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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역사/나남/미셸 푸코>
올해 처음으로 남기는 북리뷰는 미셸 푸코의 저작이다. <말과 사물>을 통해 미셸 푸코의 글을 접한 뒤 대충 예상은 했지만, 마음에 드는 구절들을 갈무리한 지금도 그의 글을 제대로 이해한 것 같지가 않다. <말과 사물>의 서두에 그가 밝힌 것처럼 자신의 글이 자신의 손을 떠나 다른 이의 수중(手中)에 들어가는 순간 전혀 다른 텍스트가 된다고 했듯, 한참 부족한 나의 독서를 이해해줄까.
광기와 이성, 비(非) 광기와 비(非) 이성, 인간과 환경의 관계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아서, 두 개의 면인 듯 사실은 알고 보면 하나의 면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미셸 푸코는 역설하고 싶었던 것 같다. 단언(斷言)이 생략되어 있을 뿐, 미셸 푸코는 이 거대한 텍스트를 통해 '영원히 균형을 이룰 수는 없지만 바로 그 불안정한 상태의 지속이 일종의 균형점과 같다'는 사실을 '표현(表現)'한다.
흥미의 관점에서는 중세 이후로 광인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묘사하는 전반부가 재미있었는데, 보다 논리적이고 딱딱한 후반부에서 독서를 더욱 의욕적으로 한 것 같다. 바쁜 일상을 핑계로 차일피일 독서를 미뤄 왔는데 이 책을 계기로 꾸준히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광인은 빠져나갈 수 없는 배에 갇혀, 여러 갈래의 지류가 있는 강, 수많은 항로가 있는 바다, 모든 것 외부의 이 엄청난 불확실성에 내맡겨진다. 광인은 가장 자유롭고 가장 개방적인 길 한가운데에 갇혀 있는, 즉 끊임없이 이어지는 교차로에 단단히 묶여 있는 포로이다. 광인은 전형적 여행자, 다시 말해서 이동공간의 포로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광인이 자리를 잡을 때 그가 어느 지역에서 왔는지 모르듯이 광인이 닿을 지역을 알지 못한다. 광인은 그에게 속할 수 없는 두 지역 사이라는 그 볼모의 영역에서만 자신의 진실과 고향을 찾을 뿐이다.
p. 57
역설적이게도 이 해방은 의미의 급증, 의미 자체에 의한 의미의 증가에서 기인하는데, 이러한 의미의 증가에 의해 사물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들은 그토록 많고 그토록 중첩되어 있으며 그렇게 풍부해서, 그것들은 지식의 비의(秘義)를 통해서만 해독될 수 있고, 사물들은 과도하게 많은 속성, 지표, 암시 속에서 마침내 본래의 형상을 상실하기에 이른다. 의미는 더 이상 직접적 인식 속에서 해독되지 않고, 형성은 더 이상 스스로에 관해 말하지 않으며, 형상에 활기를 불어넣는 앎과 형상을 대체하는 형태 사이에는 빈틈이 생긴다. 형상은 몽환(夢幻)에 대해 자유롭다.
p. 68
18세기 말에도 여전히 우리는 광기를 구빈원의 벽들 사이에서 발견하게 된다. 광기에 대한 새로운 이해방식이 생겨났다. 이 이해방식은 더 이상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다. 중세의 인간적 풍경 안으로 광인이 친숙하게 나타난 것은 광인이 다른 세계로부터 온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광인은 도시민들의 질서에 관련된 ‘통치’ 문제의 바탕 위에서 뚜렷하게 부각되는 존재가 된다. 예전에 광인이 사회에 받아들여진 것은 그가 다른 곳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광인이 배제되는 까닭은 그가 바로 이곳에서 생겨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 사실 광인은
p. 141
무위도식은 반항, 어떤 점에서는 가장 나쁜 반항이다. 왜냐하면 무위도식은 자연이 태초의 무고한 상태처럼 비옥하기를 기대하고 아담 이래 인간이 요구할 수 없는 호의를 하느님에게 강요하고 싶어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타락 이전에는 오만이 인간의 죄였지만, 무위도식의 죄는 일단 타락한 인간이 내보일 수 있는 최고의 오만, 비참에서 기인하는 가장 우스꽝스러운 오만이다. 대지가 가시덤불과 무성한 잡초만 잘 자라게 되어 있는 우리의 세계에서 무위도식은 가장 나쁜 죄이다.
