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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예술가의 초상일상/book 2020. 3. 9. 23:20
로베르트 무질의 책을 읽으면서 우연하게 제임스 조이스의 이름을 접했다. 개인적으로 독서하는 방식이, 더 정확히는 다음 읽을 책을 고르는 방식이, 마치 사방에 널린 징검다리를 가볍게 두드려보고 건너는 것과 같아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라는 책 역시 <특성없는 남자>라는 징검다리에서 한 차례 작가의 이름을 눈여겨 봐두었다가 이제서야 첫 페이지를 펼쳤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A Po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이라는 제목만 봐서는 윌리엄 서머셋의 <달과 6펜스>처럼 어떤 예술가를 모델 삼아 인간적인 고뇌를 그려내는 작품인가 지레짐작을 했었는데, 그런 책은 아니었다. 다분히 자전적인 성격의 이 소설은, 예술가(작가)라는 길에 들어서기 직전까지의 제임스 조이스라는 인물을, 조소(彫塑)에 점토를 바르듯 묵묵한 문체로 그리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이 책은 오히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나 N.H. 클라인바움의 <죽은 시인의 사회>를 떠올리게 한다.
제임스 조이스를 모티브로 하는 스티븐이라는 한 소년이 선과 악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은 <데미안>의 싱클레어를 꼭 닮았지만,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보다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적인 소설이기 때문에 헤르만 헤세의 작품보다 더욱 다각도에서 글을 음미할 수 있다. 단연 두드러지는 특징은 지은이가 나고 자란 아일랜드의 색채가 짙게 묻어난다는 점이다. 이때 아일랜드적이라 함은 다시 두 꼭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뿌리깊은 가톨릭 전통과 영국에 의한 식민지배가 그것이다.
아일랜드는 로마가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던 시점에 가톨릭이 전파된 가장 외딴 지역 중 한 곳으로, 달리 말해 가장 원시적이고 순수한 형태의 가톨릭이 남아 있는 곳으로 여겨졌다. 로마 바티칸이 가톨릭의 권능(權能)이 체현(體現)되는 곳이었다면, 아일랜드는 수행(修行)을 찾아나선 수도승들이 은거(隱居)하는 탈속(脫俗)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일전에 읽었던 <바다의 늑대: 바이킹의 역사>에서는, 유서 깊은 교회와 진귀한 성물(聖物)이 가득했던 이곳이 바이킹족에게는 노략질하기에 좋은 먹잇감이었고, 지속적인 바이킹의 유입 속에서 생겨난 도시가 지금의 수도인 더블린임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가톨릭 신앙의 마지막 보루로 남아 있던 아일랜드에서 가톨릭에 여타의 주석(註釋)을 다는 것은 사회적인 금기 대상이었고, 어린 스티븐은 자신의 모든 과거 행위를 종교적인 잣대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구원과 저주, 천당과 지옥 사이를 오가면서도, 점점 더 세속적인 세계를 향해 알을 깨고 나오기 시작한다. 소설의 거의 마지막에 가서 스티븐이 친구에게 ‘신앙은 잃었지만 자존감을 잃지는 않았다’고 선언하는 대목에서는, 성년의 문턱을 갓 넘은 스티븐이 비로소 자신의 힘으로 두 발로 딛고 과거의 침전물과 결별하겠다는 의지를 표상한다.
한편 영국으로부터 400년 가까이 식민지배를 당했던 사실은 아일랜드에 커다란 상흔을 남기는데, 이는 꼬마 스티븐이 바라본 어른들이 정치를 두고 논쟁하는 장면을 통해 종종 드러나며, 이 역시 스티븐의 정체성에 영향을 준다.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움직임에 미온적이거나 심지어 타협적이기까지 했던 가톨릭 교단의 행보는 당시 아일랜드인들의 분노를 자아냈지만, 다른 한편 종교적인 색채는 걷어내되 영국의 지배에 끈질기게 저항하는 파넬을 비롯한 정치세력들은 아일랜드인의 신심에 부합하지 않았다. 이러한 교착국면에서 아일랜드는 다른 근대 시기 민족주의가 발현되던 유럽 열강들과는 다른 역사적 경로를 걸었고, 민족감정이 분출되는 과정은 중세적 신앙에 발목잡혀 지지부진할 따름이었다. 아일랜드의 뿌리가 되는 게일족의 전통―그렇지만 보수적이고 고루한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적국의 신문물―영국과 대륙유럽의 문학들―에 대한 동경심이 뒤얽혀, 감수성 많은 한 소년은 탈출구를 모색하기 시작한다.
