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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3일의 일기: 무제(Sans titre)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rs 2022. 3. 13. 19:56
# 간밤에는 ‘라 필모테크(la Filmothèque)’라는 영화관에서 코엔 형제의 <위대한 레보스키>를 보았다. ‘르 셩포(le Champo)’와 마찬가지로 소르본 대학 바로 가까이에 위치하지만 좁은 골목에 있어 좀처럼 눈에는 띄지 않는 영화관이다. 몇몇 감독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상영하는 르 셩포와는 달리, 스탠리 큐브릭의 <스페이스 오디세이>, 코엔 형제의 <시리어스 맨>,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 폴 토마스 앤더슨의 <팬텀 스레드>,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처럼 작품성도 있으면서 널리 알려진 작품들이 많이 상영되고 있었다. 좀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알프레드 히치콕의 작품들에서부터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60년대 영화까지도 다수 상영하고 있다.
내가 간 토요일 밤에는 동시간대에 웨스 크레이븐(Wes Craven)의 <스크림>이 상영하고 있었다. 라 필모테크에는 크게 두 개의 상영관이 있는데 상영관의 이름이 독특하다. 파랑으로 꾸며진 상영관은 오드리 관(Salle Audrey), 빨강으로 꾸며진 상영관은 마릴린 관(Salle Marylin)이다. 내가 예매한 코엔 형제의 <위대한 레보스키>는 오드리 관에서 상영되고 있었다. 영화관이 협소하기 때문에 오드리 관에 입장하는 사람들은 영화관 바깥의 골목 왼쪽으로, 마릴린 관에 입장하는 사람들은 골목 오른쪽으로 옹기종기 줄지어 서 있다. 토요일 밤인 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
상영관 실내도 컨셉에 맞춰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고, 영화도 재미있게 관람했다. 코엔 형제 특유의 유머 코드에 영화 여기저기에 심어져 있기 때문에, 그런 대목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왁자하게 웃어서 동네 영화관같은 분위기였다. 르 셩포만 해도 정말 보고 싶은 작품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라 필모테크에 와보니 볼 만한 영화가 훨씬 더 많다. 또 프랑스답게(?) 영화가 딱히 정시에 시작되지 않고, 앞선 시간대의 영화가 끝나고 관객이 모두 나오면 영화가 시작되는 식이다. 좌석이 지정되어 있지 않다보니 좌석 경쟁이 펼쳐질 법도 하건만 여유로운 이곳사람들은 위치에 개의치 않고 적당한 위치에 각자 자리를 잡는다. 토요일 밤은 붐비는 편이었지만 너무나도 마음에 드는 곳이어서 평일 저녁 한산할 때 더 찾아오고 싶다.
# 영화관을 찾았던 어제 밤부터 비가 다시 시작되더니 오늘도 본격적으로 비가 내린다. 3일 연달아 비가 온다. 지난 주부터 계속 고민하게 만드는 발표 두 개가 있어, 오늘도 오전 오후에는 계속 발표자료를 준비했다. 일요일에는 마땅히 공부할 장소가 없다보니 스타벅스를 갔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파리에는 서울만큼 스타벅스가 흔하지도 않고 그나마도 대체로 평점이 낮은 편이다. 그 동안 텀블러에 담을 커피를 사려고 스타벅스를 몇 번인가 갔었는데 노트북을 챙겨가는 건 처음이다. 인터넷도 잘 터지고 한국에 있는 스타벅스랑 똑같다.
# 발표자료를 정리하고 늦은 오후에는 잠시 생 마르탱 지역에 다녀왔다. 하루 종일 앉아 있으면 앉아 있는 대로 몸살이 나서 움직일 겸 서점 구경을 다녀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요일에는 생 미셸 거리에 있는 서점들도 대체로 문을 닫다보니, 생 마르탱에 문이 열려 있는 곳 중 괜찮아 보이는 서점을 검색해서 찾아갔다. ‘이름 없는 서점(Librarie sans titre)’이라고 해서 이름부터 벌써 찾아가보고 싶게 만드는 서점이 하나 발견됐다.
이미 소르본 대학 앞에 나와 있었기 때문에 샤틀레 역까지 걸어서 이동한 다음 11호선 고동색 노선을 타고 공쿠르 역(Goncourt)에 내렸다. ‘샤틀레(Châtelet)’라는 이름이 들어간 역에는 굉장히 많은 노선이 지나가는 까닭에 출구를 제대로 찾는 것 역시 어렵다. 한편 11호선은 그리 길지 않은 노선으로 샤틀레 역에서 발착(發着)하는데 플랫폼이 다른 노선들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다.
은은한 푸른빛을 띠는 외관의 ‘이름 없는 서점’은 예술서적과 개인이 출판한 각양각색의 간행물을 취급하는 곳이다. 과연 시선을 사로잡는 독특한 책들이 많이 있었다. 너무 많아서 어디에 눈을 둬야 할 지 조금 정신이 없었다. 건축이나 디자인보다는 일러스트, 사진이 주를 이루고, 가끔 생소한 주제로 쓰인 책들도 보인다. 한국인 사진작가가 참여한 책들도 꽤 여럿 있었다. 이런 서점에 오면 책들을 들춰보면서 구경은 하는데, 막상 사고 싶은 책은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그래도 지베흐 조제프와는 전혀 다른 풍의 서적만을 취급해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었다.
# 돌아오는 길에 포부흐 뒤 텅플 가(R du Faubourg du Temple)에서 우연히 또 다른 서점 하나를 발견했다. ‘새로움(Librarie les Nouveauté)’. 또 다른 뜻으로는 말 그대로 ‘신간(新刊)’이라 할 수도 있겠다. ‘이름 없는 서점’보다는 손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일반서적들이 예쁘게 진열되어 있었다. 비가 오기도 하고 기숙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어 잠시 고민하다가 서점을 들어갔다.
서점의 메인 코너는 지베흐 조제프와 비슷한 느낌이기는 하지만 주인이 직접 선별한 책들이 골고루 배치되어 있는 느낌이다. 이 서점에서 내 시선을 사로 잡았던 건 다름아닌 만화(bande-dessinée). 일본 만화책들에 비해 부피가 크긴 하지만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하나 사서 기숙사에 들고 가고 싶었지만, 내용이 마음에 들면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고 그림이 마음에 들면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한참 고르다가 그냥 서점을 나왔다.
프랑스에서 인상적인 풍경 중 하나는 이런 서점들에서 가끔 독서모임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는 점이다. 서점이 영업을 마치고 조명은 일부 꺼져 있는데, 원탁을 둘러싸고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모여앉아 책을 손에 쥔 채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두 번째로 들른 이곳 서점에서는 주인이 직접 손글씨로 정성스레 책들을 소개해놓고 있었는데, 독서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애착이 느껴졌다.
# 이어서 거리를 따라 생 마르탱 운하를 가로지르고 헤퓌블리크 광장에 도착했다. 어제 시위의 흔적이 광장 이곳저곳에 남아 있다. 오늘은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이슬람의 초승달 문양이 새겨진 깃발들이 많이 보였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초록과 빨강, 흰색으로 된 알제리 국기였는데, 아마도 알제리 전쟁에 관한 시위가 아니었을까 싶다. 잠시 헤퓌블리크 광장을 둘러본 뒤 그 길로 다시 11호선을 탄 다음 한 번 버스로 갈아타고 기숙사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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