p.155
사실상 수용의 역할은 부정적 배제였을 뿐만 아니라 긍정적 조직화이기도 했다. 통일성, 일관성, 기능성을 갖춘 경험영역이 수용의 관행과 수용의 규칙에 의해 구성되었다. 이전의 문화에서는 아무런 유사성도 지각되지 않았던 인물들과 가치들이 통일적 영역 안에서 서로 근접되었다. 이러한 인물들과 가치들이 수용을 통해 광기 쪽으로 옮겨졌다. 이와 동시에 이러한 인물들과 가치들이 정신이상의 소속영역에서 이미 통합된 것으로 지정될 경험, 우리의 경험이 준비되었다. 이와 같은 접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윤리계통의 재편, 선과 악, 인정되는 것과 정죄되는 것 사이의 새로운 분할선, 그리고 사회통합을 위한 새로운 규범의 확립이 필요했다. 수용은 고전주의 문화 전체와 일체를 이루는 이 근본적 작업의 현상일 따름이다.
p. 171
징벌과 치료의 이와 같은 혼동, 처벌하는 행위와 치료하는 행위의 이러한 준(準) 동일성이 합리주의에 의해 가능해졌다는 것은 정말로 기이한 일이다. 의학과 도덕이 분명하게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가운데, 영원한 징벌에 관한 예상(豫想)이자 동시에 건강의 회복을 위한 노력일 수 있는 어떤 치료가 합리주의에 전제되어 있는 셈이다.
p. 177
고전주의 시대가 성병, 동성애, 방탕, 낭비벽과 함께 이전 시대의 도덕으로 정죄될 수는 있었지만 가깝게건 멀게건 광인과 동일시하지는 않았던 그러한 성적 자유를 표현하는 모든 사람을 수용하던 때에, 기묘한 도덕혁명이 일어났다. 즉, 고전주의 시대는 비이성을 오랫동안 서로 대단히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경험들의 공통분모로 발견한 것이다. 고전주의 시대는 광기를 중심으로 일종의 유죄성의 분위기를 형성하면서 일단의 단죄될 행동 모두를 하나의 범주로 묶었다. 정신병리학은 정확히 말해서 고전주의와 나란히 이루어진 이 모호한 예비작업 덕분으로 성립된 것이므로, 좋은 패를 들고서 정신병에 섞인 이 유죄성(有罪性)을 재발견하게 된다. 그만큼 광기에 관한 우리의 과학 및 의학 지식은 은연중에 비이성에 대한 윤리적 경험의 앞선 성립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p. 185
수용의 용도를 살펴보면 사상의 자유형태와 이성의 모습이 비이성과 연결되는 기묘한 사상의 변동을 감지할 수 있다. 17세기 초에 자유사상은 생겨나고 있는 중인 합리주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성 자체의 내부에 비이성이 있다는 사실 앞에서의 불안이었고, 작용점(作用點)이 한계 속에 있는 인식이 아니라 이성 전체인 회의주의였다. “사리를 잘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 전체는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고, 우리의 인식은 바보짓일 뿐이며, 우리의 확신은 가공(架空)의 이야기일 뿐이다. 요컨대 이 세상 전체는 소극(笑劇)이나 영원한 희극일 뿐이다.” 감각과 광기를 확실하게 구별하는 것을 결코 가능하지 않다. 감각과 광기는 함께 주어지고 불가해한 통일성 속에서 무한히 하나가 다른 하나로 통할 수 있다.
p. 196
의학의 도움을 받아 광기의 한계와 형태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공들여 구상된 법적 광기론, 그리고 광기를 거칠게 이해하고 탄압을 위해 이미 준비된 수용형태를 이용할 뿐만 아니라 사법적 중재를 위해, 그리고 사법적 중재에 의해 마련된 구별방식을 충실하게 준수하려고 하지 않는 사회적이고 거의 공안적(公安的)인 실천, 이 양자 사이의 괴리(乖離)만이 있는 듯하다. 사람들은 언뜻 보아 이 괴리를 완전히 정상적인 것으로, 어쨌든 매우 통상적인 것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법적 의식의 정상적 전개에 이바지하는 구조보다, 또는 법적 의식의 구현으로 보이는 제도보다 법적 의식은 더 치밀하고 더 섬세한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수용의 실천이 정립되기 전에,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교회법과 오래 지속하는 로마법을 통해 성립된 법적 광기의 의식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치밀하게 가다듬어졌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괴리는 결정적 중요성과 특별한 가치를 갖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수용의 실천을 침해하지 않는다. 이 의식과 수용의 실천은 서로 다른 두 세계에 속한다.