스티븐 디덜리스. 영국적인 이름과 그리스 신화의 성씨가 어우러진 한 소년의 이름. 독특한 그의 성씨는 그리스 신화 속 다이달로스에게서 따온 것이다. 미노스 왕의 아들 켄타우로스를 가두기 위해 다이달로스는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미로(Labyrinth)를 설계하지만, 미로의 비밀이 새어나갈 것을 우려한 미노스 왕은 미로가 완성되자 그를 성탑에 가둬버린다. 아들 이카루스와 함께 성탑을 탈출하기 위해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를 고안하지만, 비행에 심취된 나머지 지나치게 태양 가까이 날아오른 아들 이카루스는 목숨을 잃고, 다이달로스 자신만이 가까스로 시칠리아로 망명하는 데 성공한다.
뛰어난 재능과 감각이 있었지만 자신이 살던 곳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하고, 미노스의 왕국을 떠나야만 했던 다이달로스. 제임스 조이스가 그런 그의 이름을 주인공의 이름에 녹여낸 것은, 자신의 문학적 성취를 꽃피우기에는 척박한 아일랜드의 문화적 토양과, 또 다른 유럽으로 예술적 망명을 택해야 했던 작가 자신의 삶을 투영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제임스 조이스는 자신이 뿌리를 뒀던 아일랜드의 풍경을 훌륭히 묘사하면서 개인적인 경험을 녹여냈을 뿐만 아니라, 예술과 종교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적인 관점을 훌륭하게 견지(堅持)한다.
문예지에 연재되던 글들을 모아 만들어진 것이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라고 하는데, 총 5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구성은 각 장마다 조금씩 달라서 읽는 재미가 있었다. 특히 새로운 인물을 대화 속에 참여시키거나 공간을 이동시키는 장면에서, 알게 모르게 독자의 시점을 옮겨놓는 제임스 조임스의 탁월한 서술방식도 눈여겨 볼만했다. 아일랜드 출신의 걸출한 작가의 글을 접해서 좋았고, 국내에 소개된 글이 다양하지는 않지만 제임스 조이스의 글을 더 읽어보고 싶다. 마음에 드는 멋진 글이다:)
<분별없는 열정은 표류하는 배와 같다.>
―p. 64
……그가 변하지 않으리라고 여겼던 것들에 일어난 그 변화는 세상에 대한 그의 소년다운 생각에 여러 차례 작은 충격을 주었다. 그의 영혼 어두운 곳에서 때때로 들끓던 야망은 출구를 찾지 못했다. 록 로드의 전찻길을 따라 암말의 굽이 또각또각하는 소리를 내고 커다란 깡통이 그의 뒤에서 흔들리며 덜컹거릴 때, 세상 밖에서 온 것 같은 어둠이 그의 마음을 흐려 놓았다.
―p. 88
……그가 아이들의 맘껏 웃는 소리를 들으며 고백의 기도를 되풀이하는 동안, 그리고 그 악의에 찬 일화의 장면들이 마음속에 아직도 생생하고 빠르게 지나가는 동안, 그는 왜 그가 그를 고문한 아이들에 대해서 지금 아무런 원한이 없는지 궁금해졌다. 그는 그들의 비겁함과 잔혹함을 조금도 잊지 않았지만 그 기억은 그에게 어떤 분노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그렇기에 책에서 그가 만났던 모든 맹렬한 사랑과 증오의 묘사는 그에게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존스 로드를 따라 그가 비틀거리며 귀가하던 그날 밤에도 그는 마치 과일에서 부드럽게 잘 익은 껍질을 벗겨내듯 어떤 힘이 그에게서 갑자기 꾸며진 분노를 벗겨 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p. 112
……그때까지만 해도 자기 마음속에만 있는 난폭하고 개인적인 병이라 여겼던 것의 흔적을 외부 세계에서 발견한 것은 그에게 충격이다. 그의 흉측한 몽상들이 그의 기억 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그 몽상들도 단지 몇몇 말에서 갑자기 격렬하게 그의 앞에 솟아났던 것이다. 그는 곧 그 몽상들에 굴복하고 그들이 그의 지성을 휩쓸고 지나며 비하하도록 내버려 두면서도, 그들이 어디서, 어떤 흉측한 이미지들의 소굴에서 오는 것일까 의아해했고, 그들이 휩쓸고 갈 때면 스스로에게 초조해지고 역겨워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늘 나약하고 비굴했다.
