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의 문 우크라이나일상/book 2022. 10. 24. 13:30
사실 나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이 우크라이나 전쟁일 뿐, 이 세상에 전쟁은 얼마나 흔하디흔한가. 아프리카의 내전, 라틴아메리카의 마약 전쟁, 중국의 위구르 탄압… 프랑스에 머무르는 동안 우크라이나 전쟁이 개전되었고, 시내에서 프랑스인들이 반전 시위하는 것을 보면서도 어딘가 위선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의 천연자원 공급이 어려워지고, 러시아라는 강대국이 직접 전쟁에 가담하면서 세계질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자, 그제서야 이 전쟁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이 책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피상적인 지식 이상의 것을 얻어보고 싶다는 읽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사회는 ‘조각보’처럼 복잡한 문화—동방 정교회와 가톨릭 정교회의 종교적 구분, 우크라이나인-러시아인-유대인의 민족적 구분, 드네프르 강을 기준으로 의회정치를 발달시켜온 서유럽 문화의 영향을 받은 우안과 차르의 전제군주적 영향을 받은 좌안의 지리적 구분—가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다. 서로 문화종교적으로 얼키고설킨 정도가 크기 때문에, 그들의 복잡성—본문에서는 다공성(多孔性)으로 정의된다—자체가 ‘우크라이나’를 하나로 묶어주는 서사가 된다.
근래 러시아가 대외 선전용으로 독립을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한 동부의 네 지역—루한스크, 도네츠크, 자포리자, 헤르손—은 실제 러시아인의 비율이 우크라이나의 타 지역보다 높기 때문에 러시아가 점령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삼는 곳들이다. 하지만 이 지역의 러시아인(민족) 중 러시아라는 국가(정치체제)에 속한다고 느끼는 비율이 낮다는 점을 세르히 플로히는 분명히 한다. 이 지역은 소련 시기에 농업과 철광산업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우크라이나를 개발하기 위해 러시아인들이 이주해온 곳이다. (흐루시초프의 부모는 그러한 러시아인 중 한 명이었다) 타타르인, 러시아인, 폴란드인, 오스트리아인, 오스만인, 유대인, 우크라이나인들이 수없이 왕래했던 이 지역은 역사의 오랜 기간 통합된 정치체제를 구성하지 못했다. 그런 이 지역이 독립된 것은 소련이 해체된 1990년대에 이르러서다.
오랫동안 독립국가를 꿈꿨지만, 동시에 그 꿈의 실현가능성에 대해 스스로도 의심해 왔던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가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조차 합의된 것이 없어 오스트리아와 폴란드, 러시아에게 사이에서 근근이 세력을 규합해 해오던 동유럽의 스텝 지역. 이 곳은 서유럽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갈리시아 지역으로부터 근대적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통의 민족의식을 키워가며 자신만의 이름을 가진 나라를 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때문에 이번 전쟁에서 우크라이나 군이 보여주는 투지가 더 각별하게 보이기도 한다. 지극히 최근에 들어서야 ‘우크라이나’라는 한 지붕 아래 모인 이 나라의 사람들은 어떤 국가관을 공유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의 ‘재벌’과 비슷한 개념인 우크라이나의 ‘올리가르히’는 오랜 사회적 문제다. 그럼에도 정경유착에 반대하며 일어난 유로마이단의 운동은 민주주의의 전통이 희박했던 이 옛 공산권 지역의 놀라운 시민의식을 보여준다. 2004년에 시작된 거대한 운동은 그들이 바라보는 방향이 동쪽(러시아)이 아닌 서쪽(유럽)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였고, 나아가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오렌지 혁명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전쟁이 어떻게 인간성을 파괴하는지에 대해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류사를 되돌아보건대 ‘전쟁이란 일어나선 안 된다’는 규범은 인간 세계에선 아무런 의미도 없다. 전쟁과 평화는 항상 상존하고 우크라이나의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다. 이 지역은 키예프 공국 시기를 제외하곤 끊임없이 서로가 지역의 주인을 자처하던 곳이다. 결국 우크라이나라는 국가가 존재할 수 있는지는 다시 한 번 우크라이나인 스스로가 증명해 보여야 한다. 우크라이나의 지난 역사는 서방 국가도, 러시아도 그들의 국익에 기여할 것이 없으며 그들이 스스로 홀로서기해야 함을 알려준다. [fin]
로마인들이 폰트 식민지에 도착한 기원후 새천년 초기에 우크라이나 지역은 후에 서구 문명이 되는 지역의 가장 끝자리에 있게 되었다. 헬레니즘 세계의 북쪽 경계는 유럽의 동쪽 경계가 되었다. 이 경계선은 거의 2,000년 동안 남아 있었고, 18세기 말 러시아 제국이 일어나면서 유럽의 지도를 다시 그리며 유럽 경계를 우랄 산맥까지 밀어냈다.
