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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i trop parole, il se méfait. Chrétien de Troyes, Perceval
최근 에릭 로메르의 작품들이 재개봉했길래, 무턱대고 <해변의 폴린>이라는 작품을 보고 왔다. 1983년 작품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봐도 아무런 위화감이 없다. 말 많고 탈 많은 로맨스 영화로, ‘말이 많은 자, 화를 자초한다(Qui trop parole, il se méfait)’는 12세기 프랑스 시인의 문구와 함께 시작한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가 늘 그러하듯 촌철살인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술술 발설하는 배우들과, 도입부의 글귀대로 말로 인해 손해를 보는 등장인물들의 얽히고설킨 로맨스가 펼쳐진다.
영화의 제목에 등장하는 폴린은 15세 소녀로 영화에서는 대개 조용한 관찰자처럼 나타난다. 사촌언니 마리옹과 함께 노르망디 지역의 한 해안가에서 바캉스를 보내게 된 폴린은 채 일주일이 안 되는 기간 동안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어른들의 로맨스를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폴린의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어른들의 모순적인 관계 속에서 관객은 한낱 장난같은 사랑의 변덕스러움과 관계의 피상성을 발견하게 된다.
어른들의 사랑은 제각각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 맹목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새로운 만남에 신중해지고 싶다고 말하면서 이성적인 판단은 뒤로한 채 감정만을 쫓아가는 마리옹, 마리옹의 완벽한 아름다움에 도취된 건 사실이지만 그녀와의 만남이 시시해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정당하다고 합리화하는 앙리, 마리옹에 대해 변함없는 순애보를 보내면서 자신이 정의내린 사랑만이 올바르고 정확하다고 주장하는 피에르까지. 어른들은 막힘없이 궤변도 술술 늘어놓는다. (피에르의 경우 그가 보인 선의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평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때마다 폴린은 자신의 생각을 던지며 그들이 내뱉는 말들의 헛점을 파고든다.
말이 많은 자, 화를 자초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차를 타고 폴린과 마리옹이 나란히 들어간 별장의 출입구를, 영화의 마지막에도 이 둘이 나란히 빠져나온다. 그리고 갑자기 멈춰선 마리옹은 폴린에게 자신과 앙리와의 관계, 그리고 폴린과 실뱅과의 관계에서 의심이 될 만한 것은 훌훌 떨쳐버리고 없던 일로 합리화하자고 어린 폴린에게 천연덕스럽게도 말한다. 보조석에 앉은 폴린은 예의 맑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러자고 한다. 하지만 폴린은 마리옹이 끝까지 외면하려던 진실을 알고 있다. 앙리와 마리옹 사이를 가득 채웠던 위선을. 그리고 사실 폴린은 이미 영화 내내 어른들에게 말을 했다. 앙리에게도 피에르에게도. “이 위선자(hypocrite)!”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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