―p. 122
그는 벨비디어에서의 애매한 자기 위치를 떠올렸다. 장학생, 자신의 권위를 두려워하는 리더, 자기 삶의 남루함과 들끓는 마음과 싸우는, 도도하고 민감하고 의심 많은 자, 얼룩진 책상 위에 새겨진 글자들이 그의 육체적 나약함과 부질없는 열정을 비웃으며, 자신의 터무니없고 추잡한 광란으로 인해 스스로를 혐오하게 만들면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목에 걸린 침은 점점 씁쓸해져 삼킬 수가 없었고, 희미한 욕지기가 머릿속까지 올라와 잠시 동안 그는 눈을 감은 채로 어둠 속을 걸어갔다.
―p. 123~124
그는 아버지가 흐느낌을 목구멍으로 꿀꺽 넘기는 소리를 들으며 신경질적인 충동에 눈을 번쩍 떴다. 시야에 갑자기 퍼진 햇살 때문에 하늘과 구름이 어두운 장미색 빛의 호수 같은 공간을 품은 어두운 덩어리들로 이루어진 환상적인 세계로 바뀌었다. 그의 두뇌는 멀미를 느끼며 무기력해졌다. 가게의 간판에 새겨진 글자를 해독할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기괴한 생활 방식으로 인해 스스로를 현실의 한계 밖으로 밀어내 버린 것 같았다. 자기 내부의 격노한 절규가 반영된 어떤 것이 아닌 한 현실 세계로부터 어떤 것도 그를 움직이지 못했고 와닿지도 않았다. 여름과 기쁨과 친구의 부름에도 귀먹고 무감각한, 아버지의 목소리에 지치고 우울해진 그는 어떤 지상의, 인간적인 호소에도 반응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마저 자기 것인지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고, 그래서 천천히 이렇게 되뇌었다.
―p. 125
스티븐은 아버지와 그의 두 친구가 과거의 기억에 축배를 들기 위해 세 개의 술잔을 카운터에서 집어 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운명의 차이인지, 기질의 차이인지, 심연이 그와 그들 사이를 갈라놓았다. 그의 마음은 그들보다 늙은 것 같았다. 그의 마음은 마치 달이 젊은 지구를 비추듯이 그들의 갈등과 행복과 후회 위에 싸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떤 생명도 젊음도 그들 안에서 요동치듯이 그 안에서 움직이질 않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즐거움도, 저속한 남성적 건강의 활력도, 효성스러운 마음도 알지 못했다. 그의 마음속에 요동치고 있는 것은 단지 차갑고 잔혹하고 사랑없는 욕정뿐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죽거나 사라졌고, 그와 함께 단순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영혼도 사라졌다. 그는 달의 황량한 껍데기처럼 삶 한가운데를 떠돌고 있을 뿐이었다.
하늘로 올라가 지상을 굽어보며
홀로 떠돌아다니느라
그대는 지쳐서 창백한가요?
그는 셸리의 시 중 몇 줄을 혼자 중얼거렸다. 인간의 슬픈 무기력고 광대한 비인간적인 활동의 교차가 그를 오싹하게 했고, 그는 자신의 인간적이고 부질없는 근심을 잊어버렸다.
―p. 129~130
그러나 순간들이 지나가면 다시 소모적인 정욕의 불꽃이 타올랐다. 그의 입에선 시가 흘러나왔고 그의 머리에서는 분명치 않은 절규와 발설되지 않은 난폭한 말들이 주체할 수 없이 마구 흘러나왔다. 그의 피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무슨 소리가 나지 않나 열심히 귀를 기울인 채 골목길과 문간의 어둠 속을 들여다보며 어둡고 질척거리는 길을 이리저리 떠돌았다. 그는 마치 어쩔 줄 모르고 어슬렁거리는 짐승처럼 혼자서 신음했다. 그는 자기와 같은 부류의 사람과 함께 죄를 짓고 싶었으며, 다른 이에게 자기와 함께 죄를 짓도록 강요하고 싶었으며, 그녀와 함께 죄를 지으며 환호하고 싶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어떤 어두운 존재가, 마치 그를 가득 채우는 홍수처럼 미묘하게 소곤거리는 존재가 저항할 수 없이 그에게 들이닥치는 것을 느꼈다. 그 소곤거림은 마치 잠결에 듣는 군중의 중얼거림처럼 그의 귀에 몰려들었다. 그 미묘한 흐름은 그의 존재를 꿰뚫고 들어왔다. 그는 그것이 뚫고 들어오는 고통을 견디면서 두 손을 발작적으로 꼭 쥐고 이를 악물었다. 그는 그에게서 멀어지면서 그를 자극하는, 연약하게 스러져가는 형체를 꼭 붙들려고 길에서 두 팔을 쭉 뻗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도 오랫동안 목구멍에 묶어 두었던 외침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것은 마치 고통 받는 자들의 지옥에서 나오는 절망의 통곡처럼 터져 나왔다가, 격렬한 간청의 비탄 속에, 사악한 자포자기를 갈망하는 외침 속에, 그가 화장실의 물이 새는 벽 위에서 읽었던 음탕한 낙서의 메아리에 불과한 울음 속에 사라졌다.
