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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Beloved)일상/book 2016. 9. 27. 16:19
<빌러비드/토니 모리슨>
"백인들은 겉으로 보이는 태도가 어떻든, 새까만 피부 밑에는 예외 없이 정글이 도사리고 있다고 믿었다. 항해할 수 없는 급류, 줄타기를 하며 끽끽대는 개코원숭이, 잠자는 뱀, 백인들의 달콤하고 하얀 피를 언제나 노리는 붉은 잇몸. 어떤 점에서는 백인들이 옳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들에게 흑인들이 사실은 얼마나 점잖고 영리하고 다정하고 인간적인지를 입증하려고 기를 쓰면 쓸수록, 흑인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백인들에게 납득시키느라 자신을 소진하면 할수록, 흑인들의 마음속에는 점점 더 깊고 빽빽한 정글이 자라났으니까. 하지만 그 정글은 흑인들이 어디 살 만한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백인들이 흑인들의 마음속에 심어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정글은 자라났다. 퍼져나갔다. 삶 속에, 삶을 통해, 삶 이후에도, 정글은 자라났고 그걸 만든 백인들을 침범하기에 이르렀다.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건드렸다. 변화시키고 바꿔놓았다. 심지어 그들이 원한 것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어리석고 악하게. 백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정글을 무척 두려워했다. 끽끽대는 개코원숭이는 바로 그들의 새하얀 피부 밑에서 살고 있었다. 붉은 잇몸은 바로 그들의 것이었다."
"태초부터 살았던 백인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그 작자들이 빠뜨려 죽인 우리 흑인들이 더 많을 게다. 그러니 네 칼을 내려놔. 이건 싸움이 아니야. 참패지."
연일 미국에서 백인경관에 의한 총격사건으로 소란스럽다. 얼마 전에는 미네소타에서 페이스북을 통해 흑인에게 총을 겨누는 경관의 모습이 생중계되더니, 이번에는 그저 책을 소지하고 있던 무고한 흑인시민이 백인경관의 총격에 목숨을 잃었다. 태평양 건너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시각에서 볼 때, 총기를 전량 회수하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 아닌가 싶지만, 일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적지 않은 미국시민들은 총기 소유가 자신들의 호신(護身)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단다. 반드시 총이라는 살상무기까지 호신에 동원돼야 하나 싶지만, 총기의 사적소유를 전면금지하기에는 이미 '총기'라는 것이 그들의 삶에 익숙한 '무엇인가'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총기 소유에 대해 언급한 수정헌법 제2조에 대한 찬반 논쟁은 아직까지도 끝나지 않고 있다.
문제는 이 총기라는 것이 살상을 불러오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특히 경관에 의한 총기사용에 국한시켜 보았을 때, 그 희생양의 비율상 흑인이 다수를 차지한다. 흑인들이 너나할 것 없이 가두시위를 벌이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흔히 공권력 행사를 위해 총기사용은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근거 중의 하나가, 경관의 총기사용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의 수는 흑인보다 백인이 많다는 데이터다. 그러나 이 데이터는 심각한 결함을 갖고 있으니, 미국인구 비율상 여전이 백인이 대다수를 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구비율을 감안했을 때, 경관의 총기사용에 희생되는 비율은 흑인이 백인을 훨씬 상회한다. 흑인들이 분노하고 또 분노하는 이유다.
이 책은 마치 영화 <노예 12년>을 보는 느낌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비참한 느낌이 들었다. <앵무새 죽이기>의 하퍼 리도 흑인차별의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드는 생각: 흑인의 경우 그나마 후손들이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그들의 선조들이 겪었던 온갖 고초를 문학 또는 문학이 아니더라도 다른 매체를 통해 전달하고 있다. (또는 처절하게 고함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보호구역에 갇혀 지내고 있는 원주민(인디언)들의 후손들은...? 피와 철(鐵)로 점철된 그들의 역사는 보호구역이라는 철망에 가로막혀 제대로 된 조명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하나는 소수의 목소리라도 내고 있다면, 다른 하나는 아예 목소리를 상실했다.
그러니까 불과 150년 전까지도 공공연히 자행됐던 모든 폭력과 학살은 백인들이 누리는 경제적 번영에 가려 충분히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 힘을 가진 자는 계속해서 그 힘을 손아귀에 쥐고, 힘이 없는 자는 그 털끝만치에도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인종을 떠나 안타까운 일이다.
소설이 쓰인 방법은, 한때 라틴 아메리카에서 유행했던 마술적 사실주의—환상문학—을 떠올렸다. 예를 들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읽으면 글이 담고 있는 비극적 내용과 대비되게 글이 쓰인 방식 자체는 환상적이고 경쾌한 느낌마저 든다. 이 소설이 그러하다. <백 년 동안의 고독>보다도 더욱 마술적이고 영적인 요소를 집어넣었다. 등장인물인 흑인들이 겪는 비극이 더욱 돋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책의 제목이자 등장인물의 이름부터가 BELOVED. 사랑받아 마땅한 그녀. 그러나 철저히 이용되고 유린당한 그녀. 그리고 백인들이 채워놓은 족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인간성'을 지불한 흑인노예들. 책을 읽다보면 어느 순간에 서술관점이 바뀌어 있고, 현실적 기법과 초현실주의적 기법을 자유롭게 넘나들어서 책을 읽는 재미가 있다. 채찍질로 등에 난 흉터를 나무에 비유하는 장면은, 몇 달 전 읽었던 <채식주의자>의 '나무' 모티브를 떠올리게도 했다. 참으로 신기한 소설이다. 어떻게 이런 다채로운 기법으로 물 흐르듯 글을 적어내려갔는지 신기하다. 덕분에 푹 빠져서 읽었지만, 읽는 내내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상처가 어디까지일지 물음표를 던지게 하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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