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와 타자들/이졸데 카림>
얼마전 <하트스톤>이라는 영화를 보고나서 ‘나와 다름’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했던 적 있었는데, 그저 소수 또는 약자에 대한 존중을 ‘다름에 대한 인식개선’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을 맺었었다.
이졸데 카림은 ‘정체성의 감소’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다원화된 사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정치적 인간이 될 것인지 논의하며, 오늘날 득세하는 포퓰리즘을 좌파/우파 각각의 시점에서 비판을 제기한다. 개인적으로는 꽤나 난해한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보다는 논문처럼 명료한 단어와 함께 논리를 펼쳐나가는 이번 글이 훨씬 재미있게 읽혔고, 페이지 하나하나마다 예리한 분석이 담겨 있어서 다시 한 번 읽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시민들이 탈정치화되는 경향이 있다는 통념과 달리, 양태(樣態)가 달라졌을 뿐 우리 인간이 여전히 대단히 정치적 동물이라는 사실을 작가가 보여준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그리고 그러한 논지에 다다르기까지의 전개과정이 매우 설득력이 있다. 요컨대 근대에 등장한 ‘시민’이라는 주체가 총 세 차례에 걸쳐 변모를 거듭하였으며, 1세대는 민족이라는 굴레로부터 보호받던 정체성, 2세대는 조명받지 못했던 소수의 정체성, 3세대는 개인에 의해 ‘선택된’ 정체성이 공적 영역에서 다뤄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저자의 논지다. 당연하게도 3세대에 이른 정체성의 변모는 되돌릴 수 없는 사회의 다원화와 맞물려 진행되었으며, 이 시점에 우리는 극도로 다원화된 정체성이 혼재되어 있음을 받아들이고, 나아가서는 자신의 정체성이 펼칠 수 있는 운신의 폭조차 좁아질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이를 저자는 자유로운 통행은 보장되지만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미연에 자기규제를 가하는 도로공간에 비유한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되뇌어야 하는 3세대의 개인주의자들. IS에 대한 테러 자행이나, 프랑스의 강경한 종교-세속 분리주의, 미국에서 불었던 트럼프 열풍 등은 이졸데 카림의 분석틀 안에서 매끄럽게 설명된다. 그렇지만 갈무리를 하는 동안 전적으로 이졸데 카림의 의견을 지지했던 내 입장에서도 몇 가지 의문점이 고개를 들었다.
첫째, “더 작은 자아가 되기 위해 더 많은 수고가 필요하다”는 이졸데 카림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지만, 모든 개인이 종교, 성별, 성적 정체성, 지역 등 다양한 균열마다 민첩하게 합리적인 대응을 하기란 아무리 완벽한 사람이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균열의 지점이 끊임없이 파동치기 때문에 조금 전 내린 선택에 대해서조차 확신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오늘날 사회라면 말이다. 3세대 개인이라는 것은 과연 우리 삶에 중요한 균열을 발굴하고 ‘공론화’할 것인가?
둘째, 시투아앵이자 개인으로서 어떠한 선택을 요구하는 이졸데 카림의 논지 안에서 ‘느낌의 정치’라는 다소 모호한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졸데 카림이 주지하였다시피, 모든 사회적 논쟁은 나눌 수 있는 것 아니면 나눌 수 없는 것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그리고 종교적 문제나 성소수자 이슈, 다문화 정책처럼 산술적으로 해결책을 찾기 어려운 문제들은 대개 어떠한 감정―혐오 내지 극단적 찬양―을 선동(煽動)하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수시로 형상을 바꿔나가는 ‘감정’을 우리는 공론의 장에서 어떻게 ‘이성’을 거쳐 받아들일 것인가?
3세대의 시투아앵가 도래했다는 이졸데 카림의 주장에는 대체로 동의한다. 그러한 프레임 안에 겉보기에 정치에서 멀어지는 듯한 오늘날 시민들이 여전히 정치의 영역에 속해 있다는 말에도 동의한다. 나아가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개인이 보다 완전한 주체성을 갖추게 된다는 점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숙의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앞서 제기한 몇몇 의문점을 극복하고 소립자처럼 다원화되어 가는 가치의 충돌지점을 찾아내어 제대로 된 공적 의제로 정립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이 때문에 플라톤은 민(民)에 의한 정치를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정치로 분류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불완전함을 알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졸데 카림의 말은 새롭기도 하고 새롭지 않기도 하다. 새롭지 않게 느껴지는 부분이 무엇이었는지 되짚어 보게 된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러한 “보편적 개인”의 생성을 의미한다. ···민주주의는 국민이자 유권자인 정치 주체를 생성하고, 법적 주체로서의 법인을 생성한다. 민주주의는 곧 사회의 개인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개인화는 우리 사회와 함께 대두한 것이 아니라, 1800년대에 일어난 훨씬 오래된 움직이라는 것을 명확히 해야 한다.