―p. 135
……설교자의 거친 목소리가 그의 영혼에 죽음을 불어넣자 명멸하는 두려움은 정신적 공포가 되었다. 그는 그 고통을 겪어 냈다. 그는 느꼈다. 죽음의 냉기가 팔다리를 스치고 심장으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을, 죽음의 막이 눈을 가리는 것을, 두뇌 한가운데의 밝은 부분이 램프처럼 하나하나 꺼지는 것을, 피부에서 마지막 진땀이 배어 나오는 것을, 죽어 가는 사지의 무기력함을, 말이 엉키고 꼬이고 안 나오는 것을, 심장이 희미하게, 점점 희미하게 고동치는 것을, 거의 굴복하여, 숨이, 가엾은 숨결이, 가엾고 의지할 데 없는 인간의 정신이, 흐느끼고 한숨 쉬고, 목구멍에서 그르렁 가르랑 소리를 내는 것을.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어! 그가, 그 자신이, 그가 굴복했던 육신이 죽어 가고 있었다. 그 육신과 함께 무덤으로. 시신을 나무 상자에 담아 못질하라. 그것을 고용한 사람들의 어깨에 들려 집 밖으로 가지고 나가라. 땅에 긴 구멍을 파고 보이지 않게 그것을 무덤 속에 처넣고, 썩어 가게, 기어다니는 벌레들의 무리에 먹히게, 바삐 오가는 배가 통통한 쥐들에게 뜯어 먹히게 하라.
―p. 152
……영혼을 잃는다면 온 세상을 얻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마침내 그는 이해했다. 그 주변의 인간의 삶이란 개미 같은 인간들의 우애로 노동하며 죽은 자들은 조용한 무덤 속에서 잠자고 있는 평화의 들판인 것이다……
―p. 170
그런데 이 모든 영적인 고통 중에서 가장 심한 것은 상실의 고통입니다. 상실의 고통은 사실 너무나 큰 것이어서 그 자체로도 다른 모든 고통보다 더한 고문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훌륭한 박사, 천사 같은 박사라 불리는 성 토마스는 최악의 저주란, 인간의 이해력에서 신성의 빛이 박탈당하고 인간의 감정이 하느님의 선하심으로부터 완강하게 돌아서는 데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무한히 선하시므로, 그러한 존재를 상실한다는 것은 무한히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이 생애에서 우리는 그러한 손실이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만, 지옥에 있는 저주받은 자들은 그 심한 고통 때문에 그들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완전히 이해하고 있으며, 그들이 그것을 자신의 죄로 인해 잃었고 또한 영원히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 육신의 결합은 산산이 부서지고 우리의 영혼은 곧장 존재의 중심인 하느님을 향해서 날아갑니다.
―p. 172~173
죽은 육신에서 부패로 벌레들이 생겨나듯이, 길 잃은 영혼에도 죄의 부패로부터 영원한 회한이, 양심의 가책이, 교황 이노센티우스 3세가 말씀하셨듯이 3중의 침을 가진 벌레가 생겨납니다. 이 잔인한 벌레가 쏘아대는 첫 번째 침은 지난날 누렸던 쾌락의 기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양심이라는 벌레의 두 번째 침, 저질러진 죄에 대한 뒤늦은, 소용없는 슬픔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가장 추악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후회할 것이지만 너무 늦을 것이며, 그때에서야 그들은 그들이 무시했던 좋은 기회들을 아쉬워할 것입니다. 이것이 양심이라는 벌레의 마지막, 가장 깊고 잔인한 침입니다. ……
―p. 174~176
양심의 아픔이 그치고 그는 어두운 거리로 재빨리 걸어 나갔다. 그 거리의 인도에는 포석(鋪石)이 그리도 많았고 그 도시에는 길이 그리도 많았으며 세상에는 도시들이 그리도 많았다. 그렇지만 영원에는 끝이 없었다. 그는 죽을죄를 지었다. 단 한 번만으로도 죽을죄였다. 그건 한순간에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렇게 빨리? 보기만 해도, 혹은 보는 생각만 해도, 눈은 처음에 보겠다는 마음이 없어도 사물을 보지. 그러고는 한순간에 그런 일이 벌어져. 그렇지만 신체의 구 부분은 생각이라도 하는 걸까, 아니면? 뱀, 들판에서 가장 교활한 짐승. 그것이 한순간 욕망하고 나서는 그 욕망을 순간순간 죄스럽게 연장하는 것을 보면 알고 있는 게 분명해. 그것은 느끼고 이해하고 욕망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누가 그렇게, 신체의 동물적인 부위가 짐승 같이 이해하고 짐승 같이 욕망하도록 누가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 순간은 그인가, 아니면 천한 영혼으로 움직이는 비인간적인 사물인가? 숨어 있는 뱀 같은 생명이 그의 부드러운 골수를 파먹고 정욕의 점액을 먹고 살찌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의 영혼은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오, 왜 그랬던 거야? 왜?