p. 239
하나는 주체성의 제한 같은 것으로, 개인이 지닌 능력의 한계를 정하고 개인의 무책임 영역을 획정하는 선(線)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정신이상은 이중의 움직임에 의해, 즉 광기의 자연적 움직임과 주체를 후견인(後見人)으로 대표되는 일반적 타자의 권력에 종속시키는 금치산 선고(宣告)의 법적 움직임에 의해 주체의 자유가 박탈되는 과정을 나타낸다. 정신이상의 다른 형태는 이와 반대로 광인이 사회에 의해 이방인으로 인식되는 의식화를 가리킨다. 이 경우에 광인은 책임을 면제받지 못하고 적어도 친족과 이웃사람 사이의 공모(共謀) 아래 도덕적 죄의식을 뒤집어쓰며 타자로, 국외자로, 배제된 자로 지칭된다. ‘심리학적 정신이상’이라는 몹시 기이한 개념, 다른 성찰영역에서라면 애매한 요소들로 풍요롭게 될 수 있을 터인데도 그 불확실한 요소들로부터 득을 보지 못하고 그저 정신병리학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평가될 이 개념은 사실상 정신이상에 대한 이 두 가지 경험, 다시 말해서 타자의 권능 아래로 떨어지고 타자의 자유에 얽매인 존재와 관련되는 첫 번째 경험과 타자가 되고 사람들 사이의 다정한 유사성과 무관하게 된 개인과 관련되는 두 번째 경험의 인간학적 혼동일 따름이다. 하나는 질병의 결정론에 가깝고 다른 하나는 오히려 윤리적 정죄(定罪)의 모습을 띤다.
p. 246
고전주의 시대가 광기와 과오, 정신이상과 악의(惡意) 사이의 분할에 대립시키는 듯한 이러한 무차별 상태에 놀라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무차별 상태는 이것들에 관한 앎이 아직 세련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신중하게 선택되고 합당하게 상정(想定)된 이것들 사이의 등가성(等價性)에서 기인한다. 광기와 범죄는 서로를 배제하지 않지만, 불분명한 개념 속에서 뒤섞이지도 않는다. 광기와 범죄는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취급하게 되는 의식의 내부에서, 그리고 감옥이나 구빈원에 의해 강요되는 상황에 따라 서로 관계를 맺는다.
p.252
수용은 비이성을 숨기고, 비이성이 불러일으키는 수치를 드러내지만, 광기를 명백히 보여주고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들은 무엇보다 먼저 추문을 피하려는 생각을 하지만, 그 다음으로 곧장 추문을 조직화하는데, 이것은 정말 이상한 모순이다. 고전주의 시대는 비이성의 전반적 경험 속에 광기를 숨기고,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정말로 개별화되었던 광기의 특이한 형태들을 비이성의 모든 형태의 광기가 무차별적으로 인접해 있다는 일반적 두려움 속으로 흡수한다. 이와 동시에 이러한 두려움으로 인해 동일한 광기에 특별한 표지, 즉 질병이 아니라 고양된 추문이라는 표지가 붙는다. 그렇지만 18세기에 이루어진 광기의 이러한 조직적 표출과 광기가 자유롭게 모습을 드러내던 르네상스 시대의 분위기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도 없다. 그때에 광기는 도처에 현존했고, 이미지나 위험을 통해 모든 경험에 섞여 들었다.
p. 267
광기를 존중한다는 것은 광기에서 질병이라는 무의지적이고 불가피한 사고(事故)를 간파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진실의 그 하부한계, 우발적이지 않은 본질적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죽음이 시간의 측면에서 인생의 끝이듯이, 광기는 동물성의 측면에서 인생의 종말이다. 그리고 죽음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거룩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광기는 가장 야만적 면모를 통해 거룩하게 되었다.
p.281
광인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타자이다. 즉, 보편적인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예외적인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타자이다. 내재성(內在性)의 모든 형태는 이제 쫓겨난다. 광인은 명증한 존재이지만, 광인의 모습은 외부공간에 뚜렷이 부각되고 광인을 규정하는 관계는 전적으로 합리적 주체의 견지에서 객관적 비교작용을 통해 광인을 드러나게 한다. 광인과 “저 사람은 광인이다”라고 선언하는 주체 사이에 거리가 넓어지는데, 이것은 더 이상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의 데카르트적 공백이 아니라, 이중의 충만한 타자성 체계에 의해 점유되어 있는 것이다. 즉, 이제부터 표지들로 온통 채워지고, 따라서 측정할 수 있고 가변적인 거리이다.
p. 316
이 담론은 정신에 고유한 진실 속에서 정신이 붙드는 무언(無言)의 언어이자, 동시에 육체의 움직임으로 눈에 보이게 되는 유기적 결합이다. 우리가 광기에서 표면화하는 것을 살펴본 영혼과 육체 사이의 병행관계, 상보성(相補性), 직접적 소통의 모든 형태는 이 언어에만 종속되어 있을 뿐이고 이 언어의 영향력에 의해 좌우된다. 부서지고 스스로에 등을 돌릴 때까지 지속되는 정념의 움직임, 이미지의 분출, 그리고 이미지의 분출과 눈에 띄게 병행하던 육체의 동요,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복원하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미 이 언어에 의해 은밀히 생동하고 있었다. 이미지에 의해 빚어지는 환상 속에서 정념의 결정조건 전체가 초월되었고 흩어졌고, 그 대신에 확신과 욕망의 세계 전체가 이미지에 의해 이끌려 들어왔다면, 이는 정신착란의 언어, 이를테면 정념을 모든 한계에서 해방시키고 단어의 강압적인 무게 전체로 풀려 나오는 이미지에 들러붙는 담론이 이미 현존해 있었기 때문이다.
