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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일상/book 2019. 7. 1. 23:57
<브람스를 좋아하세요.../프랑수아즈 사강/민음사>
아무런 목적없이 서점에서 책을 들춰보곤 한다. 그러다 언젠가 한 번쯤 귀에 접했던 작가의 이름을 발견한다. 그런데 한 번도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는 작가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그렇다. 처음에는 철학서적을 끄적이다가 흘러 흘러 발견한 것이 이 작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다(아는 동생이 형 들고 있는 책제목에 원래 쩜쩜쩜이 꼭 붙느냐고 묻는데, 실제로도 작가는 반드시 이 마침표 세 개를 붙여야 한다고 강조했단다― 이게 너무 낭만스러우면 내가 유별난 건가+_+)
다소 묵직한 책이더라도 무조건 읽어야지 하고 생각을 했는데, 이 책, 생각보다 단촐하다. 그런데 참 '달콤쌉싸름하다'. 이상하게도 영화는 로맨스물을 찾아보아도 소설은 대체로 건조한 글들을 읽는데, 이 책에서 묘사되는 사랑의 감정은 어쩐지 같은 경험이 없는 나조차도 수긍하게 되는 매력이 있어 좋다. 마치 브람스에 대해 전혀 모르던 내가 <브람스>라는 간판을 내건 안국동의 어느 카페를 찾아갔던 2016년 겨울처럼. 다시 한 번 좋은 작품이 많다는 사실에 (도대체 이렇게 좋은 작품들이 얼마나 더 숨어 있을지) 좌절하며..뭔가 괜찮은 프랑스 문학 하나를 건졌다는 생각에 기분이 유쾌해진다:)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p.43~44
"저는 당신이 오실지 안 오실지 확실할 수 없었답니다.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당신이 브람스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제겐 큰 상관이 없어요."
―p.59
그녀에게 그가 자신과 같은 부류, 그들(로제와 자신)과 같은 부류로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쉽게 상처받지 않을 존재로 보인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가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란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시몽은, 젊음과 지나치게 잘생긴 외모와 경험 부족으로 그녀의 눈에 참을 수 없게 느껴졌던 그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처럼 보였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는 늘 왠지 어떤 것에 사로잡힌 포로처럼 보이지 않았던가. 그 자신의 안이함의 포로, 안이한 삶의 포로처럼. 그런데 지금 그는 더 이상 발버둥치지 않는, 반쯤 죽은 듯한 옆얼굴을 자신에게가 아니라 나무를 향해 돌리고 있었다. 동시에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 실내복 차림으로 경쾌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시몽을 떠올리고는 그를 원래의 그 자신에게로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를 영원히 보내 버림으로써 잠시 슬픔에 잠기게 했다가, 예상컨대 앞으로 다가올 훨씬 멋진 수많은 아가씨들에게 넘겨 주고 싶었다. 그에게 인생이라는 걸 가르치는 데에는 시간이 자신보다 더 유능하겠지만, 그러려면 훨씬 오래 걸리리라. 그녀의 손 안에 놓인 그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에서 맥박이 파닥이는 것을 느끼자 그녀는 갑자기 눈에 눈물이 고였는데, 그 눈물을 너무도 친절한 이 청년을 위해 흘려야 할지, 아니면 조금쯤 슬픈 그녀 자신의 삶을 위해 흘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 키스했다.
―p.82~83
시몽이 그녀에게 가져다준 것은 완벽한 어떤 것, 적어도 어떤 것의 완벽한 절반이었다. 이런 일은 혼자가 아니라 둘이어야 완벽하다는 것을 그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오래전부터 줄곧 앞장서는 입장, 대개 혼자 애쓰는 입장이 되어 있었고, 이제 그 일에 지쳐 있었다. 그 자신에 대해 말하면서, 시몽은 사랑은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받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녀에게는 그 말이 유난히 특이하게 여겨졌다. 그녀는 자신이 개입된 이 연애의 초입에서, 예를 들어 로제와의 관계 초기에 있었던 흥분과 약동 대신 발끝까지 휘감은 거대하고 나른한 권태를 느꼈다. 모두들 나에게 분위기를 바꿔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애인을 바꾸게 되는군 하고 그녀는 서글프게 생각했다. 덜 성가시고 더 파리지앵답고 너무나 자주 만나 주는 애인으로...
―p.101
"당신은 우리의 사랑을 우연한 것이 아니라 확실한 그 무엇으로 받아들여야 해. 내가 그렇게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이게 내고 하고 싶은 말이야."
―p.132
프랑수아즈 사강
이 '불가피함'에는 응분의 결과가 따르리라. "어째서 당신은 나보다 로제를 더 좋아하는 거지? 그 무심한 사내의 무엇이 내가 당신에게 매일 바치는 이 열렬한 사랑보다 낫다는 거지?" 같은, 언젠가 시몽이 그녀에게 던질 질문들, 고통당하는 입장에서 응당 제기할 만한 질문들이 그녀를 괴롭혔다. 로제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녀는 지레 겁에 질렸다. 그녀는 로제를 가리켜 '그'가 아니라 '우리'라고 말하게 되리라. 왜냐하면 그녀로서는 그들 두 사람의 삶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그들의 사랑을 위해 육 년 전부터 기율여 온 노력, 그 고통스러운 끊임없는 노력이 행복보다 더 소중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바로 그 자존심이 그녀 안에서 시련을 양식으로 삼아,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로제를 자신의 주인으로 선택하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로제는 그녀에게서 언제나 빠져나갔다. 이 애매한 싸움이야말로 그녀의 존재 이유였다.
―p.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