―p. 189
아직 예배당을 떠날 수는 있었다. 그는 일어나서 한 발을 다른 발 앞으로 내딛고 조용히 걸어 나가 어두운 거리로 빠르게 달리고, 달리고, 달릴 수 있었다. 아직도 수치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다. 바로 그 죄만 아니라면 어떤 끔찍한 범죄였더라도! 차라리 살인이었더라면! 작은 불똥들이 떨어져 그의 부끄러운 생각들, 부끄러운 말들, 부끄러운 행동들, 모든 곳을 건드렸다. 수치심이 고운 재처럼 불타며 계속 떨어져 내려와 그를 온통 뒤덮었다. 그걸 말로 한다니! 그의 영혼은 숨이 막히고 어쩔 줄 몰라 죽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p. 193
선하게 되는 것은 쉽다. 하느님의 멍에는 달콤하고 가볍다. 죄를 짓지 않는 편이, 늘 아이로 남아 있는 편이 더 좋았을 것이다. 하느님은 어린아이들을 사랑하시어 그들을 당신께로 오라 하시니 말이다. 죄를 짓는다는 건 끔찍하고도 슬픈 일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진정으로 사죄하는 불쌍한 죄인들에겐 자비로우시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그게 진짜 선함이다.
―p. 193~194
그렇다. 어머니는, 맥 빠진 침묵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 생각에 반대하는 듯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자부심보다 그를 더 날카롭게 찌르는 건 어머니의 불신이었고, 그는 어머니의 눈에 그가 나이 들어 가고 강해지면서 그의 영혼에서 신앙심이 스러져 가는 것이 어떻게 보였을지 냉정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희미한 적개심이 생겨나서 마치 어머니의 배신에 대항하는 구름처럼 그의 마음을 어둡게 했고, 그것이 구름처럼 지나가서 다시 그의 마음이 어머니에 대해 차분하고 공손하게 되었을 때, 그는 희미하지만 후회 없이, 그들의 삶이 처음으로 소리 없이 분리되고 의식하게 되었다.
대학이라! 그는 그렇게 소년 시절의 보호자로 서 있으면서 그를 자신들에게 종속시키고 그들의 목적에 봉사하도록 붙들어 두려 했던 보초들의 수하(誰何)를 지나와 버린 것이다. 만족 뒤의 자부심이 그를 길고 느린 물결처럼 들어 올렸다. 그가 봉사하도록 태어났으면서도 보지 못했던 그 목적이 그를 보이지 않는 길로 이끌어 탈출케 했고, 이제는 다시 오라고 손짓했다. 새로운 모험이 그의 앞에 펼쳐질 것이다. 그는 마치 변덕스러운 음악이, 마치 한밤중의 숲에서 세 가닥의 불꽃이 훨훨 발작적으로 타오르는 것처럼, 한 음정 올라갔다가 단4도 내려왔다가, 한 음정 올라갔다가 다시 장3도 내려오는 것을 듣는 듯했다. 그것은 끝도 없고 형태도 없는 요정의 서곡이었다. 박자와 상관없이 타오르는 불꽃처럼 음악이 점점 요란하고 빨라지자, 그는 나뭇가지와 풀밭 아래에서 들짐승들이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줄기처럼 탁탁거리며 내달리는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산토끼와 집토끼, 암사슴과 수사슴과 영양의 발들이 탁탁거리며 요란하게 그의 마음 위로 지나갔고, 마침내 그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자 뉴먼의 운율만 기억에 남았다.
