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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블라디미르 나보코프/문학동네>
나는 이 비참한 기억들을 거듭거듭 뒤적이며 나 자신에게 묻는다. 그때부터였을까. 내 인생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그 아득한 여름의 빛 속에서였을까. 아니면 그 아이를 향한 과도한 욕망은 나의 선천적 이상을 입증하는 최초의 사례에 지나지 않았을까? 나의 갈망, 동기, 행동, 기타 등등을 분석하려고 할 때마다 회고적 상상에 빠져들고 마는데, 그런 상상은 분석 작업에 무수한 대안을 제시하고, 그 결과로 마음속에 그려지는 인생역정 하나하나가 끝없이 가지를 치면 내 과거는 미칠 듯이 복잡해진다. 그러나 마법 때문이든 운명 때문이든 간에 롤리타는 애너벨에서 비롯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p.24~25
이제 내가 돌로레스를 데려오지 않은 진짜 이유를 설명해야겠다. 처음에, 즉 샬럿이 제거된 직후 자유로운 아빠가 되어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서 아까 만든 위스키소다 두 잔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다시 내가 좋아하는 '핀'까지 몇 잔 더 퍼마시고, 이웃과 친구들을 피해 화장실로 들어갔을 때, 내 마음과 핏줄 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따뜻한 그녀가, 갈색머리 그녀가, 나의, 나의, 나의 롤리타가 눈물을 뿌리며 내 품에 안기겠구나. 그 눈물이 미처 고이기도 전에 입맞춤으로 닦아줄 수 있겠구나. 그러나 내가 거울 앞에서 눈을 크게 뜨고 얼굴을 붉힐 때 존 팔로가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며 별일 없느냐고 물었고, 그 순간 나는 이렇게 그녀를 빼앗을 궁리만 하는 참견쟁이가 우글거리는 집에 롤리타를 데려오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음을 깨달았다.
―p.164
트랍이 내 사고방식과 습성에 맞춰놓은 단서를 알아차릴 탐정은 아무도 없다. 물론 그자가 진짜 이름과 주소를 남겨두었을 리 없다. 다만 치밀함이 지나쳐 언젠가는 제 발등을 찍어주기를, 예컨대 그가 필요 이상으로 대담해져 더욱더 흥미진진하고 의미심장한 자기만의 개성을 보여주기를, 혹은 부분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는 단서일지라도 양적으로 많아지면 이를 질적으로 종합할 수 있음을 간과하여 결국 너무 많은 사실을 드러내주기를 바랐다. 어쨌든 그자가 한 가지는 확실히 성공했다. 괴로워 몸부림치는 나를 자신의 사악한 유희에 끌어들인 것이다. 그는 흔들거리고 비틀거리다가도 절묘한 솜씨를 발휘하여 일견 불가능해 보였던 균형을 되찾았고, 그래서 나는 다음번에는 그의 정체를 알아낼지도 모른다는 밝은 희망을―이렇게 배신, 분노, 외로움, 두려움, 증오가 가득한 상황에 어울리는 말은 아니겠지만―한시도 잃지 않았다. 그러나 그 희망은, 아슬아슬하게 가까이 다가온 적은 있었지만 끄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눈부신 조명 아래 반짝이는 의상을 입은 곡예사가 팽팽한 밧줄 위를 조심스레 걸어가는 고전적 우아함에는 누구나 감탄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허수아비 같은 옷차림을 하고 축 늘어진 밧줄 위에 올라서서 비틀비틀 꼴사나운 고주망태 흉내를 내는 재주야말로 훨씬 더 진기한 달인의 경지가 아닌가! 나는 당해봐서 잘 안다.
―p.398
만약 롤리타를 잃은 충격 때문에 나의 소아성애증이 말끔히 치유되었다고 말한다면 나는 정말 나쁜 놈일 테고, 그 말을 믿는 독자는 바보일 것이다. 그녀를 향한 사랑이 어떻게 변하든 간에 천형 같은 이 성향은 결코 달라질 수 없다. 놀이터나 해변에서 나의 우울하고 교활한 시선은 여전히 내 의지를 거역하고 혹시 님펫의 팔다리가 눈에 띄지나 않을까 남몰래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내가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던 소망이 시들어버렸다. 언젠가 어느 외딴 곳에서 실물이든 가상이든 어떤 소녀와 더불어 행복을 누릴 가능성 따위는 이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어느 머나먼 가공의 섬, 후미진 해변에서 롤리타의 자매들에게 송곳니를 들이대는 장면을 상상하지도 않았다. 그런 시절은 끝났다. 그런데 이를 어쩌랴. 2년 동안 어마어마한 쾌락을 마음껏 누린 덕분에 욕망이 습관화되고 말았다. 그래서 늘 욕구불만을 느끼며 살아가야 했는데, 이러다가 학교와 저녁식사 사이에 어느 뒷골목에서 우연히 유혹과 마주치게 되면 갑자기 거침없는 광기를 부리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외로움은 나를 점점 부식시켰다. 친구와 관심이 절실했다. 내 심장은 걸핏하면 흥분해서 도무지 신뢰할 수 없는 기관이었다.