—p. 58
루스에 기독교를 도입한 것은 볼로디미르였지만, 이것이 루스의 정치, 경제, 국제관계에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비잔틴 황제가 이끄는 기독교 국가 공동체에서 루스의 위치를 확립하는 것은 그의 후계자들의 몫이었다. 볼로디미르의 후계자 중 이러한 과업을 수행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은 그의 아들 야로슬라우였다. 역사에 야로슬라우의 할아버지인 스뱌토슬라우는 ‘용맹왕(the Brave)’으로 이름을 알렸고, 아버지인 볼로디미르는 ‘대공(the Great)’이라는 명칭을 받았지만, 야로슬라우는 ‘현재(the Wise)’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런 업적은 전쟁터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평화와 문화, 국가와 민족건설 부문에서 달성한 것이다.
—p. 96~97
폰트 스텝 지역에 몽골이 침입해 장기간 머문 것은 루스 엘리트들로 하여금 처음으로 스텝 유목민족과 비잔틴 기독교 전통으로 대표되는 동방, 그리고 교황의 종교적 권위를 인정한 중유럽 통치자들이 구현된 서방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딜레마를 안겨주었다. 자신들이 유럽의 주요 정치, 문화 경계 사이에 놓인 것을 발견한 포스트-키이우 시대의 현 우크라이나 지역의 엘리트들은 최소한 한 세기 이상 동방과 서방 모두에게서 사실상 독립을 연장하는 균형정책을 취하게 만들었다.
—p. 131
코자크는 페레야슬라우 합의를 양측 모두 강제적 의무를 갖는 계약으로 생각했다. 흐멜니츠키가 생각하기에 그와 그의 국가는 차르 권위 아래의 피보호국이 되는 것이었다. 이들은 모스크바 공국이 제공하는 보호의 대가로 충성과 군사봉사를 약속했다. 그러나 차르는 코자크를 새로운 신민으로 받아들였고, 그는 이들에게 일정한 권리와 지위를 제공한 다음 자신은 아무런 의무도 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p. 208
역사가들은 자주 폴타바 전투를 대북방전쟁의 전환점으로 평가한다. 운명의 장난으로 발트해 통제권을 놓고 벌어진 군사적 충돌은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결과가 결정되었고, 북유럽에서 스웨덴의 패권은 훼손되고 러시아는 유럽의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그러나 폴타바 전투의 결과는 다른 어느 곳보다 전투가 벌어진 우크라이나에 극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p. 244
가장 좋은 비유는 마트료쉬카 인형이다. 가장 큰 인형은 포스트-폴타바 시대의 소러시아 정체성이다. 그 안에는 드니프로강 양안의 코자크 우크라이나 조국이라는 인형이 들어 있다. 그 안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루스 또는 루테니아 인형이 있을 수 있다. 가장 안쪽에는 소러시아 정체성이 대공국 안의 루스와 좀더 최근의 코자크 우크라이나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 폴타바 전투 이후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의 핵심이 소러시아라는 인형을 뚫고 나와 과거 코자크들이 소유했거나 원했던 영토를 다시 차지하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p. 250
우크라이나 국가는 “우크라이나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라는 가사로 시작한다. 이것은 노래로서는 결코 낙관적인 시작이 아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국가만이 첫 가사가 낙관주의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유일한 국가는 아니다. 폴란드 국가도 이와 유사한 가사로 시작한다. “폴란드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폴란드 국가 가사는 1797년 만들어졌고, 우크라이나 국가는 1862년 만들어졌기 때문에 어느 가사가 영향을 미쳤는지는 분명하다. 그러나 왜 이런 비관주의가 표현되었는가?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두 경우 모두 국가의 절멸은 18세기 말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폴란드는 3차의 분할,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헤트만령의 완전한 철폐가 그 사건이었다.
—p. 275
우크라이나 군대가 전장을 떠나고 우크라이나 독립 목표가 사라지면서 세 세력이 우크라이나의 통제권을 놓고 싸우게 되었다. 폴란드 분할 전의 국경에 가능한 가까운 국경을 가진 폴란드 국가를 만든다는 목표를 가진 폴란드군은 갈리시아를 장악하고 포돌리아와 볼히냐로 진격해 들어왔다. 협상국의 지원을 받는 백군은 차르 시대 하나의 분할되지 않은 국가를 재건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우크라이나 남부에서 북진해 러시아로 진격했다. 다음으로 세계혁명이라는 장기적 목표를 가진 볼셰비키군이 있었지만, 이들의 시급한 목표는 군사적으로 생존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의 석탄과 빵 없이는 목표를 이룰 수 없다고 레닌이 공개적으로 인정한 바 있다.
—p. 389
우크라이나 대기근(Holomodor)은 우크라이나와 그 국민에 대해 사전에 의도된 인종학살(genocide) 행위였는가? ……많은 학자들은 이것이 공식 정책에 의해 사람이 자행한(man-made) 현상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기근은 북코카서스, 볼가강 하류 지역, 카자흐스탄에 영향을 미쳤지만, 우크라이나에서만 인종민족적인 의도가 있는 정책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것은 우크라이나화 정책을 종언시키려는 스탈린의 결정과 우크라이나 당관료들에 대한 공격과 연관되어 진행되었다. 대기근은 우크라이나 사회에 큰 트라우마를 안겼고, 여러 세대 동안 정권에 대해 공개적으로 저항할 힘을 말살해버렸다.