p. 395
광기가 현혹이라고 말하는 것은 광인이 이성인과 똑같이 빛을 본다고 말하는 것이지만(둘 다 동일한 빛 속에서 살아간다), 광인은 빛을 보면서, 빛만을 보면서, 그리고 빛 속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서, 빛을 공백으로, 어둠으로, 무로 본다. 광인에게 암흑(暗黑)은 빛을 지각하는 방식이다. 이는 광인이 어둠과 어둠의 무를 보면서 전혀 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본다고 생각하면서 상상력의 환상과 수많은 어둠을 현실로서 다가오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정확히 진실과 빛이 근본적 관계를 맺고서 고전주의적 이성을 구성하는 것처럼, 정신착란과 현혹은 광기의 본질을 이루는 관계 안에 있는 것이다.
비이성과 이성의 관계는 현혹과 눈부신 빛 자체의 관계와 동일하다. 이것은 은유가 아니다. 우리는 고전주의 시대의 문화 전체를 북돋우는 중요한 우주론의 중심에 이른 셈이다. 의사소통과 내적인 상징체계의 측면에서 그토록 풍요롭고 천체(天體)들의 교차되는 영향력에 의해 전적으로 지배된 르네상스 시대의 ‘우주’는 이제 사라졌으며, 이 와중에서 ‘자연’은 보편성의 지위를 얻지 못했고 인간에 의해 서정적으로 인정받지도, 인간을 계절의 리듬에 따라 인도하지도 못했다. 고전주의 작가들이 ‘세계’로부터 끌어내는 것, 그들이 ‘자연’에 대해 이미 예감하는 것은 지극히 추상적이지만, 가장 생생하고 가장 구체적인 대립, 곧 ‘낮과 밤’의 대립을 형성하는 법칙이다. 이것은 더 이상 행성의 필연적인 시간이나 계절의 서정적 시간이 아니라, 빛과 어둠의 보편적이지만 절대적으로 분할된 시간이다.
모든 변증법과 모든 화해(和解)를 배제하고, 따라서 인식의 단절 없는 통일성과 동시에 비극적 삶의 타협 없는 분할에 근거를 제공하는 법칙, 이것은 황혼(黃昏)없는 세계, 어떤 감정의 토로도 서정성(抒情性)에 대한 가벼운 배려도 없는 세계를 지배하고, 모든 것은 각성상태 아니면 꿈, 진실 아니면 어둠, 존재의 빛 아니면 어둠의 무(無)이게 되어 있다. 이것은 진실을 가능하게 하고 진실을 결정적으로 봉인(封印)하는 불가피한 질서, 차분한 분할을 규정한다.
p. 404~405
비극과 비극의 엄숙한 언어 정면에 광기의 어수선한 웅성거림이 놓인다. 거기에서도 분할의 커다란 법칙은 침해되었고, 그림자와 빛은 비극의 무질서 속에서처럼 발광(發狂)의 격노 속에서 서로 섞인다. 그렇지만 다른 방식으로 섞인다. 비극의 작중인물은 밤의 어둠 속에서 낮의 암담한 진실 같은 것을 찾아내곤 했는데, 가령 이탈리의 밤이 이미 동터오는 낮의 진실을 예고했듯이, 트로이의 밤은 여전히 앙드로마크의 진실이었다. 밤은 역설적으로 베일을 벗겼고, ‘존재의 가장 깊은 낮’이었다. 광인은 거꾸로 빛 속에서 어둠의 일관성 없는 형상만을 만날 뿐이고, 빛이 꿈의 모든 환상으로 흐려지도록 하며, 그의 낮은 ‘가극’의 인간은 페드르처럼 가차없는 태양의 면전(面前)에 밤의 모든 비밀을 내던지므로, 다른 어떤 인간보다도 더 깊이 존재 속으로 들어가고 존재의 진실을 지니게 되는 반면에, 미친 사람은 존재로부터 완전히 배제된다. 밤의 비존재에 낮의 허망한 반영을 제공하는 미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을까?
p. 406
모든 치료는 실천임과 동시에 치료 자체와 질병에 대한, 그리고 치료와 질병 사이의 관계에 대한 자발적 반성(反省)이다. 이제 결과는 확증된 사실일 뿐만 아니라 경험이기도 하며, 의학이론은 시도(試圖) 속에서 활기를 띤다. 어떤 것이 열리고 있는 중인데, 오래지 않아 그것은 임상(臨床)의 영역이 될 것이다.
