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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이유일상/film 2022. 11. 24. 23:23
근래에 '가족'을 주제로 한 아주 좋은 영화 두 편을 봤다. 그 첫 번째 영화가 <양자경의 더 모든 날 모든 순간>이다. 150분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에 다채로운 화면들과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아주 꽉꽉 담겨 있어서 뇌에 과부하가 걸릴 만큼(?) 보는 재미가 있다. 영화는 에블린이라는 주인공이 선택하는 또는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그녀의 선택이 보여주듯이 우리가 걷는 인생의 경로는 하나의 통계적 가능성에 다른 통계적 가능성이 겹쳐지면서 윤곽을 잡아간다. 가능성의 망(net) 위에서 다음 노드(node)로 넘어가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 선택으로 말미암아 선택되지 않은 세계는 미지의 가능성으로 남는다.
"You Are Not Unlovable.
There Is Always Something To Love.
Even In A Stupid, Stupid Universe Where We Have Hot Dogs For Fingers,
We Get Very Good With Our Feet" — Evelyn.
그런데 우리의 인생이 단지 무수히 많은 통계적 가능성들로 점철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에게 삶은 어떤 '가치'를 지니는 것일까? 우리의 삶은 가치중립적인 가능성의 세계 이외에 어떤 의미를 지닐까? 하고, 영화는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그것이 근사한(nice) 가능성에 의해 정의되는 알파 버전의 세계이든, 실망과 좌절, 타협이 만들어낸 베타 버전의 세계이든, 우리의 삶이 가능성의 용광로라는 것, 그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The Only Thing I Do Know Is That We Have To Be Kind.
Please, Be Kind.
Especially When We Don't Know What's Going On." — Waymond.
나는 이 영화가 참 좋았다. 결국 삶의 의미는 우리에게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선택지는 때로 우리를 무가치함과 공허함의 덫으로 이끈다. (영화 속 조부 투바키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하나의 선택에서 다른 선택으로 넘어갈 수 있는 원동력은 결국 따뜻한 관계에서 온다. 미워하기보다는 아끼는 마음으로부터, 외면하기보다는 함께하려는 마음으로부터. 광막한 공간을 부유하는 먼지와 먼지의 스침처럼. 그리고 '가족'이라는 원형적 관계를 통해 우리가 삶의 원동력을 구할 수 있다는 걸, 우리가 서로에게 좀 더 상냥해질 수 있다는 걸 영화는 말하는 듯하다.
Jobu: "Every New Discovery Is Just A Reminder—"
Evelyn: "We're All Small And Stupid."
여기 가족을 이야기하는 또 다른 영화가 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상당히 충격이었다. 무엇보다 2022년에 이념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것도 한국도 아닌 일본에 살아가고 있다는 게 너무 충격적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지나왔다고 여겼던 반 세기도 더 된 아픈 역사가 지금까지도 그 상처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채 아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영화를 본 후에는 그간 막연히 알고 있던 제주의 4.3 사건에서부터 재일교포 현황에 대한 내용을 좀 더 찾아보게 되었다.
가장 무서운 건 이념의 소용돌이를 살고 견뎌냈던 사람들의 기억도 결국은 시간과 더불어 풍화되어 간다는 사실이다. 자신들이 겪은 아픔이 여기 있었노라고 목소리 내어 외쳐보기도 전에, 아픔의 기억은 벌써부터 희미해져 간다. 우리가 말하는 역사(歷史)라는 것은 너무나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나머지, 생생한 현실적 감각들을 무기력하게 놓쳐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과거사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다양하다. 알츠하이머를 앓는 감독의 어머니처럼 시간의 중력에 침잠해가는 사람도 있고, 이제는 아픔을 마주할 힘을 상실한 나머지 자진해서 자신의 아픔을 덮어버리기로 한 사람도 있다.
한편으로는 재일교포 2세대로서 부모가 견뎌낸 시간을 함께 감내해야 했던 감독의 시선으로 이 서사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이념이 빚어낸 괴물같은 주변 상황을 직시하고,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감독 자기자신으로서 적대적인 세상에 위치시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넘었을까 싶다. 하지만 겉보기에 단단해 보였던 그녀도 '어머니'의 임시여권을 들고 찾아온 4.3 사건 추념식에서 끝내는 눈물을 쏟아낸다. 그녀에게 부모의 삶은 평생 불가해한 것이었다. 그런 그녀는 어머니가 학살을 피해 일본으로 도항(渡航)을 시도했던 30km 길을 걷는 동안,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해 보였던 부모라는 존재와 그들의 인생 경로가 어렴풋이 이해가 될 것 같다고 애열(哀咽)하는 목소리로 말한다.
모순의 시대를 살아온 부모의 모순적 행적은 이성(理性)의 거울을 통해 비춰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아시아의 근대사는 너무 많은 모순으로 얼룩져, 차마 서로의 모순을 견줘보기도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식민통치와 신민화, 전쟁, 원폭으로 인한 패전, 38선 설정과 이념대립 심화, 독재정권의 수립과 인권 유린, 이 모든 매듭들은 처음과 끝을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촘촘하다. 풀지 못한 역사의 매듭은 지금 이 순간에도 추상적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세상에서 사람들의 삶을 얽어매고 있다. 그리고 감독은 오랫동안 자신의 숨통을 조여왔던 역사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현실의 경계를 분간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다정한 딸, 다감한 친구가 되어주기로 결정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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