—p. 444
나치 점령이라는 왜곡된 상황에서 홀로코스트는 소련군 포로를 희생자에서 압제자로 바꾸기도 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집단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서 가스실에서 죽은 첫 희생자들은 소련군 포로들이었다. ……수용소에서 생존한다는 것은 종종 동료 인간들의 파괴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했다. 독일군 점령 하의 우크라이나는 거대한 수용소 본보기가 되었다. 수용소에서 저항과 무역 사이, 희생자와 정권에 부역한 범죄적 동조자 사이의 경계선은 구별할 수 없게 불분명해졌다. 모든 사람이 나름의 선택을 했고, 살아남은 사람은 전쟁 후 그 결정의 짐을 지고 살아가야 했다. 일부는 이것과 타협하기도 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고뇌 속에 살아야 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은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p. 466~467
1941년 독일군의 살상에서 살아남아 포로가 된 많은 병사들이 석방되어 가족들에게 돌아왔지만, 소련군이 이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탈환한 다음 즉시 다시 징집되었다. ‘검은 재킷을 입은 사람’으로 불린 이들은 재징집 후 제대로 된 군복과 훈련, 탄약, 심지어 무기도 없이 바로 전투에 투입되었다. 소련군 지휘부는 독일 점령 아래 있던 사람들을 반역자로 간주하고 이들은 희생되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검은 재킷을 입은 사람들’ 대부분은 전투에서 죽거나 오랫동안 기다리던 ‘해방’ 직후 도시 교외나 시골 지역에서 사살되었다.
—p. 485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여러 면에서 1960년대 세대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세계관은 흐루쇼프가 추진한 탈스탈린 운동에 강한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고, 1960년대 소련과 동유럽의 자유주의적인 경제학자들과 정치학자들이 추진한 사회개혁 아이디어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고르바초프는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제도와 자원을 좀더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강조하고, 소련 경제발전을 ‘가속화’하는 프로그램을 개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련 경제는 침체율 외에는 어떤 것도 가속화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우리는 벼랑 끝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는 커다란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었습니다”라고 브레즈네프 시대에 한 정치만평가가 말한 적이 있었다. ‘가속화’라는 수사는 곧 ‘페레스트로이카’ 또는 재구조화(reconstructuring) 정책에 자리를 내주었다.
—p. 534~535
부시는 발트 국가들을 자유롭게 해방시키고 싶었지만, 우크라이나와 나머지 공화국들은 그대로 소련에 남기를 바랐다. 그는 세계무대에서 신뢰할 만한 파트너인 고르바초프와 그가 이끌고 나가는 소련을 잃고 싶지 않았다. 여기다가 부시와 그의 참모들은 소련의 통제할 수 없는 해체 가능성을 우려했다. 영토 내에 핵무기를 보유한 공화국 사이의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워싱턴과 모스크바, 그리고 우크라이나 의회의 공산당 의원들 사이의 연합은 우크라이나 독립에 큰 장애로 작용했다. 그러나 그 달이 가기 전에 우크라이나 의회가 거의 만장일치로 우크라이나 독립선언에 찬성투표를 하고, 11월 말이 되자 포스트-소비에트 국가의 혼란과 핵전쟁을 우려했던 백악관이 이 결정을 지지한 것은 거의 상상하기 어려웠다.
—p. 544~545
중부 우크라이나의 대정원과 남부 스텝 사이의 경계선은 북쪽 농업 중심 지역과 남쪽의 광물자원이 풍부한 스텝의 도시 중심 지역간의 다공성(多孔性) 경계가 되었다.
……현실에서 우크라이나 지역주의는 지금 제시한 설명보다 훨씬 복잡하다. 과거 헤트만령 중세 코자크 땅과 자유공동체 우크라이나 사이에도 차이가 있고, 미콜라이우 남부 지역은 인종 구성, 언어 사용, 투표 행태가 1954년에야 우크라이나에 포함된 크림 반도와 크게 다르다. 그러나 이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의 지역들은 서로 단합했다. 그 이유는 과거에는 선명했던 앞에 지적된 과거의 경계선들이 오늘날 다시 만들기가 거의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다른 지역들을 연결하고 나라를 하나로 만드는 조각보 같은 언어, 문화, 경제, 정치 전이지역(transition zones)을 볼 수 있다. 실제로 크림 반도를 이웃한 우크라이나 남부 지방과 분리하거나 돈바스를 다른 동부 지역과 분리하는 문화적 경계선은 찾기가 쉽지 않다. 역사적 지역 어는 곳도 우크라이나를 떠나겠다는 강한 바람을 보이지 않았고, 지역 엘리트들도 분리를 지지하지 않았다.
—p. 615~616
'일상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스라·느헤미야·에스더 (0) 2022.10.29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 (0) 2022.10.28 무용수와 몸 (0) 2022.10.11 역대상・하 (0) 2022.10.09 초가을의 독서 (2) 2022.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