―p.412
사실 내가 미성년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어리고 수녈하고 요정 같은 금단의 소녀가 지닌 투명한 아름다움 때문이라기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초라한 현실과 나에게 약속된 위대한 이상―즉 위대하지만 영원히 실현할 수 없는 장밋빛과 잿빛의 미래―사이의 격차를 이렇게 무한한 완벽성으로 메워가는 상황이 안전하기 때문이라고 해야 더 정확하리라. 나의 창窓이여! 그날도 나는 아롱진 저녁놀과 차오르는 어둠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으드득 이를 갈아붙이며 내 욕망의 마귀들을 모조리 불러모아 흔들리는 발코니 난간으로 밀어붙였고, 마침내 이 난간이 살굿빛과 먹빛이 섞인 눅눅한 밤 풍경 속으로 떨어져내릴 찰나였다. 바로 그 순간 불빛 속의 이미지가 움직이더니 이브는 어느새 갈비뼈로 되돌아가고 창문 너머에는 속옷 차림으로 신문을 읽는 뚱뚱한 남자만 남아 있었다.
―p.423~424
덩굴처럼 뒤엉킨 내 마음속에 제멋대로 자라나던 크고 찬란한 죄는 어느새 줄어들어 고갱이만 남았다. 나는 이 삭막하고 이기적인 악덕을 버리고 저주했다. 여러분은 나에게 야유를 던지면서 당장 퇴정하겠다고 위협하겠지만, 내 입에 재갈이 물려 숨도 제대로 못 쉬게 되기 전까지는 나의 가련한 진실을 목청껏 외치며 온 세상에 널리 전하리라―나의 롤리타를, 이 롤리타를, 비록 핼쑥하고 더럽히고 다른 사내의 아이를 잉태했으나 여전히 눈동자는 잿빛이고 여전히 속눈썹은 거무스름하고 여전히 적갈색과 황갈색으로 빛나는 그녀를, 여전히 카르멘시타이며 여전히 나의 연인인 그녀를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p.447
"죽음이 두려운 건 완전히 혼자가 되기 때문이야." 그 순간, 자동인형처럼 기계적으로 다리를 움직이며 걷던 나는 문득 내가 그녀의 정신세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렇게 한심할 정도로 유치하고 진부한 표현의 이면에 감춰진 그녀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면 정원이 있고 황혼이 있고 궁전의 대문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이 어렴풋하고 아름다운 세계는 불결한 누더기 같은 몸뚱이를 지니고 비참한 발작에 시달리는 나 같은 인간에게는 금단의땅, 절대로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곳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그녀와 나는 완전한 악의 세계에서 살고 있어서, 내가 어떤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이를테면 그녀와 연상의 친구, 혹은 그녀와 부모 혹은 그녀와 건강한 진짜 연인, 혹은 나와 애너벨, 혹은 롤리타와 정화되고 분석되고 신격화된 숭고한 해럴드 헤이즈가 함께 나눌 만한 화제를 내놓을 때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서먹서먹해지는 것을 자주 느꼈기 때문이다. 선의로 말했건만! 그녀는 평소처럼 건방진 태도와 따분한 표정을 방패 삼아 상처받기 쉬운 마음을..
