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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만남여행/2021 봄 원산도 2021. 5. 1. 01:08
계획없이 내려와서 갈아입을 옷가지조차 챙겨오지 않았지만, 정말 생각없이 내려왔구나 하고 느꼈던 게 챙겨온 카메라를 꺼내들었을 때였다. (아차차) 카메라와 충전기를 따로 챙겨왔는데, 충전기의 로고를 보니 예전 카메라 것이었다. 충전기도 잘못 들고 왔을 뿐만 아니라 카메라도 안을 열어보니 배터리 자체가 없다. 유일하게 챙겨온 것이라곤 카메라 하나인데, 별 도리도 없어서 사진에 대한 생각은 일찌감치 접어버렸다.
같은 숙소에 머물렀던 투숙객은 나와는 정반대여서 준비성이 아주 철저했다. (아마 자동차를 끌고 왔기 때문에 나보다 훨씬 많은 짐을 가져올 수 있었을 것이다.) 휴대용 프렌치프레스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그라인딩된 원두를 붓는다. 잠깐 시간을 들여 내게 커피를 내어준다. 프렌치프레스로 추출해서 그런지 훨씬 맛이 진하다. 진한 풍미를 좋아하니 내게는 딱 맞다. 사진촬영을 찾는 사람이 많은 성수기에 잠시 짬을 내어 여행을 왔다던 그는 사진기사였다.
여행길 위에서는 이름도 모르고 스쳐지나가지만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 참 많다. 심지어는 통성명을 했는데도 이름은 새까맣게 잊은 채 그 사람의 분위기와 표정만이 남을 때가 있다. 그렇다, 얼굴에 대한 기억조차 희미한데 그 사람이 풍겼던 분위기와 표정, 말투 같은 것들이 아주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종종 공명(共鳴)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강렬한 인상을 받는다. 제주도 둘레길에서 만났던 컴퓨터 엔지니어 아저씨, 스페인에서 돌아오는 비행편에서 만난 이름 모를 아저씨. 불쑥 기억을 비집고 들어오는 인연들.
지하철 플랫폼에 멍하니 서 있거나 할 때 가끔 그들과 나눴던 대화와 좋은 인상이 떠오른다. 그중에서도 스페인에서 돌아오는 비행편에서 만난 아저씨는 아마 더 동행할 수도 있었을 텐데 수하물을 찾는 곳에서 자신의 짐이 오래도록 나오지 않아 먼저 가보라며 나와 황망하게 헤어졌었다. 그런 만남들은 완전하지 않아서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뇌리에 각인된다. 제주도에서 며칠 함께 여행길을 했던 컴퓨터 엔지니어 아저씨는 매우 수줍음을 타는 성격이면서도 내게 언제 한 번 서울에 가면 번개라도 하자고 했다. 이제는 그 아저씨의 나이만큼은 아니지만—아마 내가 20대 초반이었을 당시에 아저씨의 나이가 40대 정도 되었었다—그런 기약이라면 너무나도 흔해서 멀리에서 불어오는 메아리만도 못한 울림이라는 걸 깨달을 만큼의 나이는 되었다. 그렇지만 이들이 지금 당장 내 앞에 튀어나온대도 나는 누가 누군지 전혀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희한하게도 잊어버린 것들은 그들의 이름과 얼굴들이므로.
싱긋 웃으며 커피를 내어주는 이 사진기사는 어떤 기억으로 남을지 모르겠다. 짐작건대 내 머릿속에 오래 머무를 사람은 아닐 것 같다고 결론을 내린다. 떫은 맛이 채 혀에서 가시기도 전에 옆으로 가방을 걸쳐 멘 채 인사를 고한다. 내면의 초조함, 정리되지 않은 구상 같은 것들을 벌써 알아차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서로 환히 웃어보이며 짧은 인삿말을 나눈다. 순식간에 이런 단호함, 체념, 또는 자기확신(또는 오만함)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어젯밤 숙소에 오면서 가장자리조차 보이지 않았던 흙길을 따라 숙소를 빠져나온다. (지도상으로 검색한 길이지만 길로 표시조차 되지 않는 후미진 길이었다.) 전날부터 하늘에 낮게 드리운 양떼구름은 날짜가 바뀌어도 흩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영목항을 나설 때에는 벌써 늦은 오후였다.
여하간 이제는 무엇도 시야를 가리지 않는 바다로 향할 차례였다. 어떠한 미진함도 불완전함도 없을 바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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