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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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불꽃일상/book 2020. 9. 7. 23:33
두 권의 책 사이에서 손끝이 허공을 맴돌았다. 『절망』과 『창백한 불꽃』. 모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책이다. 『롤리타』를 읽은 뒤로 사놓은 책들인데, 처음에는 『절망』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가 결국 『창백한 불꽃』을 집어들었다. 『절망』은 정말 절망스러울 때 읽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직 그런 절망은 찾아오지 않았다. 또는 그런 절망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창백한 불꽃』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독서를 요구했던 책이다. 머리말에서부터 킨보트라는 인물이 편집과 출판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아서 갸우뚱하기도 했고, 나보코프의 장난이 시작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책은 크게 두 개의 구성으로 나뉜다. 하나는 킨보트의 절친한 벗인 셰이드가 쓴 총 네 편 1000행 짜리 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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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배스천 나이트의 진짜 인생일상/book 2020. 1. 15. 01:30
안타깝게도 어떤 면에서 보면 나는 그리 진득한 사람은 아니다. 특히 예술에 대한 관심사나 문학적 취향이 그러하다. 대체로 한번 책을 집어들면 심취하는 편이지만, 그렇다 해서 모든 글을 각별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뭐라 표현을 해야할지…) 유달리 문체가 마음에 드는 작가들이 있는데, 페르난두 페소아가 그러하고, 바로 이 글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그러하다. (그런 감성을 전달받기 위해서는 물론 번역도 중요하다) 일전에 톨스토이를 가장 좋아하는 작가, 『안나 카레리나』를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 한 적이 있는데,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 까닭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가 담고 있는 명징한 주제의식―변혁기의 19세기 러시아 사회에 대한 통렬한 문제의식과 인간 본성에 대해 예리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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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일상/book 2019. 1. 8. 21:42
나는 이 비참한 기억들을 거듭거듭 뒤적이며 나 자신에게 묻는다. 그때부터였을까. 내 인생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그 아득한 여름의 빛 속에서였을까. 아니면 그 아이를 향한 과도한 욕망은 나의 선천적 이상을 입증하는 최초의 사례에 지나지 않았을까? 나의 갈망, 동기, 행동, 기타 등등을 분석하려고 할 때마다 회고적 상상에 빠져들고 마는데, 그런 상상은 분석 작업에 무수한 대안을 제시하고, 그 결과로 마음속에 그려지는 인생역정 하나하나가 끝없이 가지를 치면 내 과거는 미칠 듯이 복잡해진다. 그러나 마법 때문이든 운명 때문이든 간에 롤리타는 애너벨에서 비롯되었다고 나는 믿는다.―p.24~25 이제 내가 돌로레스를 데려오지 않은 진짜 이유를 설명해야겠다. 처음에, 즉 샬럿이 제거된 직후 자유로운 아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