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나긴 영화 가뭄(?)의 시간이 지나고 최근에 몇 편의 영화를 관람했다. 반드시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영화는 아니지만 요 근래 뜨거워진(..?) 두뇌도 식힐 겸 모처럼 영화관을 찾았다. <알카라스의 여름>은 사실 제목과 포스터만 봐서는 다정다감한 가족 드라마를 기대했다. 물론 가족 이야기가 나오기는 하는데, 카탈루냐 지방에서 농토를 잃을 위기에 처한 한 가족의 이야기다. 거칠게 말해서 지주-소작농 문제가 다뤄지고 있는데, 처음에는 이런 문제가 아직까지 현대 사회에 남아있다고(?!)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토지 소유자의 일방적 통보에 따라 키메트 일가가 일구는 복숭아 농사는 올해가 끝이다. 올 여름을 넘기고 나면 복숭아 나무는 밀릴 것이고 그 자리에 태양광 패널이 빼곡하게 들어설 예정이다. 키메트 가족은 몇 대에 걸쳐 땅을 일궈 왔지만 내년부터는 전지패널을 관리하는 방법을 익히든 말든 결정을 내려야 한다. 태양광이 들어서는 건 이미 확정된 사실이기 때문에 이들 가족은 새로운 환경에 살아남을 궁리를 해야만 한다. 키메트 일가의 선조는 스페인 내전 와중에 처형 일순위였던 지주 일가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줬지만, 그런 감상에 의존해 토지소유자를 설득하는 건 부질 없는 일이다. 토지문서를 명확히 해두지 않는 소작농의 무지함이 문제될 뿐이다. 그렇게 해서 다해서 3대에 걸친 가족이 함께 사는데, 이런 변화에 가장 크게 심리적 갈등을 겪는 키메트가 있고 3대에는 어쩌면 알카라스를 언젠가 떠날지 모르는 아들과 딸이 있다.
또 한 가지 눈여겨볼 만한 점은 영화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대형 유통업체에 가격 협상력 면에서 밀리기 때문에 과일을 헐값에 판다는 점이다. (유럽에서 스페인산 과일이 어딜 가나 흔했던 게 생각났다) 기술이 바뀌고 돈되는 사업이 바뀌면서 그간 너무나 당연하게 땅을 일궈왔던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문제도 있지만, 꼭 그게 아니라도 협상력에서의 우위를 이용해 압박을 가하는 공룡기업들의 전횡에 맞서야 한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처한 키메트 가족은 내년 여름에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생때같은 복숭아나무들이 굴착기에 맥없이 쓰러지는 걸 보며, 카탈루냐의 문제가 단지 영화 속 문제가 아니라 현실 속 문제라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된다.
다큐멘터리와 SF 장르를 결합한 이 영화는 서사가 분명 빈약하기는 하지만, 생물 다양성이라는 주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높게 평가한 작품이다. 영화에는 여러 전문가들의 인터뷰가 담겨 있는데, 그 가운데에 몇 가지 기억 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한 전문가는 인간이 즉각적인 위협에는 강하지만 서서히 다가오는 위협에는 둔감하다고 말한다. <알카라스의 여름>과 같은 사례가 그러하다. 당장 자신들의 생계가 되어주던 농토가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심각한 스트레스 상황에 처한다. 하지만 오늘 또는 어제쯤 지구상 어딘가에서 이름 모를 동물종이 멸종했다고 하면 아주 잠시 신경이 쓰일 순 있겠지만, 우리 모두 금세 코앞의 일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게 오늘 작성해야 할 업무보고서든, 답장을 기다리는 메일에 대한 회신이든지 간에. 마찬가지로 TV 속에서 굵은 빨대가 코에 박힌 바다거북이가 느긋하게 부유하는 장면에 시선을 빼앗기며 잠시 세계시민이 된 듯한 감정까지도 느끼지만, 사소한 충격은 그때뿐이다. 우리는 잠시 흥밋거리가 필요할 뿐이다.
또 한 가지 기억에 남는 인터뷰는 생물 다양성의 중요성을 비행기 나사에 비유한 어느 박사의 인터뷰다. 하늘을 날고 있는 비행기에 나사가 몇 개쯤 헐거워지거나 심지어 떨어져 나가도 비행기가 곧장 추락을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어떠한 임계치에서 나사 하나가 더 떨어져 나가서 날개 하나가 떨어져 나간다면 비행기가 비행을 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해진다. 문제는 잘 날고 있던 비행기에서 날개 하나가 나가 떨어질 때 나사를 다시 조여보려고 해도 이미 상황은 비가역적이라는 점이다. 생물 다양성이 그렇다. 더군다나 생물 다양성이 붕괴되는 임계점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경험해본 적이 없기에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당장은 '인류세'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지속가능해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의 생물 다양성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걸 깨닫는 순간에는 이미 손쓸 수 있는 게 없다.
이 영화는 2054년의 멀지 않은 미래를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생물 다양성의 중요성을 다룬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우리가 이 영화에서 반드시 간추려내야 하는 메시지는, 너무나 많은 미디어와 가상 환경 속에서 사실관계의 진위(眞僞)마저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를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영화 속 주인공인 벤과 피니, 체리는 자신들이 2020년에 발견한 지구적 위기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더 쇼'라는 방송을 해킹해서 생물 다양성이 여전히 풍부했던 2020년의 풍경을 송출한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하다. 시청자들은 생물 다양성 주제를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영상을 보는 대신 채널을 그냥 돌려버린 것이다. 2054년의 사람들은 더 이상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쏟지 않는다.
그런데 가상 환경이 인간의 인식 체계를 집어 삼킨 2054년의 풍경은 사실 전혀 새롭진 않다. 자신이 선택한 미디어와 콘텐츠 기반으로 알고리즘이 추천해준 뉴스가 마치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오늘날에도 흔한 풍경이다. 가상 환경 속에서 접할 수 있는 콘텐츠의 양이 늘고 다양해질 수록, 그러한 휩쓸림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단단히 믿을 수 있는 지푸라기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루가 멀다하고 디지털 화형식이 펼쳐지는 세상, 그리고 일말의 사실관계에 대한 체념. 그런 의미에서 생물 다양성 파괴로 인한 환경 문제보다도 생물 다양성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체계를 바꾸는 작업이 더 지난한지도 모른다. [end]
'일상 > film'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원과 찰나, 허영과 본질 (0) 2022.12.08 우리가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이유 (0) 2022.11.24 해변의 폴린 (0) 2022.10.20 Upside Down (0) 2022.08.26 마주해선 안 될 (0) 2022.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