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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읽은 독일문학이다. 근대 독일문학이라고 하면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일관되고 선악(善惡)의 구분도 선명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열두 편의 짤막한 소설로 엮인 『무용수와 몸』의 등장인물들은 그런 선입견에서 벗어나 있다. 길지 않은 글 안에서 대부분의 등장인물은 편집증적이고 병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그들의 논리가 다음에 어느 방향으로 튈지 가늠하기 어렵다.
타이틀로 쓰인 『무용수와 몸』도 무용수 자신의 육체를 낱낱이 해부한다는 점에서 강한 인상을 주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민들레꽃 살해』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공원을 산책하던 한 중년 신사가 길 위에서 발견한 한 송이 민들레꽃을 지팡이로 뭉텅 날려버린 사소한 사건으로부터 출발한다. 무심코 저지른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의식에 신사는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잘려나간 민들레꽃의 단면에서 진동하는 풀내음에 사로잡혀 마침내 합리적인 사고가 마비되기에 이른다. 당시 유대인이자 정신과 의사로서 양차 대전의 참화를 직접 경험한 글쓴이의 세계관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병실의 환자들에 대한 혐오가 확 타올랐다. 그리고 망가진 몸에, 망가져 가는 몸에 사람들이 경외감을 표하며 마치 그녀가 죽기라도 한 듯 그녀를 본척만척한다는 분노가 뚜렷한 모습으로 배회했다. 오만한 여자는 이에 모욕감을 느꼈다. 그녀는 몸을 유폐하고 쇠사슬로 묶었다. 그것은 이제 그녀의 몸, 그녀의 소유물이었고 그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몸은 그녀가 사는 집이었다. 사람들은 그녀 집을 내버려 두어야 마땅했다. 매일 사람들은 망치로 가슴을 두드렸고 심장의 대화를 엿들었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가슴 위에 그녀 심장을 그렸다. 그 속에 숨은 빛을 끄집어냈다.
—p. 21
이제 엘렌은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을 가지고 신사를 비난했다. 햇빛이 찬란하지만 엘렌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 흰 재스민 향기를 들이마시지 못한다. 누구도 엘렌이 치욕스럽게 죽은 곳을 쳐다보지 않을 것이고 그곳에서 기도를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엘렌은 이 모든 것을 두고 그를 탓할 수 있었다. 그것이 아무리 우스운 일이라 해도, 그가 아무리 싹싹 빈다 해도. 엘렌은 아무것도 누릴 수 없었다. 달빛도, 여름에 신부로서 누리는 행복도, 뻐꾸기와 더불어 평화롭게 사는 일도, 산책하는 사람들도, 유모차도, 신사는 작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붙들고 싶었다. 세상이 한숨 소리와 함께 종말을 맞이하면 좋을 텐데. 그러면 민들레꽃의 주둥이가 막히겠지. 그렇다, 그는 고뇌를 완전히 멈추려 자살도 생각했다.
—p. 71
……불안 같은 것이 가슴을 죄어 왔고 나는 그녀들로부터 눈을 돌렸다. 소리를 내서 그 여자들에게 내 존재를 드러내는 일도 없었고 은근히 그녀들을 생각하며 공상에 빠지는 일조차 스스로 금했다. 나는 갈망하는 것들이 내게 저절로 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집어 들기를 꺼리리라. 후안무치한 것은 몸의 노출만이 아니다. 말 한마디 한마디, 동작 하나하나가 우리를 드러낸다. 수치는 우리를 그렇게 땅속으로 밀어 넣는다. 우리를 수치에서 구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다.
—p. 122
“정신병자들 사이에서 나는 항상 몹시 편안했다. 그때 나는 내가 식물과 동물과 돌 외에 단 두 가지 범주의 사람들만 견딜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아이들과 광인들이다.”
—p.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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