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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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鬱憤; indignation)일상/book 2022. 1. 20. 18:38
최근 서가에서 시선을 사로잡은 신간이 필립 로스의 『울분(indignation)』이라는 작품이다. 이전에 그의 『에브리맨』이나 『죽어가는 짐승』을 읽을 때에도 그의 작품세계가 잘 이해되지 않았었는데, 『울분』에서는 공감하는 대목이 많아 그의 세계관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소설 속 주인공인 마커스와 나와 닮았다는 점이 큰 것 같다. 마커스는 자신의 삶을 바꿔보기 위해 집을 나와 먼 곳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뛰어난 두뇌와 인내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와 바라던 인생의 노선에서 점점 멀어져간다. 여기에는 자신과 맞지 않는 다른 사람 또는 상황을 경멸하는 그의 비타협적인 기질과, 한 여인에 대한 감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그의 순수함이 큰 역할을 한다. 소설에는 한국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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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 박사와 페더 교수 요법일상/book 2021. 9. 11. 21:36
처음으로 접하는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은 『타르 박사와 페더 교수 요법』이다. 원래는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책을 먼저 읽고 싶었지만, 마침 남아 있는 재고가 이 책뿐이었다. 총 스물다섯 개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언뜻 기괴스러우면서도 유머러스한 글들이라 읽는 재미가 있다. 「타르 박사와 페더 교수 요법」은 가장 먼저 등장하는 단편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작위적으로 가르는 한 인물의 광기를 통해 인간의 합리성에 물음표를 던진다. 「단평에 X넣기」, 「작가 싱엄 밥 씨의 일생」, 「블랙우드식 글쓰기」, 「곤경」은 젠체하면서도 속물적인 출판업계의 현실을 고발하는 글들이다. 「기묘천사」, 「종탑의 악마」, 「오믈렛 공작」, 「봉봉」은 재치있는 방식으로 악마를 묘사하고, 악마와 주인공의 대화 속에서 우리에게 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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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산책일상/book 2021. 3. 22. 20:16
무덤에서 평온하게 쉬기 전까지 낙엽은 얼마나 많이 팔랑거리는가! 그토록 높이 솟아 있다가 얼마나 만족스러워하며 다시 흙으로 돌아와 나무 밑동에 누워 썩어가며 새로운 세대가 자신처럼 높은 곳에서 팔랑거릴 수 있도록 영양을 제공하는가! 낙엽은 우리에게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가르쳐준다. 불멸에 대한 믿음을 자랑하는 우리 인간에게 낙엽처럼 우아하고 원숙하게 눕게 될 날이 과연 올까? 화창하고 고요한 가을날, 평온하게 손톱을 깎고 머리카락을 자르듯 육신을 버릴 수 있을까?—p. 42 사물이 눈에 보이지 않는 건 우리 시선이 닿는 곳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눈이 그쪽으로 가지 않기 때문이다. 앞을 볼 수 없는 젤리처럼 눈 자체는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넓고 멀리 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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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가 말하는 노(老), 미추(美醜), 그리고 성(性)일상/book 2016. 11. 21. 00:10
& 그림은 귀신을 물리치는 일과 같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악한 것을 몰아내려 했던 것일까? 그의 가장 오래된 자기기만? 아니면 살려고 태어났지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죽는다는 지식으로서 구원을 얻으려는 시도로 그림에 달려든 것일까? 갑자기 그는 무(無)에 빠져버렸다. 무라는 상태만큼이나 '무'라는 말소리에 빠져 길을 잃고 표류했다. 그러면서 두려움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모험 없이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는 생각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역효과를 내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별 볼일 없는 그림을 그리는 것조차도! 그는 늘 안정에 의해 힘을 얻었다. 그것은 정지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것은 정체였다. 이제 모든 형태의 위로는 사라졌고, 위안이라는 항목 밑에는 황폐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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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Beloved)일상/book 2016. 9. 27. 16:19
"백인들은 겉으로 보이는 태도가 어떻든, 새까만 피부 밑에는 예외 없이 정글이 도사리고 있다고 믿었다. 항해할 수 없는 급류, 줄타기를 하며 끽끽대는 개코원숭이, 잠자는 뱀, 백인들의 달콤하고 하얀 피를 언제나 노리는 붉은 잇몸. 어떤 점에서는 백인들이 옳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들에게 흑인들이 사실은 얼마나 점잖고 영리하고 다정하고 인간적인지를 입증하려고 기를 쓰면 쓸수록, 흑인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백인들에게 납득시키느라 자신을 소진하면 할수록, 흑인들의 마음속에는 점점 더 깊고 빽빽한 정글이 자라났으니까. 하지만 그 정글은 흑인들이 어디 살 만한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백인들이 흑인들의 마음속에 심어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정글은 자라났다. 퍼져나갔다. 삶 속에, 삶을 통해, 삶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