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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과 찰나, 허영과 본질일상/film 2022. 12. 8. 22:15
피노키오. 참 익숙하고 정겹기까지 한 캐릭터의 이름이다. 이름만 들었을 땐 디즈니 사에서 만든 고깔 모자의 피노키오가 먼저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캐릭터 상품으로만 접했을 뿐 정작 피노키오 이야기를 하나의 서사(敍事)로 접해본 적은 없었고, 게다가 그런 이야기를 기예르모 델 토로가 애니메이션화했다고 하기에 망설임 없이 이 작품을 보게 되었다. 일단은 영화의 배경이 무솔리니 통치 하의 이탈리아여서 동심을 자극하는 이 나무 캐릭터가 사실은 시대상을 반영한 결과물인가 싶지만, 좀 더 정보를 찾아보니 피노키오라는 작품은 피렌체 출신의 작가 카를로 콜로디에 의해 1883년에 처음 발표되었다고 하니, 기예르모 델 토로가 차용한 시대적 서사와는 관계가 없는 것 같다.
피노키오가 요정으로부터 영혼을 얻을 때 처음에는 영생(永生)의 존재였다는 것도 기예르모 델 토로가 개인적으로 선택한 모티브인지 잘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에서 불멸(不滅)과 필멸(必滅)을 대비시키는 이 대목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피노키오는 주세페 할아버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영생을 포기한다. 인간의 목숨이 유한하지 않다면 삶의 매순간 소중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들을 종종 접하지만, 그럼에도 유한한 존재로서의 나는 때때로 영원불멸한 삶에 대해 궁금증을 가져보곤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유한한 내 삶 안에서 매순간 감사함을 적게 느끼는 (또는 느낀다고 느끼는) 나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애니메이션 작품인데 그림이 근사하다. 초호화 성우 캐스팅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 이탈리아에 대한 동경이 생기기도 한다. 발랄한 목각 인형이 나의 향수를 자극한다고 하기에는 어린이의 마음이나 어른의 마음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 작품이었다.
이 영화는 순전히 랄프 파인즈(레이프 파인스)의 연기를 보기 위해 보기로 마음 먹은 영화였다. 배우의 연기를 보는 것도 좋았고, 모처럼 서스펜스 장르의 영화를 보는 것도 좋았는데 어딘지 찝찝함이 남는다. 영화에서 풍자하려는 게 뭔지는 알겠는데 잘 전달된 건지는 의문이다. 일약 스타 셰프가 된 줄리언 슬로윅은 자신의 요리를 능욕(?)해 왔던 고객들을 호손 섬의 외딴 레스토랑에 모아 잔인한 복수극을 기획한다. 문제는 예약 명단에 없던 마고가 이 미식 체험에 합류하면서 스타 셰프가 계획한 살인극에 차질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 블랙 코미디가 풍자하려는 것은 미식 행위에 투영된 인간의 허영심에 대한 폭로다. 줄리언 슬로윅이 만드는 파인다이닝에는 SNS용 사진과 리뷰를 남기는 데 여념이 없는 손님들이 쇄도해 왔다. 온갖 현학적 미사여구와 의미 부여를 서슴지 않는 비평가들도 있었다. 125달러 한 끼의 파인다이닝을 즐길 만큼의 재력이 있다는 걸 과시하려는 사람들도 줄지었다. 문제는 코스가 개시되기에 앞서 "Don't eat!"이라 선언하는 슬로윅의 말대로, 어쩌면 이들의 미식 행위에는 정작 '먹는다'는 본질적 행위가 빠져버린 게 아니었던가 하는 점이다. 심지어 슬로윅 본인조차 손님들의 허영심에 맞추기 위해 자신이 원하던 스타일의 요리를 버려가면서까지 셰프로서의 명성을 추구해 왔다.
그런 점에서 마고는 영리했다. 복수에 눈이 먼 줄리언 슬로윅을 구워삶아 '치즈버거'를 만들어달라고 한 것이다. 오래된 흑백사진 속 줄리언 슬로윅은 치즈버거의 패티를 튀기던 때의 앳된 얼굴이 가장 환했다. 마고는 그런 그의 젊은 시절 사진을 발견하고, 치즈버거를 통해 줄리언 슬로윅이 요리를 시작할 때의 흥분과 보람을 잠시나마 체험하게끔 만든다. 하지만 마고를 제외한 모든 하객은 결국은 슬로윅의 계획대로 마시멜로와 함께 스모어(S'more)로 장렬히 산화(酸化)하였으니... 조금은 뻔한 블랙 코미디가 되어버렸다.
안야 테일러조이가 맡았던 마고 역으로 원래는 엠마 스톤으로 낙점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섭외가 엎어지면서 안야 테일러조이가 합류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엠마 스톤이 마고 역할을 맡았다면 더 볼 만했겠다는 사견이 든다. 그래도 모처럼 접한 레이프 파인스의 연기는 좋았고, 정찬(正餐)이라는 참신한 소재로 서스펜스물을 만든 시도도 좋았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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