p. 504
광기는 오류와 결함으로서, 부도덕임과 동시에 고독이고, 세계와 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죄악 속에 갇혀 있다. 광기의 이중적 무(無)는 광기가 죄악이라는 비존재의 가시적 형태이고, 정신착란으로 채색된 겉모습과 공백(空白) 속에서 오류의 비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광기는 진실의 현존 가능성이 전혀 없는 주관성의 점점 희미해지는 지점이 아니라면 무이므로 완전히 ‘순수’하고, 광기라는 이 무가 죄악의 비존재이므로 완전이 ‘불순’하다.
p.514
그때 광기의 승리는 이중의 회귀(回歸)를 통해 또 다시 예고되는데, 하나는 광기의 소유를 통해서만 확실성을 보장받을 뿐인 이성 쪽으로 비이성이 역류(逆流)하는 움직임이고, 다른 하나는 “광인이 아니라는 것은 다른 광기의 양상에 의해 광인이라는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할 때처럼 광기와 이성이 서로 한없이 내포되는 경험 쪽으로의 재상승(再上昇)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내포관계는 중세 말과 르네상스 시대에 서양의 이성을 위협하던 것과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 이것은 이제 상상적 요소로 말미암아 결국 여러 세계의 환상적 혼합과 같은 것이 되곤 한 그 모호하고 접근 불가능한 영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귀속관계의 돌이킬 수 없는 취약성, 소유를 통해 자체의 존재를 찾는 이성이 소유에 얽매이게 되는 즉각적 전락(轉落)을 보여준다. 즉 ‘이성은 비이성을 소유하는 움직임 자체 속에서 자주성을 잃게 된다.’
p.549
환경은 계절이 다시 오고 낮과 밤이 교대하는 시간을 뒤엎고, 상상적인 것의 과잉에 따라서만 조절될 뿐인 감성을 뒤흔들어 놓음으로써, 감성적인 것과 이것이 인간에게 불러일으키는 잔잔한 반향을 변질시키며, 인간을 직접적 만족에서 멀어지게 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욕망의 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이해타산의 법칙에 인간을 종속시킨다. 환경은 인간세계로부터 자연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바로 거기에서 시작된다. ···환경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제공되는 그러한 자연의 실증성이 아니라, 반대로 자연의 충만함을 살아있는 사람으로부터 물러나게 하는 그러한 부정성이고, 이러한 물러남 속에서, 이러한 비(非) 자연 속에서 어떤 것이 자연을 대체하는데, 그것은 인위적 충만함, 반(反)자연이 예고되는 가공(架空)의 세계이다.
p. 585~586
옛날에 광기가 맹렬한 위세를 떨치면서 인간에게로 침입할 수 있는 통로지점은 짐승의 은밀한 현존에 있었으며, 자연스러운 생활의 가장 깊은 최종 지점은 이를 테면 인간의 본성이 반자연에 속하므로 반자연이 고양(高揚)된 지점이었고 동시에 인간 본성 자체의 반자연이었다. 18세기 말에는 반대로 동물의 평온이 전적으로 자연의 행복에 속하고, 인간은 바로 동물의 세계를 벗어나 환경을 형성하는 순간에 반자연의 가능성에 빠져들고 스스로 광기의 위험에 노출된다. 동물은 미칠 수가 없거나, 적어도 광기를 야기하는 것은 인간 속의 동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말할 것도 없이 모든 인간 중에서 원시인은 광기의 성향이 가장 작다.
p. 586~587
아버지 세대의 가치를 더 이상 지니고 있지 않는 아들, 그리고 동시대인들의 광기 속에서 비법이 상실되는 옛 지혜에 대한 향수(鄕愁)는 명백히 그리스-라틴 문화의 가장 전통적 주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 주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여전히 비판에만 토대를 두고 있을 뿐인 도덕관념이다. 즉, 역사의 인식이 아니라 역사의 거부(拒否)이다. 반대로 18세기에는 쇠퇴의 그 비어 있는 지속이 구체적 내용을 부여받기 시작한다. 즉, 도덕적 단념(斷念)의 비탈을 따라서가 아니라, 인간적 환경의 세력선(勢力線)이나 육체적 유전법칙을 따라 퇴보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퇴보하는 것은 이제 아득한 옛날의 것에 대한 기억처럼 충만한 시간을 잊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과거가 전체화되고 생활에서 자연의 직접성이 떨어져 나가게 되면서, 육체에 새겨지는 시간이 옛 것으로 무거워질 뿐만 아니라 더 급박하고 더 현재적이게 되기 때문이다.
