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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2일의 일기: 마레에서 앙발리드까지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rs 2022. 3. 12. 18:18
# 권태감을 누르고 다음 주 발표에 필요한 논문을 두 번째로 읽는다. 학생들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건지, 따라올 사람만 따라오라는 계산인 건지, 저번 첫 번째 과제 때와 마찬가지로 게임이론 과제의 난이도는 높다. 첫 번째 과제는 엉겹결에 잘 풀기는 했지만, 두 번째 과제는 신경과학도 다루고 있어서 매우 생소하다. ‘의사결정이론’이라는 이름을 달고는 있지만 융합학문적인 성격이 매우 강해서, 인지과학, 경제학, 경영학, 심리학 등이 모두 맞물려 있다. 막상 이 분야를 찾아보면 이미 진행된 연구가 매우 많은데, 내가 공부하고 있는 곳이 특별히 이 분야에 강점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한국에서 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 어제에 이어 오늘도 비가 올듯 말듯 흐리다. 덩달아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머리가 무겁다. 오전에 학교에 있다가 늦은 점심을 먹고 기숙사로 돌아와 다시 스르르 잠이 들었다. 아무래도 너무 처지는 기분이 들어서 자전거를 타고 마레지구로 나가보기로 했다. 생미셸 가를 따라 센느 강을 건넌 뒤 생텅투안느 가(R Saint-Antoine)를 따라 동쪽으로 꽤 나간 다음, 왼쪽에 나타나는 튀헨느 가(R de Turenne)를 달린다. 여섯 개의 길이 모이는 교차로가 나타나는 지점에서 내렸다. 마레 지구에서 좋아하는 구역이다.
자전거를 타기 전 이 일대에 간단히 확인해 둔 Fringe라는 카페에서 책을 읽었는데, 나중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오랜 시간 머무르지는 못하고 자리를 나섰다. 근방에는 다양한 종류의 옷가게들이 많아서, 가벼운 자켓도 하나 샀다. 툴루즈와 보르도를 여행하는 동안 겨울 점퍼가 더웠던 적이 여러 번 있었고, 최근 파리도 한낮에는 날씨가 꽤나 따듯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투 없이 다닐 정도는 아니어서 옷을 입기가 조금 애매하다.
# 날씨가 무척 흐린 날씨였는데 자전거를 타니 기분전환이 되었다. 아주 즉흥적으로 마레 지구에서 몽마르트 지역으로 자전거를 한 번 더 타고 나가보기로 했다. 지난 번 몽마르트 지역을 갔을 때 물랑 루주(Moulin Rouge)를 보지 못했던 게 생각나서, 물랑 루주를 목적지 삼아 자전거로 이동해보기로 했다. 출발하고 얼마 안 되어 헤퓌블리크 광장이 나타났는데, 우크라이나 반전 시위가 한창이었고 경찰력이 곳곳에 대규모로 배치되어 있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피켓을 들고 흥이 가득한 얼굴로 교정을 오가는 학생들이 보였는데, 사실 이곳의 학생들이 우크라이나 현 상황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러시아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고 평화를 지지하자는 추상적인 구호? 또는 정부나 EU 차원의 대응을 촉구하는 구체적인 구호? 노란 조끼 시위 때처럼 파급력이 큰 것 같지도 않고, 관심을 가질 뿐이지 내게 닥친 일이라 생각하는 분위기도 아니다. 하나의 행사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하는 학생들도 많다.
젊은 학생들의 활력이 거의 자취를 감춘 우리나라와 달리 손글씨로 피켓을 준비하는 이곳 학생들을 보면 역동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툴루즈를 비롯해 전국적으로 시위가 일어나는 걸 보면 운동을 추진하는 공동체의 연대감 같은 것도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움직임이 다른 무엇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겨냥하는 것은 있지만 느긋해 보이기도 한다.
# 헤퓌블리크 광장을 지나 마정타 대로(Bd de Magenta)로 들어섰다. 평면 지도를 봐서는 알 수 없는데 마정타 대로는 헤퓌블리크 광장에서 파리 북역에 이르기까지 완만한 오르막 경사를 이룬다. 때문에 허벅지에 운동량이 느껴졌다.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마흐게히트 드 호슈슈아흐 대로(Blvd Marguerite de Rochechouart)를 따라 움직이면 자연히 파리의 10구에서 18구로 넘어가고 풍경도 퍽 어수선해진다.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향하는 방면으로 또 다른 가두시위가 진행되고 있고—또 엄청난 경찰 차량이 에워싸고 있고, 무리를 지나면서부터 거리의 풍경은 붉은 네온사인을 발하는 유흥주점으로 가득차기 시작한다.
# 자전거 타기는 물랑 루주에서 끝나지 않았다. 물랑 루주 앞에서 한숨 돌린 뒤 그랑 팔레까지 자전거를 타고 나가보기로 했다. 등에 땀이 나기 시작하고 겨울 니트에 후끈한 기운이 퍼졌지만 운동도 하고 구경도 하고 기분까지도 좋아졌다. 블렁슈 가(R Blanche)를 따라서 생트 트리니테 성당(Église de la Sainte Trinité)까지 내려온 다음 생라자르 가(R Saint Lazare), 오스만 대로(Bd Haussmann), 마히늬 거리(Av. de Marigny)로 이동하면서 프티 팔레까지 내려왔다. 오페라 갸르니에의 뒷편 오스만 가에 접한 프항텅 백화점(Magasin Printemps Haussmann)을 중심으로 한 번화가에는 쇼핑몰마다 사람이 쏟아져 나와서 잠시 자전거에 내려서 이동해야 했다. 엘리제 궁전이 가까워지는 지점에서는 다시 완전무장한 경찰들이 거리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프티팔레에 왔을 때는 알렉상드르 3세 다리를 거쳐 앙발리드(Invalides)까지 가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파리의 주요 관광명소를 대충이라도 다 보았지만, 보훈병원이라 할 수 있는 앙발리드만큼은 아직 와보지 못했다. 시간상 내부를 둘러보지는 못하겠지만 위치를 눈에 익혀두는 것으로 만족하고 버스로 기숙사까지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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