―p.457
속이 훌렁 뒤집힐 정도로 구역질을 하고 나서 바위에 걸터앉아 잠시 쉬다가, 향기로운 공기를 마시면 좀 도움이 될 듯싶어 고속도로와 낭떠러지 사이의 나지막한 돌담 쪽으로 걸어갔다. 길가에 시들어버린 잡초 틈에서 작은 메뚜기 몇 마리가 후드득후드득 튀어나와 도망쳤다. 아주 가벼운 구름 하나가 좌우로 팔을 벌린 채 조금 더 묵직해 보이는 구름을 향해 다가갔다. 그쪽에 모인 구름들은 하늘에 글씨를 쓰듯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왠지 마음을 끄는 절벽 쪽으로 접근할 때 발아래 펼쳐진 골짜기 사이에 자리를 잡은 조그마한 광산촌에서 문든 아름다운 화음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붉은색이나 회색 지붕을 덮은 건물들, 그 사이로 이리저리 지나가며 기하학무늬를 그려내는 찻길들, 동글동글 부풀어오른 초록색 나무들, 뱀처럼 구불구불한 시냇물, 광석처럼 화려하게 반짝거리는 시립 쓰레기장, 그리고 마을 너머에는 밝고 어두운 여러 빛깔로 조각조각 수놓은 퀼트 같은 들판, 그 사이로 종횡무진 뻗어나간 도로들, 더 멀리 저쪽에는 숲으로 뒤덮인 거대한 산맥 등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러나 이렇게 온갖 색상이 말없이 환호하는 듯한 풍경보다 더 화사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경치보다 더 밝고 꿈결처럼 아름다운 것은, 귀에 들리는 화음이었다. 온갖 소리가 모여 만들어내는 이 화음은 안개처럼 가물가물 흔들리면서도 한순간도 그치지 않고 이어지면서, 내가 더러워진 입가를 닦으며 우두커니 서 있는 화강암 절벽 언저리까지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나는 곧 이 모든 소리가 본질적으로 똑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자들은 일하러 나가고 여자들은 집을 지키는 이 마을에서, 구석구석 훤히 들여다보이는 이 마을의 골목골목에서, 지금 들려오는 소리는 오직 한 가지였다. 독자여! 내가 들은 그 소리는 바로 아이들이 노는 소리, 그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가냘프면서도 장엄한 소리, 아득히 멀지만 신기하리만큼 가깝게 들리는 소리, 진솔하면서도 신비롭고 거룩한 소리―여러 목소리가 안개처럼 뒤섞였지만 공기가 어찌나 맑은지 이따금 어떤 소리는 안개를 뚫고 나온듯 또렷하게 들려왔다. 까르르 터뜨리는 명랑한 웃음소리, 방망이로 공을 때리는 소리, 장난감 마차가 덜컹덜컹 굴러가는 소리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리가 너무 멀었으므로 실선처럼 좁다란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의 움직임을 육안으로 확인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렇게 높다란 산비탈에 서서 이 음악적인 진동에 귀를 기울이며 조용히 웅성거리는 듯한 배경음 속에서 산발적으로 터져나오는 외침 소리를 듣다가 문득 깨달았다. 무엇보다 절망적이고 가슴 아픈 것은 내 곁에 롤리타가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 아름다운 화음 속에 그녀의 목소리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p.494~495
형, 무언가가 많이 회자될 때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꼭 한 번쯤은 뉴욕이라는 도시에 가보고 싶었어. 나와 한 살 터울밖에는 나지 않는 친한 동생과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불쑥 얘기가 나왔다. 꽤 지난 일이기는 하지만 작년 여름이었던가 이 친구가 뉴욕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었다. '명성(名聲)'이라고 정의를 내리면 좋을까. 사람들에게 회자된다는 것, 또는 사람들의 입에 곧잘 오르내린다는 것이 그 대상의 진가를 반드시 증명해보이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스쳤다. 명성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뉴욕을 방문하는 것은,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도시의 이름이 파리보다 길기 때문에 가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만큼이나 개연성이 없는 선택이라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나는 다른 사람들이 가볼 만하다고 하는 곳, 꼭 가봐야 한다는 곳은 어쩐지 가기도 전부터 식상하게 느껴진다. 모름지기 여행이라 함은 여행지만큼이나 여행자의 접근법도 중요한 법.