1세대 개인주의라고 명명할 수 있는 개인화 운동을 통해 개인은 기존의 관계망에서 빠져나왔다. 우리 관점에서 보면 ‘오래된’ 이 1세대 개인주의는 개인을 계급 사회의 속박에서 해방시켰다. 모순처럼 들리지만, 개인주의는 모든 개인이 동등함을 의미했다. 다양한 차이와 신분, 계급, 종교 같은 모든 특수성이 무시되는 곳에서 국민이자 유권자로서, 그리고 법적 주체로서 개인이 되기 때문이다.
···개별 사인으로서 개인은 언제나 구체적이고 구별된다. 그러나 공인으로서 개인은 구별되는 특성들을 추상화함으로써 동등해진다. 다시 말해 특수한 차이들을 무시할 때에만 각각의 개인은 전체의 동등한 부분이자 주권을 구성하는 동등한 일부가 된다. ···우리를 구별하는 것들을 무시할 때에만 우리는 전체의 동등한 부분이 된다.
p. 17~18
추상적 평등의 형성은 분명 민주화 과정에서 나온 전적으로 진보적이며 해방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만 그러했다. 우리에게는 민주주의적 추상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이 다른 무언가를 민족이 가져다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민족 형성은 정체성 정치 관점에서 보면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운동이다. 민족은 민주주의적 추상의 정확히 반대다. 민족은 추상적인 민주주의적 주체, 추상적인 시투아앵, 추상적인 권리 주체에게 추상적인 개념과 반대되는 것을 제공한다. 민족은 이 주체에게 형상을 제공한다. 공인으로서의 개인에게 현실적인 정체성의 표지가 되는 형상이다. 유권자가 숫자로만 측정되는 추상적인 평등이며, 정치적·법적 주체가 단지 주권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추상적 동등이라면 민족적 주체는 구체적이고 특수하다. 이로써 개인은 전체 사회의 추상적 부분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p. 20
먼저 주도 문화(Leitkultur)는 민족이라는 생활 및 사회 환경을 일자(一者) 즉 모든 환경의 원칙이자 근거로 다시 살리려고 한다. 왜냐하면 주도 문화는 이와 같이 오직 당연하고 문제 제기를 받지 않는 생활 세계가 되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기 문화’의 허물어진 당연함을 내용의 규정을 통해 다시 세우려는 시도다. 그러나 이 시도는 주도 문화에서는 내용이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주도 문화에서는 내용과 관계 맺는 방식이 중요하고, 내용을 전달하고 살아 있게 하는 당연함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 시도는 강제된 구속력으로 주도 문화가 구하려는 것이 바로 주도 문화를 무력화하는 그 당연함임을 간과하고 있다. 그러나 당연함은 구할 수가 없으며 더 이상 생성되지 않는다. 주도 문화가 선포되고, 논쟁과 토론이 뒤따랐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주도 문화라는 환경이 더 이상 난공불락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주도 문화는 그저 환경의 일부, 즉 부분적인 환경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주도 문화는 더 이상 실재하는 포괄적 환경이 아니다.
p. 40~41
점점 더 많은 구속받지 않는 개인들이 거대 정당아나 교회같이 사회 전체와의 결합을 생산했던 옛 조직들을 떠났다. 이렇게 사회와 정치로 들어가는 입구는 점점 더 개인에게로 옮겨 갔으며, 더 이상 국가의 배경에 자리잡아 보호받을 필요가 없어졌다. ···이러한 상황은 바로 2세대 개인주의의 정치 주체가 자신의 삶 전체를 특정 공동체와 관련지어 관계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제 정치 주체는 제한된 시기 동안만 결합하는, 생애의 한 시기를 함께할 모임을 찾는다. 정당이나 활동, 실천으로 대변되지 않으며, 대신 작은 모임 안에서 자기 진실성을 드러낼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2세대 개인주의는 본질적으로 표현적이다. 정해진 소속은 더 이상 중심이 아니고, 개인의 주장된 정체성이 핵심이 된다.