―p. 222~223
그는 갑자기 그녀로부터 돌아서서 해변을 가로질러 가기 시작했다. 두 볼이 화끈거렸다. 몸도 불타고 있었다. 사지는 떨렸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그는 모래밭 저 멀리로, 바다를 향해 미친 듯이 노래를 부르며, 그를 향해 외쳐 부르던 삶의 도래를 맞이하기 위해 외치며 계속 걸어갔다.
그녀의 이미지가 그의 영혼으로 영원히 들어왔고, 어떤 말로도 그가 느끼는 황홀경의 거룩한 침묵을 깨뜨릴 수 없었다. 그녀의 눈은 그를 불렀고 그의 영혼은 그 부름에 날뛰었다. 살고, 실수하고, 타락하고, 승리하고, 삶으로부터 삶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야성의 천사가, 인간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지닌 천사가, 삶의 아름다운 궁정에서 보내온 사절(使節)이 그에게 나타나, 황홀의 순간에, 모든 과오와 영광의 길로 이르는 문들을 그에게 열어젖혀 보여 준 것이다. 가자 가자 가자 가자!
―p. 232
사실 비극적인 감정이란 공포와 연민이라는, 둘 다 비극적 감정의 국면인 양 방향을 보고 있는 하나의 얼굴이야. 내가 <사로잡다>라는 단어를 썼잖아. 그건 비극적 감정이란 정적이라는 뜻이야. 혹은 극적인 감정이 그렇다는 거지. 부적절한 예술이 자극하는 감정은 욕망이건 혐오건 동적인 것이거든. 욕망은 우리에게 뭔가를 소유하고, 찾아가라고 부추기고, 혐오는 우리에게 버리고, 떠나라고 부추기지. 그러니까 그런 감정을 자극하는 예술은 포르노건 교훈적인 것이건 부적절한 예술인 거야. 그래서 일반적인 용어를 쓰자면 미적인 감정은 정적인 거야. 마음이 사로잡혀서 욕망과 혐오를 초월해버리는 거거든.
―p. 276~277
내 기억에 그는 <보기에 즐거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라고 했어.
그는 <보다>라는 단어를 써서, 하고 스티븐이 말했다. 시각이나 청각을 통한 것이든, 아니면 다른 인식의 경로를 통한 것이든, 모든 종류의 미학적 인식을 다 포괄했어. 이 말은 좀 모호하긴 하지만 욕망과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선과 악으로부터 거리를 두기엔 충분히 명확하지. 이건 분명 운동 상태가 아닌 정지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거든. 진실한 것은 어떨까? 그것 역시 마음의 정지 상태를 만들어 내지. 직각 삼각형의 빗변에 연필로 이름을 쓰지는 않을 거잖아.
……내가 알기로 플라톤은 아름다움이란 진실의 광채라고 말했어. 무슨 대단한 뜻이 있는 건 아니고, 진실한 것과 아름다운 것이 서로 가깝단 말이지. 진리는 이해할 수 있는 것들 사이의 가장 만족스러운 관계로 충족된 지성에 의해 파악되는 거야. 아름다움은 감각적인 것들 사이의 가장 만족스러운 관계로 충족된 상상력에 의해 파악되는 거고, 진리에 이르는 첫 단계는 지성 자체의 틀과 범위를 이해하는 것, 즉 지성의 작용 자체를 이해하는 거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체계 전체는 심리학에 관한 그의 저서에 기초해 있고, 내 생각에, 그건 동일한 주체에 동일한 속성이 동시에 같은 관계로 속하기도 하고 속하지 않기도 할 수 없다는 그의 진술에 기초해 있어. 아름다움으로 가는 첫 단계는 상상력의 틀과 범위를 이해하는 것, 미적 인식의 작용 자체를 이해하는 거야. 알겠어?
―p. 280~281
……아퀴나스가 이렇게 말했어. 이걸 번역하자면, <아름다움에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온전함, 조화, 광채>가 되지.
……저 바구니를 보려면, 하고 스티븐이 말했다. 네 정신이 무엇보다도 바구니와 바구니가 아닌 눈에 보이는 나머지 세계를 분리해야 해. 인식의 첫 국면은 인식되는 대상 주변에 그어진 경계선이야. 미적인 이미지는 우리에게 공간 속에서 혹은 시간 속에서 제시되지. 청각적인 것은 시간 속에서 제시되고, 시각적인 것은 공간 속에서 제시돼. 그렇지만 시간적이든 공간적이든 미적인 이미지는 그 이외의 무한한 시공간의 배경에서 스스로 경계를 짓고 자족적인 것으로 선명하게 인식되는 거야. 너는 그것을 하나의 사물로 인식하는 거지. 너는 그것을 하나의 전체로 보는 거야. 넌 그것의 온전함을 인식하지. 그게 <인테그리타스>야.
