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일상/book 2023. 3. 19. 11:31
모가지가 긴 초병과 나뭇결이 고운 장롱과 이 조화롭던 윗방이 잃어버린 낙원의 한 장면처럼 가슴 뭉클하게 떠올랐다. 천 년을 내려온 것처럼 안정된 구도에 익숙해진 나의 심미안에 조약한 원색으로 처바른 반닫이는 너무나 생급스러웠다.
—p.56
말세의 징후가 도처에 비죽거리고 있었다. 나하고 동갑내기를 멀리 시집보낸 소꿉동무 엄마가 나를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 내 나이에 시집을 가다니. 그때 나는 겨우 열네 살이었다. 그러나 시골에선 조혼이 유행이었다. 극도의 식량난으로 딸 가진 집에선 한 식구라도 덜고 싶은데 정신대 문제까지 겹치니 하루빨리 치우는 게 수였고, 아들 가진 집에선 병정 내보내기 전에 손이라도 받아 놓고 싶어 했으니까.—p.179
개성에 미군이 들어온 건 삼팔선을 잘못 그어서 그렇게 된 거라면서 느닷없이 미군이 철수하고 소련군이 주둔을 했다. 미군이 진주하기 전부터도 개성엔 미군이 들어올지 소련군이 들어올지 예측을 할 수가 없을 만큼 삼팔선이 아슬아슬하게 지나가고 있다면서 과연 어느 쪽이 들어오는 게 유리할까 흥미롭게 예상도 하고 논쟁도 하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지만 삼팔선이라는 추상적인 선이 현실적으로 어떤 구속력을 갖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p.208
그 시기가 내 성장기의 매듭처럼 회상되는 것은, 어떤 의식을 가지고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기 시작한 시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실상 그때 우리가 날뛴 것은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닌 학교 재단 문제일 수도, 미 군정이 밀가루나 드롭스처럼 흥청망청 쏟아부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앓은 배탈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었다.—p.228
우러나오지 않은 예찬과 열광처럼 사람을 지치게 하는 일도 없었다. 몸에서 서서히 생기가 증발해 가고 있다는 걸 현저하게 느꼈다. 같은 교시를 읽고 또 읽으면서도 처음과 다름없는 고조된 열광을 유지해야 했고 새로 나오는 교시 또한 그 소리가 그 소린데도 열광에다 새로운 불을 지펴야 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가능했다면 그건 틀림없이 가짜였을 것이다. 가짜를 좋아하는 수령은 얼마나 멍텅구리일까.
—p. 286
자랑스러운 반공주의자 내에서도 도강파(渡江派)라는 특권계급이 생겼났다. 시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꾀어 놓고 떠난 사람들 같지 않게 안하무인이었다. 어쩌면 자기 잘못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에 선수를 치느라고 그렇게 위세를 부리는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친일파의 정상은 그렇게도 잘 참작해주던, 그야말로 성은이 하해와 같던 정부가 부역에는 그다지도 지엄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p. 293
나는 밤마다 벌레가 됐던 시간들을 내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며 몸부림쳤다. 그러다가도 문득 그들이 나를 벌레로 기억하는데 나만 기억상실증에 걸린다면 그야말로 정말 벌레가 되는 일이 아닐까 하는 공포감 때문에 어떡하든지 망각을 물리쳐야 한다는 정신이 들곤 했다.
—p. 295
승리의 시간은 있어도 관용의 시간은 있어선 안 되는 게 이데올로기 싸움의 특성인 것 같다.
—p. 301
'일상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순한 열정(Passion simple) (0) 2023.04.22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0) 2023.04.13 행복한 향수(La Nostalgie heureuse) (0) 2023.01.05 욥기 (0) 2022.12.05 미완(未完)의 제국 이야기 (0) 2022.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