여기까지는 지극히 개인적인 주관이고 사실 동생녀석의 말은 꼭 틀린 말이 아니다. 이 <롤리타>라는 작품을 집어든 것도 사실은 문제작으로 흔히 거론된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 묘한 점은 <롤리타>의 문장은 아니더라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라는 인물을 레퍼런스로 삼는 작품들이 많다는 사실. 이는 작품의 선정성을 두고 둘러싼 분분한 해석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천재적인 언어술―가히 언어술이라 부를 만하다―때문일 것이다. 여하간 그 동생의 말처럼 나도 이러쿵저러쿵 회자되는 이 작품이 궁금해서 책을 처음 집어들었던 것이 벌써 3년도 더 되었던 것 같다. 군복무를 하면서 영어공부를 하겠다고 원서를 구했는데, 중간에 자주 등장하는 프랑스어 때문에 몇 장 넘겨보지도 못하고 집안 책장에 쳐박아 두었다가, 근래 한국어판을 구해서 작년 12월부터 무려 한 달 넘게 시간을 끌며 책을 읽었다. 실제 영문으로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면 훨씬 다양한 의미를 추출할 수 있었을 것 같기는 하다. 사실 읽는 데 한 달 넘게 시간을 들일 만한 책은 아닌데, 연말 즈음해서 가족여행을 다녀오면서 체력이 방전되고 나니 한동안 독서는 뒷전에 밀려나 버렸었다. 여하간 배심원에게 선처를 구하는 1인칭 시점의 이 작품은 내용 자체는 굉장히 흡입력이 있다.
나보코프 자신도 험버트 험버트라는 인물을 빌려 말하지만, 화자(험버트)의 소아성애적 성향을 정상적인 상태로 간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악(惡)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독자의 입장에서 (채 몇 장 넘겨보지도 않았음에도) 험버트의 다듬어지지 않은 욕망을 들여다 볼 때에는 그저 경악스럽기만 하다. 아무래도 초반에는 험버트 본인의 소아성애적 성향에 대한 내적갈등이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고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도 충분히 무르익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소아성애'라는 소재만 부각되어 보인다. 하지만 험버트가 욕망의 수렁에 빠져들면서 겪는 번민, 주변인물과의 관계에서 겪는 서투른 감정, 자기자신에 대한 힐책, 롤리타에 대한 연민 (그럼에도 반복되는 성적 착취), 죄책감, 프로이트파(派) 정신분석학에 대한 반동(反動)을 따라가다 보면, '소아성애'라고 하는 소재도 소재이지만 기괴한 욕망에 사로잡힌 한 인간의 고뇌가 절절히도 느껴진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험버트라는 인물에 상당히 유대감을 느꼈는데, 내가 소아성애자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나 또한 마음 한구석 추한 욕망을 억눌러 두고 있는 한 인간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지킬이 되기 위해 노력할 뿐이지 내면에 하이드를 감추고 있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책 자체는 정말 재미있게 읽었지만 마땅히 발췌하고 싶은 글은 별로 없었거나, 때로 발췌하고 싶은 것은 몇 페이지에 걸쳐 쓰여진 장문이었다.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책의 가장 후반부에서 험버트가 어느 낭떠러지 옆에 주차를 해 둔 뒤 어떤 마을을 내려다 보는 장면이다. 험버트는 하늘 위 구름에서부터 시선을 좇아 산등성이를 더듬고 이내 마을의 인공물들을 마주한다. 그러나 막상 그가 감각하는 것은 시각적인 것이 아닌 청각적인 것이다. 바로 이 평화로운 풍경 속에 험버트가 있고 이것들을 바라볼 수 있는데, 이내 이 풍경이 제공하는 화음으로 감각의 초점을 옮겨 놓았을 때 그는 비로소 깨닫는다. 롤리타의 목소리가 빠져 있음을. 사랑에 사무쳐 소리의 부재에서마저 쓸쓸함을 느끼는 험버트라는 인물은 얼마나 가여운 자인가. 청각을 통해 사랑하는 마음을 묘사하는 참 멋진 대목이었다.
예술이냐 외설이냐 하는 해묵은 논쟁에 관하여, 개인적으로 나는 이 작품이 외설적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1할이 성적 기호나 유희에 다루고 있다면, 9할은 화자인 험버트의 시선, 감정, 문제제기에 관한 것이다. 물론 이 두 영역이 말끔하게 구분되지는 않기 때문에 다소 과장되게 비율을 나눈 점은 있지만, 이 책은 기본적으로 법정에 서면서 험버트가 배심원에게 읽힐 것을 염두에 두고 쓰인 글이다. 어떤 장면에서는 험버트가 강조하고 싶은 대목에서 호흡의 완급조절이 안 되기는 하지만, 오늘날 몇몇 현대소설에서 실험적으로 차용되고 있는 것만큼 적나라한 표현은 찾아보기 어렵다. 아마도 나보코프가 선정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보다 노골적인 표현이나 묘사를 도입했다면, <롤리타>라는 작품은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을 것이다. 여하간 이 책을 반환점 삼아 올해도 꾸준히 독서에 매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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