p. 48
그러나 오늘날 다원화와 함께 민주주의는 그 형상을 잃어버렸다. 이제 민주주의는 벌거벗었다. 그렇다면 각 개인에게 이 상황은 무엇을 의미할까? 어떻게 개인은 주체로서 사회에 기입될 수 있을까? “한 사회 안에 한 기관이 증명되려면, 의식 안에 대응물이 있어야 한다.” 피터 버거는 이렇게 적었다. 그렇다면 빈자리는 의식 안에 어떻게 기입될 수 있을까? 추상적으로 말하면 공제, 빠짐으로 등록될 수 있다. 빈자리는 자신을 덮어 주던 민족 형상처럼 형상으로서 실증적으로 드러날 수 없다. 단지 빠진 존재로, 감소되고 작아진 존재로 드러내고 보여 줄 뿐이다. 바로 이것이 3세대 개인주의, 다원화된 개인주의의 본질이다. 감소된 주체, 감소된 자아.
1세대 개인주의에서는 주체의 변화가 중요했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교육 기관들을 통해 수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관들은 주체를 변화시키려고 했고, 대부분 규율을 통해 작동했다. 이와 반대로 1960년대 이후 출현한 2세대 개인주의에서는 성별이나 성적 지향성같이 자신의 정체성을 위해 본질적으로 선택된 특징과 함께 주체를 바꾸지 않는 게 중요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본질적으로 개인의 표현이 중요했고, 중요하다. 이와 반대로 3세대 개인주의는 개인의 분열, 우연성의 경험, 불확실의 경험, 원칙적인 개방성 등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3세대 개인주의는 우연이라는 요소가 심장으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p. 57~58
우리는 완전하지 않은 자아이며, 오늘날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정체성은 언제나 우리와 완전히 다른 정체성에 연결된다. 우리는 오늘날 어쩔 수 없이 외부의 관점을 내면의 관점으로 포함시켜야 한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묻는 내면의 관점이다. 우리는 당연함이 축소된 자아다. 우리는 정체성의 프레카리아트(Precariat, 불안정하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Precario와 노동자를 뜻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합성어로 저임금, 저숙련 노동에 시달리는 불안정한 노동자 계급을 가리킨다.)로 살아간다. 프레카리아트처럼 안정되고 고정된 관계에 비해 더 많은 노동을 요구받는다. ···이것은 더 작은 자아가 되기 위해 더 많은 수고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다원화된 개인주의가 낳은 모순된 결과다.
p. 61
신자유주의적 주체로서 우리는 고립된 개인들의 사회이며, 각자의 직업적 성취라는 궤도만 따라간다. 이와 반대로 다원화된 주체로서 우리는 당연히 집단들의 일부다. 사회는 고립된 자들의 집합이 아니라, 수많은 정체성들이 만드는 집단들의 조합이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은 바로 이 집단 정체성들, 이 하위 집단들의 변화다. 이 변화는 신자유주의가 기대하는 해체나 고립화가 아니며, 오히려 집단 소속의 다원화다.
p. 63
오늘날 우리는 신앙을 선택한다. 하나 또는 여러 개의 신앙을 개수와 상관없이 선택하는데, 핵심은 선택이다. 이 점이 과거 종교에 대한 이해와 완전히 다른 점이다. 선택은 세속적이기 때문이다. 세속 사회는 오늘날 종교 세계 옆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속적인 것은 종교의 심장으로도 진입했다. 전승 안에서 배치되는 대신 과거 전통 혹은 외부 전통을 스스로 습득한다. 어떤 자리에 배치되는 대신 자기 힘으로 어떤 자리를 차지한다. 스스로 선택된 전통은(이 무슨 모순인가!) 과거 종교성과는 반대되는 효과를 낳는다. 세대라는 사슬에 배치되어 탈주체화되는 대신, 선택한 자아가 강화된다.