……그러고는, 하고 스티븐이 말했다. 넌 하나하나 그 형식적인 선을 따라가게 돼. 넌 그것을 그 한계 내에서 각 부분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지. 넌 그 구조의 리듬을 느끼는 거야. 다시 말해서, 즉각적인 인지의 종합에 이어 인식의 분석이 이루어지는 거지. 처음엔 그것이 <하나의> 사물이라고 느끼고 나면, 이젠 그것이 하나의 <사물>이라고 느끼게 돼. 넌 그것을 복잡하고 다중적이며 다양하며 다층적이고 나눌 수 있고 떼어 낼 수 있는, 부분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부분과 그 합의 결과로, 조화로운 것으로서 인식하지. 그게 <콘소난티아>야.
그 말(클라리타스)의 함축된 의미는, 하고 스티븐은 말했다. 좀 모호해. 아퀴나스는 부정확해 보이는 용어를 사용하거든. 이것 때문에 좀 골치가 아팠어. 이 말을 보면 그가 상징주의나 관념론, 즉 아름다움의 최고 특징을 다른 세계로부터 오는 빛으로 여기는, 물질이란 관념의 그림자일 뿐이고 실재의 상징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하게 되거든. 내 생각에 그가 의미하는 바는 클라리타스라는 것이 어떤 것에서든 신의 목적을 예술적으로 발견하고 재현하는 것 혹은 미적인 이미지를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그 원래의 조건을 넘어서서 빛나게 할 수 있는 보편화의 힘이라는 거야. 그렇지만 그건 문학적인 얘기야. 난 그렇게 생각해. 네가 저 바구니를 <하나의> 사물로 인식하고 그것을 그 형태에 따라 분석해서 그것을 하나의 <사물>로 인식했을 때 너는 논리적으로나 미학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유일한 종합을 한 거야. 너는 저기 바로 있는 그대로의 그것이고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지. 그가 말하는 광채란 스콜라 철학에서 말하는 <퀴디타스>, 즉 <무엇whatness>이라는 거야. 이 최고의 특징은 미적인 이미지가 처음으로 예술가의 상상력에 생겨났을 때 느껴지는 것이지. 그 신비로운 순간의 정신을 셸리는 아름답게도 꺼져가는 석탄에 비유했어. 아름다움이 지닌 최고의 특징, 미적인 이미지의 선명한 광채를 그 온전함에 사로잡히고 그 조화에 매혹된 정신으로 선명하게 인식하는 순간이 바로 미적 쾌락의 선명하고도 조용한 정지 상태, 이탈리아의 생리학자인 뤼지 갈바니가 심장의 황홀이라는, 셸리와 맞먹는 아름다운 구절로 표현한 그 심장의 조건과 비슷한 영혼의 상태가 되는 거지.
내가 한 얘긴, 그는 다시 말을 시작했다. 좀 더 넓은 의미의, 문학 전통에서 가지는 그런 의미의 아름다움에 관련된 거야. 시장에서는 그 말이 다른 의미를 갖지. 우리가 2차적인 의미에서 아름다움을 말할 때, 우리의 판단은 우선 예술 자체의 영향을 받고 그 예술의 형식에도 영향을 받지. 분명한 건, 이미지는 예술가 자신의 정신 혹은 감각과 다른 이들의 정신 혹은 감각 사이에 놓여야 한다는 거야. 이걸 기억해 둔다면, 예술이 필연적으로 세 가지 형식으로 나뉘고 한 형식에서 그 다음 형식으로 진보해 간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이 세 형식이란, 예술가가 그의 이미지를 자신과 직접 연관시켜 제시하는 서정적 형식, 예술가가 그의 이미지를 그 자신과 다른 사람과 간접적으로 연관시켜 제시하는 서사적 형식, 예술가가 그의 이미지를 다른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연관시켜 제시하는 극적인 형식이야.