p. 589
19세기에 인간은 광기에 대한 새로운 관계, 어떤 점에서 더 직접적이고 또한 더 외적인 관계를 정립한다. 고전주의 시대의 경험에서는 인간이 오류를 통해 광기와 소통했다. 다시 말해서 광기에 대한 의식이 진실의 경험을 필연적으로 내포했다. 광기는 전형적 오류, 진실의 절대적 상실이었다. 18세기 말에는 새로운 경험의 일반적 윤곽이 점점 뚜렷해지는데, 그 새로운 경험에 의하면 인간은 광기 속에서 일반적 진실이 아니라 ‘자신의’ 진실을 상실하는데, 이는 더 이상 세계의 법칙이 인간에게서 벗어나는 사태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본질에 관한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p. 595
없앨 수 없기 때문에 필연적인 가난의 측면은 또한 풍요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곤궁한 계급은 노동을 하고 덜 소비하기 때문에 국가를 부유하게 해주고 국가의 전답(田畓)과 식민지와 광산을 개척할 수 있게 해준다. 요컨대 가난한 사람이 없는 국민은 가난할 것이다. 궁핍은 국가에 필수적 요소가 된다. 궁핍에는 사회의 가장 은밀하나 가장 실제적인 활기(活氣)가 감추어져 있다. 가난한 사람은 국민국가(國民國家)의 토대 겸 영광을 형성한다.
p. 635~636
노동은 파괴하면서 생산한다. 이를테면 사회에 바람직하지 않은 노동자의 죽음 자체에서 사회에 필요한 것이 생겨난다. 인간의 불안하고 위험한 삶은 대상의 온순함 속으로 옮겨갔고, 그 무분별한 생활방식의 모든 불규칙성은 대리석의 그 매끄러운 표면에서 마침내 균등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고전주의적 수용의 주체는 절정(絶頂)의 완벽성에 도달한다. 즉, 피수용자는 죽을 때까지만 배제되지만, 그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내딛는 걸음걸음은 완벽한 가역성(可逆性) 속에서, 그를 추방한 사회의 행복에 유용한 것이 된다.
p. 665
수용은 공식적으로 의료활동의 위엄(威嚴)을 띠게 되었고, 수용의 공간은 광기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깨어 있었고 막연하게 보존되었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광기가 일종의 토착적(土着的) 매커니즘에 의해 저절로 제거되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점에서 자유의 장소가 되었다.
중요한 것은 수용시설의 정신병원으로의 이러한 변모가 의학의 점진적 도입, 외부로부터 도래하는 일종의 내습(來襲)에 의해서가 아니라, 고전주의 시대가 배제와 처벌의 기능만을 부여한 그 공간의 내부적 재편성에 의해 실현되었다는 점이다. 비이성의 다른 모든 형태가 점차로 수용시설에서 풀려났는데도, 수용을 광기에 대해 이중으로 특별한 장소, 광기의 진실이 드러나는 장소 겸 광기의 소멸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만든 것은 수용이 갖는 사회적 의미의 점진적 변화, 탄압에 대한 정치적 비판과 빈민구제에 대한 경제적 비판, 광기에 대한 수용의 비판 영역 전체의 전유(專有)이다. 이에 따라 수용의 공간의 광기의 행선지(行先地)가 되고, 이제부터 수용과 광기의 관계는 필연적이게 된다. 그리고 가장 모순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던 기능, 이를테면 미치광이에 의해 야기될 수 있는 위험으로부터 보호와 질병의 치유, 이 두 기능의 조화 같은 것이 마침내 느닷없이 생겨난다. 즉, 수용의 작용에 의해서만 단번에 광기의 진실이 표명되고 광기의 본질이 풀려날 뿐인 것은 수용의 비어 있는 공간에서이므로, 공공(公共)의 위험은 사라지게 되고 질병의 징후는 소멸하게 된다.
p. 676~677
광인과 비광인은 맨 얼굴로 서로에 대해 현존한다. 그들 사이에는 시선에 의해 직접적으로 헤어려지는 거리를 제외하면 더 이상의 간격이 없다. 그러나 이 거리는 감지되지 않기 때문에 아마 한층 더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 될 것이고, 수용시설에서 획득된 자유나 거기에서 진실과 언어를 붙잡을 가능성은 사실상 광기에 대해 인식상의 지위를 부여하는 동향의 다른 측면일 뿐이다. 즉, 최근까지도 광기를 인식되자마자 내몰린 형상으로 만들었던 모든 마력을 이제 광기는 주변의 시선 아래 박탈당하고, 바라보아지는 형태 또는 언어에 의해 포위되는 사물이 된다. 요컨대 광기는 대상이 된다. 그리고 수용의 새로운 공간은 광기와 이성을 혼합 거주지 안에 모아놓을 정도로 가까이 접근시킨다 해도, 그것들 사이에 훨씬 더 가공할 거리와 다시는 뒤집히지 않을 균형을 확립하며, 이에 따라 광기는 합리적 인간이 광기를 위해 마련하는 세계에서 아무리 자유롭다 해도, 그의 정신과 감정에 아무리 가깝다 해도, 합리적 인간에게 대상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합리적 인간이 영위하는 삶의 언제나 임박한 이면이 아니라, 사물들의 연쇄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 비이성의 형태에 대한 광기의 옛 예속화보다 더 깊이, 그리고 더 분명하게 광기를 통제하는 것은 바로 객관성으로의 이러한 전략이다. 수용은 새로운 양상 속에서 정말로 자유의 호사(豪奢)를 광기에 제공할지 모른다. 즉, 광기는 이제 노예와 같고 가장 강력한 힘을 빼앗긴 것이다.
