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터 벤야민, 사진에 대하여일상/book 2019. 4. 18. 18:14
<사진에 대하여/발터 벤야민/위즈덤하우스>
사진에는 사진가가 의도하지 않은 것이 포착될 수 있다. 벤야민에 따르면, 사진에 찍히는 현실은 눈이 보는 현실과는 다른 층위들로 이루어져 있다. 현실에는 눈이 볼 수 없는 층위들, 곧 사진이 없으면 지각될 수 없는 층위들이 있다는 뜻이다. 사진은 우연히 빛점이 가닿은 곳이다. 역사가 재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시간과 장소가 있다면, 그것은 찍히기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그때 그곳, 그 짧은 한때, 그 작은 한곳이다.
p. 27
초점이 카메라나 사진과 관련된 용어이기는 하지만, 초점(focal point)의 어원에는 불타는 지점이라는 의미가 있다(그 의미는 독일어 Brennpunkt의 어원에 좀 더 선명하게 남아 있다). 초점은 난로 같은 온기로 발길을 붙드는 곳, 타오르는 불의 시시각각 달라지는 형체들로 시선을 붙드는 곳이다.
p. 28
하지만 다시 사회 혁명의 시기가 왔고, 러시아혁명은 자기 사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카메라에 찍힐 기회를 주었다. 이 시기의 사진들은 피사체에 접근하는 방법도 다르고, 피사체에 수용되는 방법도 달랐다. 이 새로운 세계의 주민들이 익명인 것은 에이젠시테인의 영화에서 노동자-배우가 익명인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관심은 자기 홍보가 아니라 궁금증을 채우는 것, 카메라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생산관계(relation of production)에서 지위 변동이 일어남에 따라 복제양식(mode of reproduction)도 변화했다고 할까. 변화의 효과는 러시아 국경선 너머에서도 감지되었다. 이 새로운 유형의 인간상은 흔히 이야기하는 인물 사진이 아니었다. 자기의 독특한 개성을 판매하는 개인을 찍은 사진이 아니라 익명의 얼굴을 찍은 사진이었다. 익명의 얼굴을 찍는 것, 이것이 바로 현대인을 찍는 사진가(집단, 대중 유형 등을 찍는 사진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찍는 사진가)의 작업이다.
p. 31
사진은 객관적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화가처럼 대상을 주관적으로 미화하거나 기량 부족이나 기벽 탓에 대상을 왜곡할 위험이 없다는 뜻이다. 기계적 공정으로서의 사진은 세계와 모종의 직접적, 반영적 관계에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세계를 객관적으로 보여 주겠다는 약속이다. 여러 유럽어에서 ‘렌즈’를 뜻하는 단어, 예를 들어 독일어 Objektive, 프랑스어 objectif, 이탈리아어 obiettivo는 ‘앞에 놓여 있음’을 뜻하는 라틴어 objectus와 연결되어 있다. 렌즈의 속성에 불과한 ‘객관(objectivity)’이 역사적 진실, 특정 시공간의 진실을 보장한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뜻이다.
현실의 발견이 사진의 사명이다. 사진을 찍는 데 기술력이 사용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진의 매체적 속성은 현대적 세계관의 구조에 본질적으로 알맞다. 사진의 객관적 기록은 기술자 세대의 사고에 상응한다. 진실함이라는 카메라의 가장 훌륭한 미덕이 이제 아무 방해 없이 펼쳐질 수 있다.
p. 32
사진 설명글은 한창 잘 팔리는 사진으로도 혁명적 사용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가 사진가에게 요구해야 하는 것은 자기가 찍은 사진에 그런 설명글을 붙이는 능력이다. 사진으로 혁명하는 방법, 사진으로 혁명적 사용 가치를 만들어 내는 방법은 표층의 광택을 뚫고 상층으로 파고드는 설명글을 붙이는 것, 그리고 그럼으로써 사회가 행복해진다는 꿈을 팔거나 구매자에게 ‘세상은 아름다워’라
p. 39
충격은 현대적 삶의 지배적 양식이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떠밀리는 것도 충격이고, 차량을 요리조리 피하거나 차량에 실려 옮겨지는 것도 충격이고, 공장 생산 라인, 시끄러운 기계화된 노동을 맞닥뜨리는 것도 충격이고, 신문이나 잡지나 영화에서 앵글이나 스토리가 갑자기 바뀌는 것도 충격이다. 삶은 파편적이고 갑작스러운 자잘한 충격의 연속이자 충격 그 자체다. 시간에 충격을 가하는 것도 가능하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카메라는 순간 안에 끼어드는 방식으로 시간에 충격을 가한다. 시간이 왜 위력적인가에 대한 답을 사진이 시간과 어떠한 관계에 있느냐에서 찾아보려는 시도도 많았다. 사진은 현재의 순간을 찍는데 사진에 찍힌 현재는 사진에 찍힌 순간부터 과거가 되기 시작한다는 것, 이것이 사진의 이상한 변증법이다. 아무리 새로운 순간도 사진에 찍히면 역사적 기록이 된다는 것, 이것이 사진의 운명이다. 현재라는 한순간의 이미지는 역사를 통해 극복될 수 있고, 사진은 기억의 부속물이 될 수 있다. 모더니티의 시대는 기술력에 의지하지 않는 기억을 생각할 수 없는 시대, 기억이 역사 기록자로서의 역할을 기술력에게 빼앗긴 듯한 시대다.
