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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Passion simple)일상/book 2023. 4. 22. 10:52
나는 이 관능적인 소설이 말하는 “단순한 열정”은 "기다림(Attente)"이라 생각한다. 작가는 이 "기다림"에 두 가지 행위를 빗댄다. 첫 번째는 소설 속 화자가 한 남자를 사랑하며 경험하는 "기다림"이고, 두 번째는 글을 쓰며 소환되거나 소거되는 감각으로써 "기다림"이다. 어느 행위이든간에 소설 속 "기다림"이라는 것은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다. 기다림은 실체다. 몸에 각인된 것이고 뇌리에 뿌리박힌 것이다.
작가에게 그 남자를 기다리는 것은 멈출 수 없는 것,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말한다, 자신도 멈추는 법을 모르겠다고. («Je ne sais pas si je m’arrêterais.»—p.18) 마치 고삐 풀린 것처럼 그녀는 그 남자에 대한 기다림을 멈추지 못하고, 그에게 보내는 편지에 삭선을 덧붙이면서도 쓰는 행위를 멈추지 못한다.
그녀에게 이런 단순한 열정을 지니며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글을 쓰는 것과 같아서, 이 두 행위는 하나의 장면을 완성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상응한다. (Souvent, j’avais l’impression de vivre cette passion comme j’aurais écrit un livre: la même nécessité de réussir chaque scène, le même souci de tous les détails.—p.23) 그녀는 이 남자를 기다리는 행위를 통해 글로써 구현될 장면을 머릿 속에 그리고 또 그린다.
이런 단순한 열정은 파르르 떨리는 진자처럼 아슬아슬한 것이지만, 바로 그 긴장감이 있음으로 해서 견뎌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녀는 그 점을 인지한다. (J’accumule seulement les signes d’une passion, oscillant sans cess entre «toujours» et «un jour», comme si cet inventaire allait me permettre d’atteindre la réalité de cette passion.—p.31) 곧 끊어질 것처럼 팽팽해진 실 가까이 날카로운 사물을 들이대는 것처럼, 그녀는 남자를 향한 기다림에 모든 관심을 쏟는다.
이런 욕망, 즉 단순한 열정이 저지된다는 것은 삶의 가장 큰 기다림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할 정도로 그녀의 일상을 좌우한다. (Sans cess le désir de rompre, pour ne plus être à la merci d’un appel, ne plus souffirr, aussitôt la représentation de ce que cela supposait à la minute même de la rupture: une suite de jours sans rien attendre.—p.45) 한 가지 얻을 수 있는 그녀의 글이 담고 있듯이 이런 단순한 열정은 일말의 고통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그 남자가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게 됨으로써 팽팽히 당겨진 가냘픈 실처럼 당겨진 그녀의 인내심은 매순간 도마 위에 오른다.
이런 그녀의 상태를 소설에서 가장 잘 보여주는 건 글에 활용되는 시제다. 소설에는 과거 상태를 표현할 때 복합과거 시제는 거의 쓰지 않고 반과거(l’imparfait) 시제만을 사용한다. 그녀는 말한다, 그녀가 어느 시점부터 어느 시점까지 이 남자를 기다렸는지 알 수 없는데 반과거를 쓰지 않을 수 있겠냐고. (Je passe de l’imparfait, ce que était—mais jusqu’à quand?—, au présent—mais depuis quand? —faute d’une meilleure solution. Car je ne peux rendre compte de l’exacte transformation de ma passion pour A., jour après jour—p. 66~67)
소설은 미래 시제로써 끝나는데, 그녀의 무구함이 끝날 것이라 예언하고 있다. (Quand je commencerai à taper ce texte à la machine, qu’il m’apparaîtra dans les caractères publics, mon innocense sera finie.—p.70) 그녀의 결백이 끝장남으로써 유감이라는 것인지 후련하다는 것인지는 그 맥락은 중의적이다. 학창시절 누가 볼까 걱정할 필요 없이 공책에 숨겨 쓰던 비밀 일기에 그녀의 글을 빗댄 걸 보면 한편으로는 드러내보이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던 것 같기도 하지만, 결국 그 대상이 무엇이든지 간에 가장 순수한 형태의 기다림을 묘사함으로써 한 남자와 글쓰기에 대한 단순한 열정을 드러내는 데는 효과적이었던 글이다. 기다림의 미학보다도 기다림에 대한 폭로라는 말이 더 적합할 법한 도전적 소설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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