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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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독후감 세 편일상/book 2022. 7. 15. 16:21
『토지』, 박경리 1부에 비해 2부에서는 무대공간이 확연히 넓어졌다. 1부에서는 지리산 자락 하동이 무대의 전부였다면, 2부에서는 서울은 물론 간도와 연해주, 중국을 아우르는 공간적 무대가 펼쳐진다. 빠른 공간적 팽창에 맞물려 서사도 숨가쁘게 흘러가는 듯하다. 김훈장의 죽음, 길상과 서희의 혼인은 무너져가는 구한말의 신분제를 보여주는 한편, 조준구의 몰락과 김두수의 등장은 외세와 결탁한 기회주의자들이 전면에서 움직이는 당시의 혼탁한 사회상을 잘 보여준다.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이 소설은 중학교 때 『상실의 시대』라는 이름으로 된 책으로 읽은 적이 있다. 지금에 와서 드는 생각은 원제인 『노르웨이 숲』을 『상실의 시대』라 번안한 건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독자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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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8일상/book 2022. 5. 30. 05:25
“……그네들의 종교는 신비라기보다 실질이오. 일찍이 우리 신라 중들이 당나라 불교계를 주름잡았던 일은 오늘 이 시점에서도 납득될 수 있는 일 아니겠소? 그들에게는 신비하거나 황당무계한 것에도 육신의 활동이 따르는 법이오. 중들이 무예를 익히는 것 소위 도술이지요. 살생계를 범하고 드는 게지요. 우리 조선 중, 의상이나 원효에게서 피비린내를 생각할 수 있겠소? 종교의 본질로 봐서는 우리 쪽이 깊다면 깊은 거지요. 우리 조선에선 유교만 해도 그렇지요. 학문으로서만 높이 올라갔고 실생활에서는 도통 쓸모가 없었어요. 그야 실학을 도외시하고 예학만을 숭상하였으니 일반 백성들에겐 조상의 묘 지키는 것과 선영봉사 하는 것 이외 가르친 것이 없구요. 충절까지도 선비들이 독점하였으니, 동학은 또 어떠한가 하면은 천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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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7일상/book 2022. 4. 29. 04:27
"바람도 번뇌요 시냇물도 번뇌요, 산새들 짐승울음, 철 따라서 피고 지는 산꽃들, 그 어느 하나 소리와 형체를 겸하지 않는 것이 없을 터인데 심산유곡이라고 현세가 아니란 말이가, 사시장철 목숨의 소리들은 충만하여 있거늘," —p. 97~98 김주사도 되고 김선생도 되고 김길상 씨도 되고 면전에서 웃고 굽실거리는 얼굴들이 돌아서면은 퇴! 하고 침 뱉어가며 하인 놈 푼수에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르더라고 거들먹거리는 꼴 눈꼴시어 못 보겠다, 고작 한다는 말이 그 말일 터인데. 서희라고 예외일 수 있는가. 시기와 조롱을 면전에서는 교묘히 감추는 뭇시선 속에 상처받기론 마찬가지다. 그 상처를 서로 감추고 못 본 첫한다. 왜 드러내 보이고 만져주고 하질 못하는가. 길상은 가끔 옥이네와의 생활을 생각할 때가 있다. 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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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5일상/book 2022. 2. 28. 06:31
객줏집을 나선 길상은 아무도 없는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접어든다. 역시 강아지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길, 사람도 시가도 모두 피곤한 잠에 빠져 있는 것이다. 불타버린 폐허 옆을 지나간다. 군데군데 쳐놓은 이재민의 막들이 보채다 잠이 든 아기같이 적막 속에 엎드려 있다. 구릉진 곳을 휘청휘청 올라간다. 자작나무 몇 그루를 지나서 바위 옆에까지 간 길상은 바위에 등을 기대고 가물거리는 별들을 오랫동안 올려다본다. 도대체 얼마나 오랜 세월을 별들은 저렇게 가물거리고 있었더란 말인가. 시가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방금 지나온 그 자리가 희미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무너지고 재가 되고 폐허로 변한 곳, 저 잿더미는 죽음일까? 저 사물의 변화는 과연 죽음일까? 끝이 없는 세월과 가이 없는 하늘은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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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4일상/book 2022. 2. 24. 19:06
개명(開明)에의 물결은 시시로 일고 있었으나, 그것이 일개 정권욕을 위한 이용물이든 외래 문물에 대한 그릇된 가치관이든 혹은 진실한 우국충정의 개혁운동이든 하여튼 개명의 물결은 오백 년 왕실을 주축으로 하여 썰물 밀물같이 밀려왔다가 밀려가곤 했는데 물론 역사의 필연의 과정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 혹은 신의 의지는 공명정대의 역학(力學)을 기간(基幹)으로 하되 잔가지 잔뿌리는 역사의, 신의 의지 밖에서 우연과 변칙이 시간 공간 속을 소요(逍遙)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고 다만 필경에는 우여곡절하여 그 기간으로 귀납될 것을 신이나 역사 그리고 예지의 사람들이 알고 있으며 믿고 있을 뿐이다. 지금 동방의 작은 등불 같은 조선의 백성들은 동트는 하늘을 바라보기 위해 새벽잠을 깨고 자리에서 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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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3일상/book 2022. 2. 6. 06:58
‘짐승이나 사램이나 버려지라 카더라도 이 세상에 한분 태어났이믄 다 같이 살다 죽어얄 긴데 사램은 짐승을 부리묵고 또 잡아묵고, 호랭이는 어진 노루 사슴을 잡아묵고 날짐승은 또 버러지를 잡아묵고 우째 모두 목심이 목심을 직이가믄서 사는 것일까? 사램이 벵드는 것도 그렇지마는 짐승들은 와 벵이 드까. 사람은 약도 지어묵고 침도 맞고 무당이 와서 굿도 하지마는 말 못하고 쫓기만 댕기는 짐승들은 누가 그래 주꼬. 늘 혼자 사는데, 벵이 들믄 짐승들은 산속이나 굴속에서 혼자 죽겄지. 혼자 울믄서 죽겄지. 아아 불쌍한 짐승들아! 사람같이 나쁜 거는 없다.’ —p. 95~96 사철이 음산한 바람과 빛깔에 덮여 있는 것 같았고 두텁고 무거운 외투자락과 털모자와 썰매의 북국(北國)에서 이동진은 그네들의 문물제도를 착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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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일상/book 2022. 1. 27. 05:20
“기즉부(饑則附)하며, 포즉양(飽則颺)하며, 욱즉추(燠則趨)하며, 한즉기(寒則棄)는 인정통환야(人情通患也)라 하나 땅이야 어디 그런가? 사시장철 변함없이 하늘의 뜻과 사람의 심덕을 기다리고 있네.”—p. 178 “몽매한 백성이란 저승이든 이승이든 그 대가가 확실해야 움직이는 무리들이고 제 이익과 관계가 없으면 관여치 않는 꾀가 있는 놈들이오. 말하자면 그들에겐 지조가 없단 말이오. 존엄이 없단 말이오. 존엄이나 지조를 위해서 목숨을 거는 무리들은 아니란 말이오. ……상놈들한테 아첨하는 개 같은 양반 놈이나 자비를 베푸는 늑대 같은 양반 놈이나 그게 다 한 무리가 아니겠소? 그놈들은 또 제 목숨만 보전된다면 의관이고 족보고 다 싸질러서, 백정이라도 해먹을 놈들이지.” —p. 206 어느 해, 마을에는 가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