―p. 286~289
심장의 황홀이라! 밤은 황홀했다. 꿈인지 비전인지, 그는 천사가 누리는 삶의 황홀경을 이미 맛보았다. 그 황홀경은 순간적인 것이었을까, 아니면 긴 시간, 여러 해, 여러 시대에 걸친 것이었을까? 이제 사방에서 이미 일어났던 일 혹은 일어날 수도 있었던 일들의 수많은 희미한 상황들로부터 영감의 순간이 동시에 반영되는 듯했다. 그 순간은 마치 날카로운 빛줄기처렴 뿜어져 나왔고 이제 모호한 상황의 구름으로부터 혼란스러워진 형태가 그 잔광(殘光)을 부드럽게 감쌌다. 오! 상상력이라는 처녀의 자궁에서 언어가 육화되고 있었다. 대천사 가브리엘이 처녀의 방으로 왔다. 잔광은 흰 불꽃이 지나간 그의 영혼에서 짙어져, 장밋빛의 불타는 것 같은 빛으로 깊어졌다. 그 장밋빛으로 타는 것 같은 빛은 그녀의 낯설고도 멋대로인 마음, 어떤 남자도 알지 못했고 알 수도 없기에 낯설고, 세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제멋대로인 마음이었다. 그 불타는 장밋빛의 광채에 이끌려 천사의 합창대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너는 열렬한 욕망이 지겹지도 않은가,
타락한 천사의 유혹이?
황홀했던 날들은 더 이상 말하지 말라.
―p. 293
그는 그가 그녀에게 못 할 짓을 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순진무구함에 대한 느낌이 그를 움직여 거의 그녀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그가 죄를 통해서 그 순진무구함에 대해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그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그것, 그녀 역시 순진했던 동안에는, 혹은 그녀의 본성에 대한 낯선 모욕을 처음 당하기 전까지는 이해하지 못했던 그 순진무구함 말이다. 그때서야 그녀의 영혼은 그가 처음 죄를 지었을 때 그의 영혼이 그랬던 것처럼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녀의 연약하고 창백해 보이는 안색과 여성 특유의 은밀한 수치심으로 겸허해지고 슬퍼진 그녀의 눈을 기억하자 애틋한 연민이 그의 가슴을 채웠다.
그의 영혼이 황홀경에서 무기력으로 빠져들고 있는 동안 그녀는 어디에 있었던가? 신비로운 영혼의 삶의 방식대로, 그녀의 영혼도 바로 그 순간에 그의 존경심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p. 301
이 구린내 나는 똥 무더기 같은 세상에서 모든 것이 불확실해도 어머니의 사랑은 그렇지 않아. 어머니는 너를 세상에 낳아 주셨고 처음으로 네 몸을 안아 준 분이야. 어머니 마음이 어떨지 우리가 뭘 알아? 그렇지만 어머니가 무엇을 느끼건 최소한 그건 진짜야. 틀림없어. 우리의 이념과 야망이 다 뭐야? 다 장난이야. 이념이라고! 그래, 그 빌어먹을 매매 우는 염소 같은 템플에게도 이념은 있어. 매캔에게도 이념은 있어. 돌아다니는 모든 얼간이들도 다 자기에겐 이념이 있다고 생각할 걸.
―p. 329
신앙을 잃었다고 말했잖아. 스티븐이 대답했다. 자존감을 잃어버린 건 아니야. 논리적이고 일관된 부조리를 버리고 비논리적이고 일관성 없는 부조리를 받아들인다면 그건 어떤 종류의 해방일까?
―p. 331
넌 내가 가진 두려움을 고백하게 만들었어. 그렇지만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지 않는지도 말할게. 나는 혼자 있는 것이나 다른 사람 때문에 퇴짜 맞는 것, 혹은 내가 떠나야 할 것을 떠나는 것은 두렵지 않아. 그리고 실수하는 것도, 심지어 아주 큰 실수, 일생일대의 실수, 영원히 이어질 수도 있는 실수를 하는 것도 두렵지 않아.
……혼자 있는 것, 완전히 혼자 있는 것. 넌 그걸 두려워 않는단 말이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다른 사람과 분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친구 한 명도 없다는 뜻이야.
……감수할 거야. 스티븐이 말했다.
―p. 336~337
4월 26일. 어머니는 새로 구한 내 중고 옷가지들을 정리하고 있다. 어머니는 이제 내가 고향과 친구를 떠나, 마음이란 무엇이며 마음이 무엇을 느끼는지 배우게 되기를 기도한다고 말한다. 아멘, 그렇게 되기를. 삶이여, 오라, 나는 이제 백만번씩이라도 경험의 현실과 만나러, 내 영혼의 대장간에서 아직 창조되지 않은 내 종족의 의식을 벼려 내러 간다.
―p.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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