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갑오경장은 형식이나마 천인(賤人)의 면천 조치를 취했고 이어 동학란이란 거센 바람도 신분제도, 그 오랜 폐습을 완화하는 데 이바지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뿌리 깊은 천인들의 애사(哀事)가 일조일석에 달라질 수는 없는 것이다. 역인(驛人), 광대, 갖바치, 노비, 무당, 백정 등 이들은 변함없는 천시와 학대를 받는 것이었고, 양반이 상민을 대하는 것 이상으로 상민들은 그들 천민 위에 군림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백정이라면 거의 공포에 가까운 혐오로 대했으며 학대도 가장 격렬했었다. p. 199
“호랑이가 늑대를 잡아먹고 늑대는 고라니를 잡아먹고, 짐승들 세계와 뭐가 다르다 하겠습니까. 그것이 자연의 법이라면 우리가 하는 일,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모두 헛된 꿈이지요. 인간이 인간을 다스린다는 것이 횡포라면 말입니다. 추악합니다!” p. 209
용솟음치는 용기와 굳은 신념과 영원히 이 길을 가리라 결의하는데 그 모든 사나이다운 의지 뒤에서 흐느끼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한이다. 아비에 대한 한, 또 자기 자신에 대한 한이다. 아니 자기 자신에 대한 슬픔이다. 그 한과 슬픔은 의지처럼 결의처럼 크게 울려 퍼지는 징 소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꽹과리 소리인가. 감정은 모두가 미진하다. 미진한 것뿐이다. 목구멍까지 울음이 차오르는데 통곡도 못하고 눈물도 흘릴 수 없는 적막한 겨울 바다만 같은 느낌을 석이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p. 225
서희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나비가 날아가버린 번데기, 나비가 날아가버린 빈 번데기. 긴 겨울을 견디었건만 승리의 찬란한 나비는 어디로 날아갔는가? 장엄하고 경이스러우며 피비린내가 풍기듯 격렬한 봄은 조수같이 사방에서 밀려오는데 서희는 자신이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지 않는가 하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실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어느 곳에도 없었다. 서희는 죽음의 자리에서 지난 삶의 날을 생각하듯이, 사랑을 잃었을 때 사랑을 생각하듯이, 회진(灰塵)으로 화해버린 집터에서 아름답고 평화스러웠던 집을 생각하듯이, 어둠 속엣 광명을 생각하듯이, 그러나 서희에게는 생각할 뿐, 기구(祈求)가 없는 것이다. p. 229~230
잊고 싶지 않은 일들, 잊어서는 안 될 일들은 어찌하여 멀어져가고 거짓말 같이 기억에서 멀어져만 가는 걸까. p. 290
“실상 넌 지나치게 순수한 것을 원하고 있다. 물론 너 어머니 성질이 남다른 것을 알긴 알지. 그만큼 너 자신도 성질이 남다른 데가 있는 게야. 순수한 것이 아니면은 다 부숴버리고 싶은. 그래서 너 자신을 짓이기고 있는 게야.” p.307
“물이란 많으면 골짜기를 채우지만 적을 때는 깊은 곳에서만 넘쳐흐른다.” ……“물이 고이면 썩듯이 재화도 고이면 썩어!” p.313~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