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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목항으로여행/2021 봄 원산도 2021. 5. 4. 09:05
좁다란 골목을 빠져나와 선촌 선착장에 다다랐을 때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부두 위에 흉물스럽게 방치된 녹슨 닻이다. 로고나 심벌로 ‘닻’을 본 적은 자주 있지만 실물로 닻을 보니 잠시 인지부조화가 일어나는 듯하다. 구릿빛으로 얼룩덜룩 녹이 슨 닻이 뭉텅이로 쌓여 있는데, 그 크기가 기우뚱하게 있는 바로 옆 가로등과 비슷하다. 선촌항 맞은편으로는 가까이에 효자도가 보이고, 몇 편의 작은 어선이 아무런 규칙과 상관 없이 정박되어 있다. 영목항보다도 한결 사람의 기척을 느낄 수 없는 곳이다.
다시 원산안면대교로 향하기 위해서는 야트막한 고개 하나를 넘어야 한다. 시골집에는 어딜 가나 개를 키우는 모양이다. 골목을 가로지를 때마다 개짖는 소리가 저마다의 울음으로 들려오고, 때로는 짖는 개를 나무라는 노인들의 성난 목소리도 들려온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무렵이고, 고개 너머로 높다랗게 자란 활엽수에는 아직 어린 잎사귀들이 진한 햇빛을 받아 개나리처럼 바들바들 흔들린다. 고개를 지나면 화강암 지반을 깔끔하게 도려낸 공사현장이 나타난다. 섬의 멜론의 속살처럼 샛노란 흙더미가 적나라하게 입을 벌리고 있다. 어딜가나 토목공사가 경기 부양에 도움이 되는 모양이다.
다시 원산안면대교로 올라와 아까와는 다른 각도에서 돌섬과 모래섬을 바라다본다. 너무나 똑같은 풍경이되, 단 하나 달라진 것이 있다면 여행 내내 나를 뒤쫓아 왔던 양떼구름이다. 촘촘이 씨실과 날실을 헛놓던 양떼구름이 서서히 흩어지는 듯하다. 애플파이처럼 켜켜이 쌓인 구름이 체를 치듯 오묘한 빛을 걸러낸다. 저 맞은 편에는 여전히 화력발전소—또는 공장—가 태연자약하게 제 할일을 하고 있다. 또한 저 멀리 서 있던 우직한 산등성이의 윤곽은 더욱 또렷해졌다. 작은 날씨의 변화가 감지된다. 풍향계가 가리키는 바람의 방향은 여전히 남동풍이다. 바뀐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헤아려가며 다리를 건너는 사이 영목항에 도착했다.
중학교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개신교 선도사 칼 귀츨라프의 기념비, 초등학교 옆 한길에서 우물쭈물 되새김질을 하고 있던 귀여운 흑염소, 나를 보며 깽깽 울어대던 두 마리의 (역시나) 귀여운 강아지들, 송전탑 사이에 늘어진 시커먼 전깃줄과 각양각색의 인슐레이터들(碍子), 동그란 인슐레이터를 닮은 바다 위 부표(浮標)들, 바다보다도 빠르게 시간이 흘러가던 하늘의 움직임, 눈에 담아두었지만 말로 담기에는 사소하고 부질없는 것들. 드디어 태안으로 가는 시외버스가 천천히 플랫폼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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