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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풍기 앞에서 노곤노곤 꾸벅꾸벅 졸면서 관람한 영화라 리뷰다운 리뷰를 남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영화는 어쩐지 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La vie devant soi)』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었다. 레오(Léo)라는 꼬마는 스스로를 레올로(Léolo)라고 명명한 자신만의 세계에서 자신을 둘러싼 병적인 여건을 통과할 수 있는 해방구를 찾아나간다. 레오 가족의 병적인 모습들은 레오로 하여금 어린 아이다운 발랄한 상상력을 자극하기보다는 어두침침한 은신처로써의 뒤틀린 환상을 부추긴다. 변기 위에 올라앉아 '밀어 내(Pousse)!'라며 고함치는 레오의 엄마, 레오가 익사 직전에 이르기까지 그의 머리를 물에 처박는 할아버지, 동네 깡패에게 겁박을 당한 뒤 근육을 키우는 데 강박을 가지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퇴행될 대로 퇴행된 레오의 형까지. 이 모든 동물적 광기 안에서 무력한 레오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도망치는 것도 가족을 설득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게 레오는 레올로의 세계를 탐닉한다, 고통을 뛰어넘기 위해서. 그리고 이따금 옆집 소녀 비앙카에게 시선을 돌린다.
영화의 내레이션에는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Ce jour-là, j'ai compris que la peur vivait au plus profond de nous-mêmes)"는 구절이 나온다. 레오 가족의 어른들이 보이는 광적이고 퇴폐적이고 폭력적인 행태의 이면에는 달리 명명할 수 없는 깊은 공포가 자리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아직 세상을 많이 살아보지 않은 꼬마 레오에게도 공포라는 불가항력은 머리로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몸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영화에 표현된 블랙 코미디를 보면서 때때로 절로 이마를 찌푸리게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확실하고 불만족스런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깊은 바닥에는 형태와 색깔을 알 수 없는 공포가 고여 있다는 걸 어렴풋이 깨닫게 되기도 한다.
<레올로>는 깐느 영화제에 초청이 되었을 만큼 그 가치를 주목받기도 했지만, 어두운 영화의 내용만큼이나 감독 장 클로드 로종은 두 번째 장편 작품인 이 작품을 끝으로 사고로 인해 세상을 떠나버렸다. 레오 역을 맡았던 막심 콜랭 역시 후속작을 통해 배우로 더 빛을 발하지 못한 채 지금은 스크린을 떠나 배우 아닌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니, 영화의 줄거리만큼 감독과 배우의 이야기도 어딘가 씁쓸한 뒷맛을 더하는 면이 있다. 그럼에도 모처럼 캐나다 영화, 그 중에서도 퀘벡 영화를 접할 수 있어서 좋았고, 또 그 안에서 드문드문 프랑스적인 코드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던 것 같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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