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객모독/페터 한트케/민음사>
회사로 가는 길은 늘 지루하고, 그래서 사람 없는 지하철 안에서 슈슈슉 읽어내려간 책. 로베르토 볼라뇨의 책에 인용된 까닭에 페터 한트케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이렇게 전위적인 동시대 작가의 대표작이 연구되고 번역되어 이렇게 지하철 안에서 편안히 읽을 수 있다는 게 참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책은 굉장히 얇고 가볍지만, 작품이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말하는 '빠롤(parole)'에 천착해 있고 프랑스 구조주의의 영향을 받은 만큼 내용은 상당히 난해하다. 꼭 이상의 <오감도>를 읽는 듯한 느낌. 게다가 희곡의 후반부에 관객을 향해 반말투로 뇌까리는 대사를 눈으로 따라가다 보면, 이 작가, 참 건방지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뒤이어 드는 생각은 이렇게 저돌적인 작품에게 큰 호응을 보낸 독일 시민들의 문학적 관심과, 이 이단아를 세계적인 현대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독일문학계의 저변이 부럽기도 하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 유럽대륙의 자유주의 진영(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독일의 문학적 토양이 열악했다는 점과, 이로 인해 문학적 갈증과 열등감에 시달렸던 한 청년이 한계를 극복하고 좋은 작품을 써냈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있는 작품인 것 같다.
여러분은 무엇인가를 기대했었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무엇인가 다른 것을 기대했었습니다.
여러분은 대상들을 기대했었습니다.
여러분은 대상들을 기대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분위기를 기대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다른 세계를 기대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다른 세계를 기대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여러분은 무엇인가를 기대했었습니다.
아무튼 여러분은 여기서 무엇인가 듣기를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 여러분은 무엇인가 다른 것을 기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p.18
여러분은 우리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말을 귀 기울여 듣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벽 뒤에 서서 엿듣는 입장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터놓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러분 시선을 마주 보며 대화하지 않습니다. 우리 대화는 여러분 시선으로 단절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 말과 여러분 시선은 각을 이루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무시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남이 말하는 데 야유하는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곳의 사건을 개구리나 새의 관점에서 평가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심판자 노릇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때때로 고개를 돌려 바라볼 수 있는 청중으로 취급도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연극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막간 휴식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여러분에게 감동을 주는 어떤 사건도 없습니다. 이것은 연극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하기 위해 출현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각성시키기 위한 어떠한 환상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운명극도 상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꿈을 공연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실을 보고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기록물도 아닙니다. 현실의 단면도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분께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러분께 아무런 사건도 연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연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러분께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말만 합니다. 우리는 여러분께 말하면서 연기합니다. 우리가 우리라고 말할 때, 그것은 여러분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상황을 연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보고 여러분은 자신을 인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을 연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당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당황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앞에는 어떤 거울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에겐 말이 건네졌습니다. 여러분에겐 말이 건네질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말이 건네지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지루해질 것입니다.
―p.20~21
그러나 시간은 재생될 수 없습니다. 어떤 연극에서도 시간은 반복될 수 없습니다. 시간은 만회될 수 없습니다. 시간은 불가항력적입니다. 시간은 상연될 수 없습니다. 시간은 현실입니다. 현실인 시간은 연기될 수 없습니다. 시간은 연기될 수 없기 때문에 현실 역시 연기될 수 없습니다. 시간을 제거한 연극만이 연극입니다. 시간이 함께 상연되는 연극은 연극이 아닙니다. 시간과 무관하 ㄴ연극만이 의미를 지니지 않습니다. 시간과 무관한 연극만이 스스로 만족할 만한 연극입니다. 시간과 무관한 연극만이 시간을 연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p.50
우리는 연기하지 않고 또 연기하면서 행동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 연극의 반은 희극이고, 반은 비극입니다. 우리는 오직 말만 하고 시간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없고 또 아무것도 보여 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거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과거로 다루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현재로 다루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앞당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간의 현재 속에서 또 과거 속에서 또 미래 속에서 말합니다.
―p.53
이 작품은 일종의 머리말입니다. 다른 작품에 대한 머리말이 아니라 여러분이 과거에 했던 것과, 지금 하고 있는 것, 그리고 앞으로 할 것에 관한 머리말입니다. 여러분은 주제입니다. 이 작품은 주제 대한 머리말입니다. 여러분의 관습과 도덕에 관한 머리말입니다. 여러분의 행위에 대한 머리말입니다. 여러분의 무위(無爲)에 대한 머리말입니다. 여러분이 누워 있는 것, 앉아 있는 것, 서 있는 것, 걸어가는 것에 대한 머리말입니다. 이것은 삶의 진지함과 유희적인 면에 대한 머리말입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할 연극 관람에 대한 머리말이기도 합니다. 또한 다른 모든 머리말들을 위한 머리말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세계극입니다.
―p.55~56
너희들은 항상 거기에 앉아 있었다. 이 연극에서 너희들의 성실한 노력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너희들은 다만 제목을 제시해 준 자에 불과했다. 너희들의 위대함은 생략을 통해 이루어졌다. 너희들은 이 모든 사실을 침묵으로 대변했구나, 허풍쟁이들아.
너희들의 입에서는 어떤 허튼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너희들은 언제든지 무대 장면을 통제했다. 너희들의 연극은 매우 고상했다. 너희들의 얼굴에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너희들은 폭발력을 지닌 존재였다. 너희들은 이상을 품은 존재였다. 너희들은 흉내 낼 수 없는 존재였다. 너희들의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너희들의 희극은 포복절도할 정도로 웃겼고, 너희들의 비극에는 고전적인 위대함이 깃들어 있었다. 너희들은 양쪽을 마음껏 이용했다. 헐뜯기 대가들아, 쓸모없는 건달들아, 줏대 없는 꼭두각시들아, 사회의 찌꺼기들아.
―p.59~60
페터 한트케
'일상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0) 2019.07.01 2666-II (0) 2019.06.26 2666-I (0) 2019.06.22 나와 타자들 (0) 2019.05.09 황금 코뿔소의 비밀 (0) 2019.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