의와 복음주의는 모두 개인주의 운동으로서 개인을 관습의 예속으로부터 또 귀족과 성직자들의 학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을 모색하였다. ···인간은 완전히 교육받을 때까지, 또 지속적인 행복을 얻기 위해 찰나적인 즐거움을 버릴 수 있도록 충분히 훈련을 쌓을 때까지는 <근엄한 교장선생님>이 필요한데 그것은 다름아닌 법을 말한 것이었다. ···법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의미를 바라보는 입장은 크게 달랐다. 복음주의자에게는 법이 하나님과 모세의 율법이었지만, 공리주의자에게는 인간 입법자가 형벌의 고통과 같은 것을 인위적으로 부과함으로써 사악한 행위를 피하도록 인간을 돕는 것을 의미하였다.
p.358~359
벤담과 제임스 밀은 인도의 변화가 법에 의해 이루어질 경우 거기에는 주권을 가진 입법기관이 수립되어야 하고 또 인도 정부는 현재의 반(半)독립적인 권력의 변칙적인 집합으로부터 통일된 중앙집권적 국가로 변모되어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그들이 생각했던 통치 형태는 현대적 의미의 자유주의적 정부는 결코 아니었고 유럽 계몽사상기의 유물인 이른바 계몽전제정치를 이상으로 했던 것이다.
p.361
다른 많은 인도인 학자들은 이 폭동(세포이 항쟁)을 먼 후일의 독립 운동과 결부시키는 것은 시대착오적일 뿐이라고 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폭동은 우따르 프라데시 주와 그 주변지역에만 국한되었으므로 이 운동에서 인도적 혹은 민족적이라고 성격지을 수 있는 하등의 정당성을 찾을 수가 없다. 당시 인도인들은 하나의 정치적 민족적 단위로서의 인도라는 관념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있어서 벵골인, 마라타인, 구자라트인 등은 영국인만큼이나 외국인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하나의 인도라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은 한에 있어서 국민국가로서의 인도의 자유라는 이념은 없었으며 더욱이 그 자유를 달성하기 위한 투쟁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p.401
브라만 계급의 출신이 많은 벵골 군대는 외국 근무에 저항감을 보였다. 그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근무하는 것을 싫어했는데 그것은 외국 여행을 종교적 금기 사항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총독정부는 힌두 특히 높은 카스트의 세포이가 국외에서 근무하지 않도록 배려해 왔었으나 영령인도가 급격히 확장되어감으로써 그 한도를 지키기가 어려워졌다. 근무 규정의 변경이 힌두의 종교적 의무 사항을 의도적으로 더럽히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이제 세포이는 세습적인 군인 카스트의 일원이 될 뿐이며 자식들은 원래의 직업을 따르는데 방해를 받게 되고 또 타고난 카스트에서 추방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p.406
항쟁 이후부터 커즌 총독 때까지의 기간을 일반적으로 인도에서 영국 지배의 절정기로 보고 있다. 이 기간은 한마디로 제국주의시대로 규정할 수 있지만 그러한 성격은 특히 그 전반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그 후반기에는 주목할 만한 민주주의적 개혁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 전반기의 통치 구조는 질서와 능률, 지배와 진보로서 국경 지방의 통제와 기근 대책과 교육의 확대 등이 주요한 내용이었으며, 그 후반기는 영국 글래드스턴의 도덕적 열정에서 자극을 받아 자유주의적 개혁과 인도인의 자각 운동이 큰 진전을 보였던 시기였다.
p.421
영국의 19세기 후반은 자유당과 보수당이 교대로 양당 정치를 통한 민주정치의 모범을 보여준 시기였다. 두 정당은 대외 정책에 있어서 서로 다른 견해를 보임에 따라 인도에 부임한 총독들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당과 보수당은 아프가니스탄과 러시아에 대한 대외 정책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제도적 개혁에 있어서도 대조적인 입장이었다. 1874년 투철한 제국주의자인 디즈레일리가 재집권하여 솔즈베리가 인도상에 임명됨에 따라 영국 정부는 러시아의 공격적인 세력 확장 정책을 좌시하지 않았다.