p. 684~685
시민은 이중의 의미에서 보편이성이다. 즉, 시민은 인간 본성의 직접적인 진실이고 모든 법제(法制)의 척도일 뿐만 아니라 비이성이 이성과 분리되는 기준이며, 그가 갖는 의식의 가장 자발적인 형태, 그가 모든 이론적이거나 사법적인 착상(着想) 이전에 단번에 내리게 되는 판단에 비추어볼 때, 분할의 장소이자 동시에 분할의 수단 겸 판단자(判斷者)이다. ···고전주의 시대의 인간도 역시 모든 앎에 앞서 직접적 단순파악을 통해 광기를 식별했지만, 그때에는 인간의 정치적 권리가 아니라 인간의 양식(良識)이 자연발생적으로 발휘되었고, 사실상의 차이를 논평 없이 판단하고 인식하는 것은 바로 인간으로서의 인간이었다. 이제 시민은 광기를 상대하면서 근본적 권력을 행사하는데, 그러한 권력은 시민으로 하여금 ‘법률인’이면서 동시에 ‘통치인’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자유인(自由人)은 부르주아 국가의 유일한 주권자로서 광기의 첫 번째 판단자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구체적 인간, 곧 일상인은 고전주의 시대가 중지시켰던 그러한 접촉을 광기와 다시 갖게 되지만, 주권의 이미 주어진 형태와 권리의 절대적이고 조용한 행사 속에서 대화도 대면도 없이 그러한 접촉을 재개한 것이다.
p. 687
처음 보기에 ‘의식화(意識化)’와 관련된 듯한 작업. 즉, 광기에 고유한 문제의식 속에서 마침내 표적이 된 광기. 아직도 이 의식화에 충만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갑작스러운 발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오랜 포위(包圍)이다. 마치 이 ‘의식화’에서는 ‘점령’(占領)이 ‘정찰’(偵察)보다 훨씬 더 중요하기라도 한 듯하다. 역사상 시기가 정해진 어떤 의식의 형태가 광기를 낚아챘고 광기의 방향을 제어했다. 이 새로운 의식이 광기에 자유와 실증적 진실을 복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옛 속박의 소멸 때문일 뿐만 아니라 실증적 과정의 두 가지 계열 사이에 균형이 생겨난 덕분이기도 한데, 하나는 규명(糾明), 구출(救出), 그리고 굳이 말하자면 해방과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이 아주 가까이에서 광기를 다시 발견하는 순간에 광기로부터 벗어나고 보호받도록 해주는 새로운 보호의 구조를 서둘러 구축하는 것이다. 이 두 계열은 서로 대립하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는 상호의 보완 이상의 작용을 하며 하나의 동일한 것, 이를테면 ‘처음부터 소외시키는 구조 속에서 광기를 인식으로 넘겨주는’ 행위의 수미일관(首尾一貫)한 통일성일 따름이다.
p. 705
그러니까 사슬이 풀리고, 광인이 해방된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 광인은 이성을 회복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즉, 이성이 그 자체로서 저절로 다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광기 아래 오랫동안 잠들었다가, 완벽하게 정상적인 모습으로 변질도 머뭇거림도 없이 단번에 우뚝 솟아오르는 것은 바로 완전한 사회적 범주들이다. 마치 광인이 사슬로 매어 있던 야수성에서 풀려나고는 ‘사회적 유형’ 속에서만 인간성을 되찾을 뿐인 듯하다.
p. 733
신체의 속박은 매 순간 고독(孤獨)의 극한에 이르는 자유로 대체되고, 정신착란과 모욕의 대화는 다른 사람들의 침묵 속에서 고갈되는 언어의 독백(獨白)으로 대체되며, 자만심과 모독의 공연(公演) 전체는 냉담으로 대체한다. 그때부터 지하독방에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을 때보다 더 실질적으로 감금되고 자기 자신만의 수인(囚人)이 되는 그는 과오의 범주에 속하는 자신과의 관계와 치욕의 범주에 속하는 타인과의 비(非)관계에 붙들린다. 누명을 벗은 다른 사람들은 더 이상 박해자(迫咳者)가 아니고, 죄의식은 광인이 자신의 자만심에만 현혹되었을 뿐이라는 것을 그에게 보여주면서 내면화된다. 적대적인 얼굴들은 사라지고, 이제 그는 적대적 얼굴들의 현존을 시선이 아니라 관심의 거부로, 외면하는 시선으로 느끼며, 그에게 다른 사람들은 그가 나아감에 따라 끊임없이 뒤로 물러서는 한계일 뿐이다. 쇠사슬에서 풀려난 그는 이제 침묵의 힘에 의해 과오와 치욕에 꼼짝없이 묶인다. 예전에는 자신이 처벌받고 있다고 느꼈고 이러한 느낌을 통해 자신이 결백함을 내심(內心)으로 확신할 수 있었으나, 모든 물리적 징벌에서 해방된 지금은 자신이 유죄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에게 체벌(體罰)은 영광이었던 반면에, 해방은 굴욕감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있다.