p. 46~47
벤야민이 지적한 것처럼, 권력을 쥔 사람들, 그리고 인습적 의미의 예술을 너무 동경하는 사람들이 사진을 오용할 가능성이 있다. 사진이 ‘제의적 가치(Kultwett)’를 산출하는 ‘정치의 예술화(Asthetisierung)’의 도구로 전락할 가능성도 있다. 정치가 사진을 프로파간다로 오용할 가능성도 있다. 사진이 쇠락할 가능성도 있다. 압제 세력이 사진을 오용(abuse)하면서 피사체/국민(subject)을 학대(abuse)할 때, 사진이 동시대적 활력을 잃고 압제 세력과 한편이 될 가능성도 있다.
p. 71
이런 사진 한 장 속에 충분히 젖어 보았다면, 여기서도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극도로 정밀한 기술을 통해 제작된 사진에는 회화가 더 이상 우리에게 줄 수 없게 된 어떤 신비로움이 있다. 사진가의 예술적 기량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모델의 자세가 아무리 계획대로라고 해도, 보는 사람이 그런 사진 속에서 우연이라는, ‘지금 여기’라는 빛점 한 개, 현실의 빛으로 사진의 성질을 태우는 그 작은 빛점 한 개를 찾고 싶어지는 것, 눈에 띄지 않는 그 작은 한 곳을 찾아내고 싶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지금도 미래의 일들은 예전에 과거가 된 그 1분 속에 뚜렷이 깃들어 있기에 지금 우리는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미래를 발견할 수 있다.
p. 98
시지각적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이 공간을 열어 보여주는 것은 바로 사진의 스냅 촬영과 화면 확대다. 충동의 무의식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 정신분석이듯, 시지각의 무의식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은 사진이라는 뜻이다. 공학의 건축 구조나 의학의 세포 조직은 정취가 깃든 풍경화나 영혼이 깃든 초상화보다는 카메라와 원래 더 친하다.
p. 99
아우라가 뭐겠는가? 공간과 시간이라는 실로 짠 특별한 직조물이라고 할까,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단 한 번밖에 나타나 주지 않는 먼 곳이라고 할까. 어느 여름 한낮, 지평선에 펼쳐지는 산마루를 바라보는 누군가가 있고, 그에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나뭇가지가 있다. 그 산마루나 그 나뭇가지에 머물러 쉬는 그 한낮을 따라가다 보면, 불현듯 먼 곳이 나타나는 때가 있다. 한순간일 수도 있고 한 시간일 수도 있는 그때가 바로 그 산의 아우라, 그 나뭇가지의 아우라를 호흡하는 때다. 그런데 대상을 자기 눈앞, 아니 대중의 눈앞에 ‘가까이 가져다 놓는’ 성향이 요즘 사람들에게는 매우 강하다. 복제를 통해 대상의 일회성을 극복하고자 한다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렇듯 대상을 가장 가까이에서 장악하고자 하는 욕망, 대상의 형상(Bild), 아니 모상(Abbild)을 향한 욕망은 날마다 점점 더 막강하게 확산된다. 여기서 말하는 모상, 예를 들어 화보 신문에 실리는 사진이나 영화관에서 트는 뉴스 화면은 형상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모상과 찰나성과 반복 가능성이 얽혀 있다면 형상에는 일회성과 영속성이 얽혀 있다. 대상을 둘러싼 껍질을 부술 수 있다는 것, 아우라를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일한 형상들을 알아보는 지각이 발달해 있다는 표시, 일회적인 형상 앞에서도 복제를 이용해 동일한 형상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한 지각의 표시다.