p.424
영국 정부의 전진정책은 아프가니스탄과는 정반대의 방향에 위치한 버마의 병합을 가져왔다. 이번에도 영국의 침략적인 제국주의 정책은 또다른 유럽 열강인 프랑스의 정치적 영향력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수행되었다. 러시아와 프랑스라는 두 열강이 결정적인 순간에 아프가니스탄과 버마에 등을 돌림으로써 영국의 전진 정책은 성공적인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
p.429
영국의 보수당과 자유당의 모범적인 양당 정치를 논의할 때 우리는 디즈레일리와 글래드스턴이란 인물을 연상하게 된다. 보수당의 지도자 디즈레일리는 신념에 찬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하였고, 자유당의 지도자 글래드스턴은 대내적인 자유주의적 개혁에 노력하였다. 그들의 대조적인 면인 대인정책(對印政策)에도 그대로 표현되었다. 제국주의 정책은 대영제국의 위세를 세계에 떨침으로써 영국민에게는 자존심을 북돋워주었지만 피지배 국민에게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었으며, 반대로 자유주의적 개혁정책은 인도인의 자유가 신장되고 능력에 따른 활동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인도 통치에 있어서 디즈레일리 수상의 공인된 대리인이 리튼 총독이었고, 글래드스턴 수상이 가장 신뢰했던 정책 수행자가 리폰 총독이었다.
p.430
새로운 성격의 종교 사회 개혁단체가 출현하였는데 그것이 다야난다 사라스와띠가 창설한 아리아 사마자(Arya Samaj)였다. 아리아 사마자는 인도의 고대 문화유산에 대한 자존심을 북돋우려는 순수한 힌두적인 종교사회 개혁 운동으로 나타났다. ···구자라트 남부지방에서 브라만 계급으로 태어난 다야난다가 부르짖었던 종교개혁 운동은 순수했던 초기 힌두 신앙을 강조한 복고적 운동이었다. <베다로 돌아가라>는 것이 다야난다의 종교 개혁 운동에 있어서의 표어였다. 마치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카톨릭 교회의 권위와 횡포를 비판하고 성경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야난다는 브라만 계급의 횡포에 반발하면서 인도 최고의 성전인 『베다』에의 귀의를 촉구하였다. ···아리사 사마자의 국수주의적 성격은 당연히 기독교와 이슬람교에 대하여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또한 베다 사상에 투철한 힌두교는 결코 근대 서구 사상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p.439~440
국민회의는 적어도 그 초기에 있어서는 영국 지배에 대한 하나의 충성적인 집단이었다. ···국민의회가 인도 국민의 자발적인 노력의 소산이기보다는 오히려 영국인에 의해 계획되어 성립되었다는 사실이 이 단체의 성격을 규정짓고 말았던 것이다. 참가 대표들의 교육 정도와 직업 등을 살펴볼 때 국민회의는 영어교육을 받은 이른바 교육 중간계급의 활동 무대였다. ···온건파의 탁월한 지도자였던 고칼레는 영국인에 비하여 인도인의 정치적 무능력을 인정하면서 <모든 정치적 발전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우리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기 전에 얼마 동안의 도제(徒弟) 기간을 거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p.446~447
영국의 인도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체제 안에서는 노동자 특히 농민을 쥐어짜는 세금이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무거운 세금 부담이 인도의 농민들로 하여금 그들의 농산물 소출의 많은 분량을 시장에 팔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영국 제국주의자들이 인도로부터 농작물을 거두어가는 것을 더욱 용이하게 만들고 있었다. ···원료 공급원과 상품시장으로서의 인도에 대한 수탈의 강화는 인도의 도시와 농촌에서 상품과 돈의 원활한 교류를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아직 형성과정에 있을 때에는 상업자본과 고리대금 자본이 농업 생산과 수공업 분야로 더욱 침투해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인도의 무역업자와 대금업자들에 의한 자본 축적은 바람직하지 못한 사회경제적 결과를 가져와 이들이 토지 소유 계층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농업 생산성의 향상 없이 땅값만 상승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또한 대규모 경영인들이 극히 제한적으로 공업에 투자하여 시장을 위축되도록 조작하는 것이 인도의 경제적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가장 기동성 있는 생산요인인 자본이 기동성이 가장 약한 토지로 몰려가는 우려할만한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땅값의 급격한 등귀로 노동자의 고용을 확대할 생산성의 개선보다는 토지 자체가 모든 가용자본을 흡수해 버리는 결과로 나타났다.