p. 758
‘은거처’에서 광인은 주시되었고, 자기 자신이 보여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광인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비스듬하게만 파악할 수 있게 해줄 뿐인 이러한 직접적 시선을 제외한다면, 광기는 자체에 대해 직접적 영향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광기는 스스로를 보게 되고 스스로에 의해 보여지게 된다. 이를테면 바라봄의 순수한 대상임과 동시에 바라봄의 절대적 주체이게 된다.
p. 759
의사의 개입은 의사만이 보유하고 일단의 객관적 지식에 의해 정당화될 앎이나 의료권력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보호시설에서 ‘호모 메디쿠스’가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은 학자로서가 아니라 현자(賢者)로서이다. 의사직(醫師職)이 요구된다 해도, 이는 과학의 요청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과 도덕의 보증으로서이다.
p. 768
자유는 광인이 미치게 되는 이유이자, 광기가 아직 주어지지 않는 가운데 광인이 비(非)광기와 소통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광인은 자기 자신과 광인이라는 자신의 진실에서 벗어나면서, 진실도 결백도 아닌 영역에서 과오나 범죄 또는 우스꽝스러운 행동의 위험과 다시 만난다. 매우 근원적이고 매우 모호하며 매우 지정하기 어려운 출발과 분할의 시기에 광인으로 하여금 ‘총칭적’ 진실을 포기하게 만드는 이 자유는 광인이 언젠가는 ‘자신의’ 진실에 사로잡히는 것을 방해한다. 광인은 자신이 광인이라는 진실 속에서 자신의 광기가 고갈되지 않음에 따라서만 미친 사람일 뿐이다. 그래서 고전주의 시대의 경험에서 광기는 ‘약간’ 범죄적이고 ‘약간’ 가장된 것이며 동시에 ‘약간’ 부도덕하고 ‘약간’ 이성적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유의 혼란이나 아주 낮은 단계의 착상(着想)이 아니라, 매우 일관성 있는 구조의 논리적 결과일 뿐이다. 즉, 광기는 비(非)진실의 자유로운 공간에서 자체로부터 빠져나오고 이런 식으로 진실로서 구성되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으나 매우 필연적인 순간부터만 가능할 뿐이다.
p. 781~782
인간은 ‘광기’의 가능성이 있음에 따라서만 자기 자신에 대해 ‘자연’이 될 뿐이다. 광기는 객관성으로의 자연발생적 이행으로서, 인간의 대상화(對象化)를 성립시키는 근본적 계기이다.
지금 우리는 고전주의 시대의 경험과 극단적으로 대척적(對蹠的)인 지점에 도달해 있다. 광기는 오류의 비존재와 이미지의 무(無) 사이에서 일어나는 순간적 접촉일 뿐이었으므로 객관적 파악에서 벗어나는 차원을 언제가 간직하고 있었고, 광기의 가장 구석진 본질을 추적함으로써 광기의 최종적 구조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 문제였을 때, 사람들은 광기를 표명하기 위해, 정신착란의 완벽한 논리 속에서 전개된 이성의 언어만을 찾아냈을 뿐이며, 그러한 이성의 언어는 광기를 접근 가능하게 만들었고 광기를 광기로 인식하면서 교묘히 광기를 모면했다. 이제 인간은 광기를 통해, 이와는 반대로 자신의 이성 속에서도 자기 자신의 눈에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진실이 될 수 있기에 이른다. ‘인간’에서 ‘참된 인간’으로 이르는 길이 ‘미친 인간’을 통과하는 셈이다.
p. 797~798
인간과 광인은 상호적이면서도 양립할 수 없는 진실의 만질 수 없는 끈으로 이어져 있고,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사라지는 그들의 이러한 근본적 진실을 서로 말한다. 어둠은 빛을 불러들였지만, 빛은 어둠을 찢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어둠의 그토록 참혹한 모습을 드러나게 했는데, 이제는 각각의 빛이 스스로 탄생시킨 밝음으로 인해 꺼지고, 그리하여 어둠 속으로 되돌아가기에 이른다. 오늘날 인간은 광인이기도 하고 광인이 아니기도 하다는 점에서 광인이라는 수수께끼를 통해서만 진실을 내보이고, 인간성의 전락하는 움직임 속에서 인간의 정체를 폭로하는 각 광인은 인간의 그러한 진실을 지니고 있기도 하고 지니고 있지 않기도 하다.
p. 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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