p. 120~121
카메라가 점점 작아지고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나 안 보이게 숨어 있는 것들까지 카메라에 잡히면서, 사진의 충격이 보는 사람의 연상 작용을 중단시키는 경우도 생긴다. 사진에 필요한 것은 연상이 아니라 설명글이다. 모든 생활 여건들이 텍스트화돼야 하듯, 사진에는 설명글이 달려야 한다. 설명글 없이 구성된 사진은 결코 불확실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p. 134~135
미래의 까막눈은 글자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사진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일 것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지만, 자기가 찍은 사진을 읽을 줄 모르는 사진가도 똑 같은 까막눈이 아니겠는가? 미래에는 사진 설명글이 사진의 본질적 요소가 돼야 하지 않겠는가? 현대인을 다게레오타이프로부터 갈라놓는 90년이라는 낙차는 바로 이런 질문들 속에서 역사의 전압이 되어 불꽃을 튀기고 있다. 초기 사진은 바로 이 전기 불꽃의 빛 속에서 비로소 할아버지 세대의 나날들이라는 어둠으로부터 걸어 나와 그 아름답고 범접하기 힘든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p. 136
제목은 “예술의 원초적 형태들(Urformen der Kunst)”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연의 원초적 형태들(Urformen der Natur)이라는 뜻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겠는가? 예술에 앞서서 존재하는 및그림(Vorbild)이라는 의미에서 원초적 형태들이 아니라, 만들어져 있는 모든 것 속에서 처음부터 형태로 작용하고 있었다는 의미에서 원초적 형태들이다. 그것도 그렇고, 이 사진들에서처럼 큰 것을 더 크게 만드는 일(예를 들어 식물 전체 또는 식물의 싹 또는 잎을 확대하는 일은 아주 작은 것을 조금 크게 만드는 일(예를 들어 식물 세포를 현미경으로 확대하는 일)과는 전혀 다른 형태들의 영토로 통한다는 것은 더없이 냉철한 사람들에게조차 모종의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클레, 그보다는 칸딘스키 같은 현대 화가들은 현미경이라면 완력으로 들이댔을 영토를 우리가 좋아할 수 있는 형상으로 만드는 데 오랫동안 몰두해 온 반면, 이 식물 확대 사진들은 오히려 식물의 형상을 한 “양식의 형태들”을 만나게 해준다
p. 179~181
우리 눈은 이 사진들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 릴리푸트 소인족처럼 이 거인족 식물들의 그림자 밑에서 그저 서성거릴 뿐이라고 할까. 이 거인족 식물들의 꿀샘에서 그 모든 꽃꿀을 빨아들이는 기쁨은 거인의 크기, 거인의 정신으로 햇빛 아래 반짝이는 눈, 한때 괴테와 헤르더의 것이었던 그런 눈의 몫으로 아직 남아 있다.
p. 182
무수한 눈동자와 카메라에 이 도시의 거울상이 맺혀 있다. 파리가 ‘빛의 도시(Ville Lumiere)’가 된 것은 파란 하늘 때문만도 아니고 저녁 큰길가의 네온사인 광고 때문만도 아니라는 뜻이다. 파리는 거울 속의 도시다. 차로 블록은 거울처럼 매끄럽고, 모든 식당의 앞문짝 유리는 여자들이 가장 자주 쓰는 거울이다. 파리 여자들의 아름다움은 이 거울로부터 나온다. 여자는 남자의 시선을 받기 전에 이미 열 개의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본다. 남자도 특히 카페 안에서는 거울의 홍수에 잠겨 있다. 거울은 실내를 좀 더 밝게 해주고, 파리의 식당이나 카페에서 볼 수 있는 그 모든 비좁은 칸막이 공간에 탁 트인 느낌을 준다. 거울은 이 도시의 정령이 깃든 물건이요, 이 도시의 문장(紋章)이 새겨진 방패다. 그 방패에는 지금까지도 모든 문학 유파의 상징물들이 아로새겨져 있다.
p. 198~199
사진이 예술을 자처한 것은 예술이 상품이 된 것과 같은 시기였고, 사진이라는 복제 기술이 예술 그 자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된 것과도 같은 시기였다. 이렇듯 예술을 자처하게 된 사진은 의뢰인으로부터 유리되어 익명의 시장 및 시장 수요로 환원되었다.
···”위대한 천재의 작품일수록 당대의 사회적 동향을 정확히 반영하지만, 그것은 작품의 당대적 내용 덕분이 아니라 오히려 작품의 독창적 형식 덕분이다.” 한 작품이 예술적으로 어느 범위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재고하기 위해 그 작품을 낳은 시대의 사회 구조가 어떠했는가를 감안하겠다는 이야기에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이 문장의 유일한 문제점은 특정 시대의 사회구조가 고정적이라고 가정한다는 데 있다. 특정 시대의 사회 구조는 특정 시대의 작품을 돌아보는 지금 이 시대가 어떤 시대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p. 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