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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과학/스티븐 핑커 외/와이즈베리>
요즘 고등학생의 8할이 이과를 택한다고 했던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청년 실업난이 고등학교 교실의 풍경마저 바꿔 놓고 있다. 한편 오늘날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인문학의 지평마저 바꿔놓을 기세다. 그런 면에서 여러 학자들의 연구주제를 하나의 글로 엮어낸 이 책은 무척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요컨대 인문학의 영역에서 논의해온 도덕, 감정, 이성의 문제를 뇌과학 연구를 통해 설명낼 수 있다는 것이다. 칸트의 일반의지마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대목에서는 정말이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여전히 '가치'가 충돌하는 영역이 있다는 여지를 남겨두고는 있지만, 지구상의 모든 동물 가운데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다고 여겨져온 '생각'이라는 것을 과학으로 환원하여 설명할 수 있다는 이들의 주장은 어딘가 씁쓸하기도 하고 너무 자신만만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반 세기 남짓의 짧은 시간 동안 세계 각지의 뇌신경과학자들은 마음을 과학적 방법으로 확인하는 데 상당한 진척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과학서적이다 보니 용어가 생소해서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그래도 주석이 매우 꼼꼼하게 달려있다), 그 동안 인문학의 전유물로 여겼던 주제—도덕, 이성, 감정 등등—들을 이제는 과학의 관점에서 뒤집어 생각해봐야 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책의 절반을 넘어가면서부터 관심을 끌은 글들이 많이 보였는데, 여러가지 흥미로웠던 글들 가운데 두 가지 정도를 추려서 소개한다.
제8장 에우다이모니아: 좋은 삶 마틴 셀리그먼
"성공은 약점을 바로잡았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잘하는 것 한두 가지를 찾아내어 문제에 대처하는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목적을 가진 프로그램은 모두, 설령 점점 목표에 근접하는 식으로 성공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0에 근접할 뿐이다. 반면에 우리는 밤에 자려고 누워서 어떻게 하면 -5에서 -2로 올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 않는다. 대개는 +2에서 +6으로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다. 나는 이를 다루는 과학이 전혀 없다는 점에 흥미를 느꼈다. 모든 과학은 부정적인 것을 바로잡는 치유적인 것이었다."
긍정심리학을 창안한 마틴 셀리그먼은 사람들을 불행에서 구제하는 것보다 더 행복한 상태에 올려놓는 데 과학이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학자다. 그는 행복의 종류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 즐거운 삶(pleasant life)으로서 긍정적인 감정을 가능한 많이 지니는 삶이다. 둘째,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좋은 삶(eudaemonia)으로 이는 몰입(flow)을 일으키는 근원들로 이루어진다. 즉 자신의 대표적인 강점이 무엇인지를 안 뒤에 그것들을 더 활용할 수 있도록 재편하는 삶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의미를 추구하는 삶'을 소개하는데, 이 마지막 유(類)의 삶이 우리를 곧잘 초조함과 불안상태에 빠지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말한다. 우리 인간은 항상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에 대해 애착을 갖는다. 그는 오로지 '의미'의 관점에서 볼 때, 이라크에 참전한 병사도 의미있는 삶이고, 이슬람극단주의의 테러리스트도 의미있는 삶이라는 꽤 급진적인 논지를 내놓는다. (거칠게 말하자면 악한 것은 악한 것대로 악한 의미를 갖고 있다는 의미다)
그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인간을 조금이라도 더 행복한 상태에 위치시키는가 하는 것인데, 이에 관해 즐거운 삶에 이를 수 있는 약은 물리적으로 개발 가능하다고 말한다. 단적으로 이미 마약만 해도 사람에게 말초적인 쾌락을 제공한다. 한편 좋은 삶에 이르기 위한 '몰입'을 유도할 약은 개발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개인에게 '의미'를 부여할 만한 약이 개발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대신 그가 강조하는 것은 위약(僞藥)에 의한 플라시보 실험에서 드러나듯, 자신의 삶 속에서 충분히 몰입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의 여부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고, 특히나 평소 감사하는 마음을 자주 가질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내용이 긍정심리학의 큰 맥을 이룬다. 그러고 보면 결국 원론적인 얘기를 되풀이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행복의 카테고리를 명료하게 구분하고, 각각의 행복에 이르는 길을 명확하게 설명한 글을 읽고 나니, 과연 나를 괴롭혔던 것도 '어떤 의미'에 대한 집착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흔히 그것을 '이상과 현실의 괴리'라고 부르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동안 나도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살리는 것보는 결여된 부분을 메우는 데 치중하느라, 진정한 역량을 키우는 데에는 소홀했던 것이 아닌가 되돌아볼 기회가 되어서 기억에 남는 글 중 하나다.
제15장 몸의 철학 조지 레이코프
"우리는 신경체(neural being)입니다. 우리 뇌는 몸의 나머지 부위로부터 입력을 받습니다. 따라서 우리 몸이 어떻게 생겼고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생각할 때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이 짜여집니다. 우리는 아무것이나 생각할 수가 없어요. 우리 몸에 박힌 뇌가 허락하는 것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 엮인 여러 편의 글 가운데 가장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글이었다. 지난 2500여년간 인간이 발달 시켜온 사상은 비체화(非體化)된 것들에 불과하며, 앞으로는 체화(體化)된 철학이 발달할 것이라고 조지 레이코프는 예상한다. 표현이 좀 어렵지만 그가 이러한 이론을 내세우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a.마음은 본래 체화해 있다 b. 생각은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졌다 c.추상 개념은 대개 은유적이다. 여전히 어렵다. 다시 한 번 그의 논지를 쉽게 풀어보자면, 철학에서 다루는 선험적 명제들이 사실은 전혀 선험적이지 않으며, 그러한 추상적 관념과 범주, 이성의 매커니즘마저 뇌와 몸의 감각운동계를 통해 설명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지 레이코프가 말하듯, 이러한 발견이 과학과 철학의 결별 또는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다만 철학을 다루는 접근방식에 일대의 패러다임 변화가 생길 것이라 말한다.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 데카르트가 말한 이성, 루소가 말한 자유의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새로운 방식—뉴런회로 연구—를 통해 그 본질을 규명하는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지과학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철학 뿐만이 아니다. 그는 수학에서 다루는 추상적 도형과 점선과 같은 개념들, 현대물리학에 전환점을 마련했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까지도 은유적—'직관적' 또는 '선험적'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한다. 이 또한 fMRI로 뇌속의 회로를 촬영하고 몸의 반응을 살핌으로써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증명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는 책을 직접 읽어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마치 신의 세계에 살고 있던 중세의 유럽인들이, 르네상스를 통해 인간적 가치를 소생시킨 것에 비견되는 변화의 전조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사실은 이런 식의 접근방식이 아직까지는 낯설다. 나는 아직 기존의 철학과 사상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지식—뇌과학—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의 전문가 뿐이기 때문에, '마음의 과학'이라는 것이 정말 주류 패러다임으로 자리매김한다면, 그러한 변화에서 힘을 지니는 계층은 누가 될지, 그리고 그러한 변화가 일상에 미칠 파급효과는 무엇인지 기대 반 걱정 반의 생각이 든다.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예견했듯이 과학을 통해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게 인간에게 득이 될지 독이 될지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하루가 멀다하고 혁신적인 기술이 쏟아지는 이 시대에, '진짜 혁신'이 될 만한 변화는 무엇일는지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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