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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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Passion simple)일상/book 2023. 4. 22. 10:52
나는 이 관능적인 소설이 말하는 “단순한 열정”은 "기다림(Attente)"이라 생각한다. 작가는 이 "기다림"에 두 가지 행위를 빗댄다. 첫 번째는 소설 속 화자가 한 남자를 사랑하며 경험하는 "기다림"이고, 두 번째는 글을 쓰며 소환되거나 소거되는 감각으로써 "기다림"이다. 어느 행위이든간에 소설 속 "기다림"이라는 것은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다. 기다림은 실체다. 몸에 각인된 것이고 뇌리에 뿌리박힌 것이다. 작가에게 그 남자를 기다리는 것은 멈출 수 없는 것,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말한다, 자신도 멈추는 법을 모르겠다고. («Je ne sais pas si je m’arrêterais.»—p.18) 마치 고삐 풀린 것처럼 그녀는 그 남자에 대한 기다림을 멈추지 못하고, 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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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일상/book 2020. 5. 1. 21:50
버지니아 울프의 을 읽은 뒤 이 책을 집어든 것을 순전히 우연의 일치라 해야할지…… 집을 나서며 가장 얇은 책을 고른다는 것이 아니 에르노(Annie Ernaux)의 . 이전에 읽다 만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의 을 떠올리게 하는 책 제목 때문에, ‘사건의 반전(反轉)’이나 ‘인식의 환기(喚起)’가 압축적으로 담긴 글을 잠시 기대했던 것 같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이 책만큼 어떠한 인식을 환기시키는 글도 없지만. 임신 중절을 시도하는 어느 대학생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버지니아 울프의 글과 매끄럽게 이어진다. 글에는 뱃속 아이의 아빠에 대한 부분이 사실상 도외시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화자의 행위와 감정 그 자체에 온전히 집중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차우셰스쿠 독재통치 하 불법적으로 임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