p. 87~88
그런데 중립성은 어떻게 생겼을까? 흥미롭게도 중립성을 표현하는 상징은 없다. 중립성을 연상시키는 그림들은 있다. 이 그림들은 언제나 ‘정상’으로 인정받는 장면들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상을 중립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정상’을 드러내는 이 그림들은 사회적 논쟁과 투쟁 과정에서, 예를 들면 여성권 투쟁 과정에서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정상’이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언제나 변하는, 구성된 중립성임을 이 그림들보다 더 잘 보여 주는 것은 없다. 변하는 것은 중립성의 속성이며, 변하지 않는 것은 이 중립성의 실제 본질이다. 그리고 모순처럼 들리지만, 이렇게 말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중립성이란 외형적인 것만은 아니다. 종교적 상징이 이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왜냐하면 종교적 상징의 포기 자체가 세속 국가의 기초인 국가와 종교의 분리가 실현되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는 보편적 공공성과 개인 각자의 사적인 것을 구분하는 일이 개인에게 위임되었고, 개인이 이 구분 작업을 완수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종교적 혹은 다른 특별한 신념, 기호 등은 사적인 것이다. 국가의 중립성은 바깥 어딘가에 있지 않다. 중립성은 컨테이너가 아니다. 중립성은 개인에게, 특히 국가의 대리인에게 자기가 양분된다는 사실을 지식과 의식 차원에 각인시킬 때만 존재한다.
p. 97~98
주체들의 비할 수 없는 분열, 더 이상 내용적으로 규정되지 않는 분열은 단지 빼기일 뿐이다. 즉 국가 시민적 의식은 시민의 완전한 정체성과는 거리가 있고, 완전함에서 뭔가 빠진, 감소된 자아로 이해된다. 다원화된 민주주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중립성은 바로 이런 것이다. 즉 어떤 개인이 공인으로서 사회에 배치되어야 할 때, 그의 정체성에서 무언가를 빼는 것이 바로 중립성이다.
p. 103
만약 참여가 몫을 갖는 일이고, 결정하고 논의하는 것이라면, 참여는 진짜 결정에 참여하는 것이고, 진짜 함께 논의하는 것일까?
다르게 물어보자. 진짜 참여에서는 현실이 중요한가, 아니면 참여가 중요한가? 이 질문은 얼핏 봤을 때처럼 터무니없지 않다. 두 가지가 같다고 성급히 생각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 질문의 의미를 되묻지 않은 채 그냥 수용하면 안 된다. 그렇다면, 참여와 결정하기의 실재는 무엇인가? 이는 냉엄한 사실로서의 실재, 측정 가능한 결과로서의 현실일 뿐 아니라 참여 자체라는 실재, 즉 참여의 주관적인 현실이기도 하다. 참여의 주관적 현실로서의 실제는 소속되고 있고, 인정받으며, 고려받는다는 주체의 느낌을 의미한다. 이 느낌, 이 감정이 바로 3세대 개인주의에서 의미하는 참여다. 이는 실제로 참여한다는 순수 객관적 관점에서, 참여에 대해 주체가 느끼는 주관적 단계로 이동하는 것이다.
p. 148
느낌만으로 참여하는 일, 참여한다고 느끼는 일은 결핍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참여한다는 주체의 느낌은 허공에 붕 뜬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여한다는 느낌이 싹트기 위해서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 느낌이 생겨날 수 있는 활동 영역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경청받는 공명의 공간이 있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참여의 중요 기준이 냉정한 현실에서 공동으로 결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현실 그 자체임을 알게 된다. 느끼기 위해서는 어떤 공간을 생성해야 한다. 참여는 그 자체의 실재를 갖는다는 말은 바로 이 공간의 생성을 의미한다.
p. 149
감소된 주체들은 집단에 들어갈 때 완전히 구체적인 객체성을 지닌 개인으로 인식되기를 원한다. 매우 구체적이고 개별적이라서, 그들은 어떤 종류의 정체성 지표로도 분류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개인들은 이런 방식으로만 참여할 수 있고, 참여해야 하고, 참여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를 향한 이 새로운 기본 열망을 완전 참여를 향한 열망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것이 3세대 개인주의, 즉 다원적인 개인주의의 정치 형식이다. 완전 참여란 집단이나 계급 혹은 정당과 같은 어떤 보편에 의해 대변되지 않고 자신의 구체적인 개체성 안에서 자기 자신으로, 온전한 개인으로 존재하기를 의미한다.
