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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훈의 『풍경과 상처』: 『저만치 혼자서』라는 김훈의 단편소설집을 읽고 그의 수필이 읽고 싶어졌다. 『저만치 혼자서』는 단편소설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기는 하지만, 작가가 ‘군말(에필로그)’에 덧붙이고 있듯이 이야기 하나하나가 구체적인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들이다. 그런 그가 삶의 체험을 기록으로 남긴다면 어떤 글이 나올지 궁금했다. 비교적 근래에 나온 수필집으로 2015년에 나온 『라면을 끓이며』이라는 수필집이 있는데, 이 책의 경우 다른 책을 통해 이미 출간됐던 산문들이 다수 엮여져서 중복되는 것이 많다는 서평을 보았다. 김훈의 글을 제대로 음미하고 싶었던 나는 전작들을 더 찾아보다가 『풍경과 상처』라는 기행문을 택하게 되었다.기행문이라고는 하지만 풍경에 대한 관찰보다는 사유(思惟)의 추적이 돋보이는 글이다. 작가가 반복적으로 말하듯 인간의 언어로 인간의 눈에 비친 모든 것을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시도를 하려고 낱말들을 사물들에 비벼볼 때마다 대상물로부터 미끄러지곤 한다고 작가는 소회한다. 글의 호흡이 길고 사용하는 어휘도 어려워 그의 소설에 비해서는 읽기가 더 까다롭지만, 일단 낱말의 뜻을 천천히 헤아리다보면 풍경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추릴 수 있다. 다만 그가 책의 제목으로 달아놓은 ‘풍경과 상처’에서 ‘상처’라는 낱말이 마음에 걸린다. ‘풍경’과 ‘상처’를 나란히 배치했는데 상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그리 많지는 않다. 다만 인간에 의해 작위적으로 구획된 풍경, 인간의 언어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광활하고 과묵한 풍경, 각막에 와닿는 것들의 덧없음을 일깨우는 퇴락한 풍경이 그가 말하는 우리의 상처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영문판: 이 책은 기억이 맞다면 아마 프랑스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읽기 시작했으니 읽은 지는 꽤 되었다. 다른 책을 읽는 동안에 짬짬히 영어 원본을 들춰봤었다. 영화만 보고 소설은 읽은 적이 없어서 예전부터 읽어보고 싶었던 글인데, 마침 펭귄에서 나온 클래식이 눈에 들어왔다.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토머스 하디의 『테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처럼 사랑이라는 소재로 비운의 여주인공을 그린 작품은 기억나는 것이 많지만, 비운의 남주인공을 그린 소설이라는 점이 『위대한 개츠비』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당시 상류층이 향유했던 생활을 감각적으로 묘사한 건 물론이고, 개츠비와 닉 캐러웨이(소설의 화자)의 내면 심리를 잘 묘사한 것이 인상적이다. 데이지를 향한 개츠비의 사랑은 맹목적이지만 현실 속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이었고, 부푼 꿈과 현실 사이에서 개츠비는 매순간 천당과 지옥을 오간다. 그런 그의 심리 저 바닥에는 굶주린 맹수와도 같은 깊은 공허함과 쓸쓸함, 외로움이 자리잡고 있다.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톰과 윌슨을 포함해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들 또한 마찬가지로 불안정하고 어두운 심리를 보인다. 이 아슬아슬한 관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건 데이지뿐이다.
# 피천득의 『인연』: 피천득 작가의 글은 참 담백하다. 처음에는 ‘인연’이라는 제목을 보고 서정적인 긴 서사가 담겨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책에 담겨 있는 글들은 대부분 채 두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 짤막한 일상 속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그 짧은 호흡 안에 사소하지만 삶의 에너지가 되어주는 인연들이 한 움큼씩 담겨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피천득 작가가 자신의 집에 두려고 산 장미꽃 여섯 송이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저런 사연이 있는 친구 셋에게 나눠주는 바람에, 집에 돌아왔을 때는 자신을 위한 장미가 남아 있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딸 서영이에 대한 깊은 사랑과 어머니에 대한 어릴 적의 따듯한 기억 또한 문장의 어귀 곳곳에 묻어나는 책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