p.463~464
국내의 정치활동에는 처음으로 뛰어든 간디도 대영제국의 방어에 적극 참여하도록 국민에게 호소하고 나섰다. <인도인이 영국인의 협력 없이 스스로를 방위할 수 있는 것을 배우지 않는 한 인도는 대영제국 내에서 동등한 일원으로서 인정되지 않을 것이다. 인도의 장래는 전쟁터에서 결정될 것이지 심라(영령인도의 여름철 수도)나 화이트 홀의 관청에서 결정되지는 않는다. 자유로 통하는 길은 프랑스의 전장(戰場)에 위치해 있다>고 말하였다. 간디는 인도인에게 무기 사용법을 배우도록 권장하면서 유럽 전쟁에 대대적으로 참여하도록 촉구하였다. ···인도 국민 지도자들이 전쟁 동안 영국을 지지했던 것은 충성에 대한 반대급부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국민 지도자들은 자치를 달성할 수 있는 가장 용이하고 빠른 길은 대영제국의 방어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p.490
1935년의 인도통치법은 이전의 법들이 규정하고 있던 특징들 예컨대 의회, 내각책임제, 지방자치 및 종파적 대표제 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여기에다가 이 법은 두 가지 새로운 특징 즉 중앙에 연방 원칙과 주에 책임정부 원칙을 도입한 점이었다.
p.497
간디 사상의 근본은 남아프리카에서 오랫동안 실험을 통하여 성공한 사티아그라하였다. 먼저 사용했던 <소극적 저항>이라는 영어 표현은 자신이 제시하고 있는 힘을 긍정적으로 나타내지 못한다고 생각한 간디는 새로이 사티아그라하 즉 진리파악, 진리추구라는 인도의 고유 언어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소극적 저항은 대개 이기적인 정치적 무기인데 반하여 사티아그라하는 물리적 힘에 대한 정신력의 우위에 근거한 도덕적 무기이다. 전자는 약자의 무기일 뿐인데, 후자는 가장 용감한 사람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 전자의 목적은 적을 꼼짝 못하게 몰아붙이는 것이지만, 후자의 그것은 사랑과 인내로 상대방을 잘못에서 벗어나도록 설복시키는 것이다. 소극적 저항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을 찾아볼 수 없지만, 사티아그라하에서는 증오나 나쁜 생각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생활방식으로서의 진리는 신에 대한 충실한 생활을 의미하며, 행동방식으로서는 비폭력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전쟁에서는 난폭한 방법으로 적을 굴복시키려고 하지만 사티아그라하에서는 쌍방이 정의와 공명정대함에 입각하여 합의된 해결책에 도달하는 것이 기대된다. 여기에서는 공동으로 목표를 달성하려는 것이므로 승리도 또한 패배도 없는 것이다. ···사티아그라하에서 파생된 것이 비폭력 비협조였다. 그것은 <괴로운 사랑의 표현>이었다. 간디는 <비협조가 사티아그라하 병기고에 있는 가장 중요한 무기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다만 진실과 정의에 입각하여 꾸준히 적의 협조를 구하려는 수단이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였다.
p.508~509
마하트마 간디는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모든 국민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불만이 많은 염세(鹽稅)에 대항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소금은 말할 것도 없이 모든 인도인이 필요로 하는 생활 필수품이었다. 그러나 소금은 많은 세금이 부과되는 국가의 전매품이었으므로 어느 누구도 소금을 제조하거나 파는 것은 불법 행위였다. ···간디는 바닷물로 직접 소금을 만드는 불법적 행동을 의도적으로 감행하믕로써 불복종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현하였다. ···25일 동안 계속된 간디의 이른바 <소금 행진>에는 수많은 군중이 뒤따랐다.
p.518~519
마하트마 간디는 모슬렘의 불만을 배경으로 하여 킬라파트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그의 비협조운동을 논의하기 위하여 국민회의와 모슬렘연맹의 특별 회합이 1920년에 캘커타에서 열렸다. 이때 진나는 간디의 비협조운동에 찬성하지 않았다. 진나는 비협조운동의 정치적 교육적 측면은 자살적이고 모든 면에서 유해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사실 국민회의와 모슬렘연맹의 특별회합을 주선했던 사람이 진나였으나 여기에서 간디에 대한 압도적인 지지가 결의되자 그는 국민회의를 떠나고 말았다. 진나는 민족주의자이면서도 의회민주주의에 깊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인도의 자치는 혁명이 아닌 합법적 방법에 의해 이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간디의 주도 아래 인도의 독립운동이 합법적인 길을 버리고 직접 행동의 방향으로 나아간 데 대하여 진나는 우려를 표명하고 국민회의를 탈퇴했던 것이다.
p.538~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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