p. 151
통합은 단순히 한자리를 차지하는 일, 눈에 띄는 일, 제도의 일부 혹은 엘리트가 되는 일이 아니다. 통합은 능동적인 참여를 말한다. 참여는 이미 주어진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도착해야 하는 장소인 사회 자체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기준을 채우는 능력이 아니라, 기준 자체를 바꾸는 일이다. 그리고 바로 이 일은 이미 존재하는 사회에 흔적 없이 편입된다는 환상, 곧 동화에 저항해야 한다. 이렇게 통합의 개념 자체가 바뀐다. 즉 통합은 규정의 충족이 아닌 변화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 변화이며, 다인의 정체성 변화이며, 사회의 변화다.
p. 162
확신에 찬 민주주의자들의 판단력을 흐리는 것은 바로 그들의 생각이다. 민주주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회 질서라는 그들의 상상. 사람들은 이성적인 논쟁을 나누고, 사안의 경중을 재며, 결국에는 영리한 타협책을 찾는다는 것, 이는 과장이 아니라, 계몽된 모습에 대한 상투적인 묘사다. 실재와 일치하지 않는다 해도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 이것은 우리 머릿속을 떠돌고 있는 정치의 이상이자, 아마도 우리가 진짜 모습을 모르고 있는 이상이다. 정치적인 것에서 감정이 출현할 때, 그리고 감정이 질병으로 다루어질 때 언제나 분명해지는 이상. 그러나 이상적인 합리성의 관점에서 감정을 관찰하면 감정은 일탈로 변한다. 이때 느낌과 감정은 병리적 혼란이자 정치 과정을 방해하는 비이성적인 것이 된다. 감정은 사회와 정치 질서를 방해하고 위협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다음 이 비이성적 혼란을 치료하는 이성적 만병통치약으로서 바로 계몽이 호출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와 같은 방법이 이론적으로도 틀렸고 전략적으로도 멍청하다는 데 있다.
p. 188
사회적 갈등은 단순하지 않고 과잉으로 규정되는데, 왜냐하면 이 갈등들은 나눌 수 있는 것과 나눌 수 없는 것, 이성과 감정, 합리와 비합리로 명확하게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민주주의 정치는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결국 나눌 수 없는 갈등은 나눌 수 있는 갈등으로 완전히 번역되지 않는다. 정치적 평화는 개입을 감소시킬 수 있다. “그러나 개입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언제나 나눌 수 없는 나머지가 남아 있게 되고, 이 나머지는 끝나지 않을 정치 논쟁을 반복해서 요구한다.
p. 189
포퓰리즘 운동의 성과는 근본적인 사회 문제들이 나눌 수 없는 것들의 영역에 정착했음을 보여 준다. 그 결과 나눌 수 있는 것에 대한 해결책으로는 이 문제들을 극복할 수 없게 되었다. 국가 보조금은 정체성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다. 포퓰리즘은 다원화된 사회의 아주 민감한 지점을 휘젓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정치적 초점을 쉽게 재배치할 수 없다. 감정이 다른 곳에서 투자되고 있을 때, 사회 문제를 중심으로 밀어 놓자고 명령할 수 없다. 특히 사회 문제를 나눌 수 있는 질문으로만 이해하고 나눌 수 없는 정체성 차원을 무시하고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p. 203
포퓰리즘은 정치가 나눌 수 있는 갈등을 번역되지 않으며, 금전 가치로 환산하여 축소될 수 없는 일임을 보여 주었다. 정치는 또한 정체성과의 관계가 필요하다. 경제뿐 아니라 정체성 투자금을 축적하는 것도 중요하다. 특히 상처받은 정체성의 축적이 중요하다. 포퓰리즘은 이를 다시 환기했다. 그러나 포퓰리즘은 온전히 나눌 수 없는 것에만 자리를 잡았다. 말하자면 포퓰리즘은 민주주의 정치에서 빠질 수 없는 ‘나눌 수 있는 것’에 대한 실천을 삭제해 버린다. 포퓰리즘은 나눌 수 있는 것을 언제나 반복해서 자신의 정체성 요구로 무력화시킨다. 특히 순전히 절대적인 것에만 자리 잡는 포퓰리즘의 발언과 언어를 통해 무력화시킨다. 포퓰리즘에서는 언제나 전체가 중요하다. 모든 문제는, 그리고 모든 해결 가능한 문제들은 실존을 위협하는 것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포퓰리즘의 부정적인 정체성이 불신의 문화를 조장하면 포퓰리즘은 나눌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무력하게 만든다.
p. 211
탈규제는 주체의 불안감이 의도적이고 목적의식적으로 만든 생산물이다. 공간 기획자들은 모든 것이 열려 있다고 말한다. 공간의 형성을 통해, 예를 들어 분명하게 편입된 도로 공간을 누락시키면서 개인에게 완전히 의도된 불안감을 생성시킨다. 왜냐하면 이 불안감이 변화된 행동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개인들의 불안함이 보다 안전한 전체 상황을 만든다.
