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 르 브르통
-
길을 걸으며(Chemin faisant)일상/book 2021. 1. 27. 21:59
나는 음울한 날에 울타리 하나 없이 벌거벗은 경작지의 지평선을 바라본다. 이따금 걷다 보면 불쑥 권태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육체적인 피로가 아니라, 혼란, 권태, 거의 절망에 가까운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다. 갈아엎은 밭 앞에서 잡아 뽑힌 식물들의 무질서, 울음소리 한번 내지 않고 땅의 부스러기들을 쪼아 먹는 슬픈 새들을 보면서 돌연한 좌절감에 사로잡힌다. 고독, 끝없는 도로, 너무도 짧고 지극히 피상적인 만남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하고 느껴보지 못했던 온갖 절망감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나는 쓸모없고 비생산적인 여행에 화가 나서 배낭을 옆으로 내던진다. 걷기, 방랑자처럼 살기, 매일 사람들의 얼굴에서 읽는 본능적인 불신을 극복하느라 시간의 일부를 허비하기, 관심 혹은 가능하다면 연민 일으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