이것이 도로교통법의 역설적 효과다.
p. 230
오늘날 우리는 아주 위급한 상황에서 살아간다. 지금은 따라서 사회적 분열 상황을 정확히 규정해야 할 정치적 요구의 시간이다. 냉전과는 달리 지금의 전선은 분명하지도 선명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전선은 단순히 우리 사회의 가장자리에 있지 않다. 전선은 우리 사회를 관통하여 놓여 있다. 더욱이 현재의 전선은 분명하거나 선명하지 않고 또한 극단적으로 복잡하기 때문에, 바로 그래서 상황을 정확히 규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p. 239~240
정치적 올바름의 과잉은 감소된 자아의 방어로 전도된다. 정체성에 방호벽을 쌓고, 정체성만의 영토를 구축하면서, 바로 이 방어를 통해 새로운 유형의 완전한 정체성에 도달하게 된다. 과잉 속에서 정치적 올바름은 완전한 정체성을 다시 얻으려는 시도로, 더 좋게 표현하면 완전한 정체성을 정복하려는 시도로 전도된다. 여기에서 정체성 정치는 저항으로부터 정체성의 견고화로 바뀐다.
p. 256~257
‘오직’ 실제 경제적 불평등만이 문제였다면, 쉽지는 않지만 최소한 명백한 해결책은 있다. 고용 프로그램, 분배 원칙, 경기 부양책이 필요하리라. 견고한 실제 정치를 위한 넓은 영역이다. 그러나 불평등하다는 느낌, 굴욕감이 이러한 해법을 방해한다.
p. 276
정치적 올바름과 정체성 정치를 끌어가는 생각은 통합이다. 기존의 베제와 소외를 적극적인 통합으로 철폐하겠다는 기획인 것이다. 이는 다원화 사회의 불의와 싸우기 위한 (필연적인) 전략이기는 하다. 그러나 동시에 제한된 전략이며, 전체 사회를 위한 구성은 아니다. 정치적 올바름과 정체성 정치는 실제적인 사회적 유토피아를 제공하지 않는다. 더욱이 통합을 “기존의 정체성”을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즉 반동적이고, 다원화 사회의 역동성을 막아 내며, 3세대 개인주의 운동을 오인하는 정체성의 고정화로 이해한다면.
p. 286
다원화된 사회의 만남 구역에는 분명한 정체성을 지닌 헌법 애국주의자들이 아니라 제한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돌아다닌다. 이들은 추상적인 시투아앵이 아니다. 시투아앵이 되기에 이들의 차이는 너무 구체적이다. 이들은 스마트폰을 손에 쥔, 본질적으로 고립된 단자들도 아니다. 이들은 만남을 통해 서로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남 구역에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하나의 감소가 추가되는 존재’로 경험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감소의 추가는 자기 정체성이 타인의 정체성에 의해 제한된다는 뜻이다. ‘긍정적인 함께가 아닌 오히려 부정적인 함께에 본질이 있는 새로운 방식의 전체’로 사회를 완전히 새롭게 생각해야 한다. 이 결합은 특수주의들이 서로서로 상대화하는 곳에 존재한다. 다원화된 주체들의 결합은 그들이 서로서로 경험하는 빠짐 혹은 공제 속에 존재한다.
p. 290
다원화의 ‘보이지 않는 손’은 (옛날의) 사회를 (새로운) 만남 구역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 변화를 거부하면, 만남 구역은 사회적 오작동의 그림이 된다. 그러나 이 변화를 수용하면, 다시 말해 견뎌내면, 만남 구역은 사회적 순기능의 그림이 된다. 그때 만남 구역은 한나 아렌트가 명명했듯이 “다원성의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목소리들이 등장하고, 다종다양한 의견과 위치가 표현되는 그런 공간이 될 것이다.
p. 291
'일상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관객모독 (0) 2019.06.25 2666-I (0) 2019.06.22 황금 코뿔소의 비밀 (0) 2019.04.29 발터 벤야민, 사진에 대하여 (0) 2019.04.18 광기의 역사 (0) 2019.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