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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프랑스 영화일상/film 2023. 1. 25. 00:32
올 연말연시는 프랑스 영화와 함께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가가린>이다. 영화의 배경은 파리 남동부 이브리 쉬르 센느(Ivry-sur-Seine)에 자리한 철거 직전의 시테 유니벡시테(Cité universitaire)라는 공동주택이다. 영화 도입부에도 자료화면을 통해 간략하게 소개되지만 이 영화는 실화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이 공동주택은 최초의 우주사인 유리 가가린에 의해 1963년 준공된, 이 지역(Val-de-Marne)에서는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그러던 것이 반 세기를 넘기면서 안전상 문제로 인해 2019년 철거 작업에 돌입하게 된다. 때문에 영화는 시테 유니벡시테에 대한 오마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는 폭발 직전의 건물 안을 무중력으로 유영한다는 판타지적인 요소도 가미되어 있고, 벙리유 지역에서 살아가는 빈곤층의 고단한 일상도 담겨 있다. 주인공 유리는 자신에게 유일한 보금자리였던 시테 유니벡시테를 떠나지 못한다. 엄마와는 연락이 두절되고 친구를 찾기 어려운 유리에게 시테 유니벡시테는 세상의 전부와도 같다. 그런 유리는 세상과의 접점을 조금씩 넓혀 나가며 붕괴를 앞둔 세상으로부터 구출된다.
영화에서는 시테 유니벡시테가 철거를 위해 폭파되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굴삭기로 허무는 방식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허물어진 공간에는 철거 이후로도 10년을 두고 3억 유로 상당의 재개발이 이뤄질 예정이라 하고, 그렇게 해서 공급되는 1400여 세대 중 30퍼센트가 임대 형태(logements sociaux)로 제공될 예정이라 한다. 영화를 보면서 몰리에르의 <인간혐오자>를 관람하기 위해 이브리 쉬르 센느 지역을 들렀던 기억이 났고, 프랑스에서 생활했던 것이 떠오르며 힘들었던 그 시기가 그립기도 했다.
나는 이 영화가 1996년 영화인 줄도 모르고 이 영화를 보러 갔다. 장만옥이 출연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영화 속 장만옥이 너무 어리게 나와서 영화를 보고난 뒤에야 이 영화가 20년도 더 된 영화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영화 자체는 26년이 흐른 2023년에 봐도 그다지 위화감이 없다.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이나 표정, 파리 거리의 풍경은 늘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장만옥에게 1996년은 <첨밀밀>이 발표된 해이기도 한데, 젊은 시절의 장만옥은 특유의 청초한 분위기가 매력적이다.
영화에서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프랑스 영화의 허위와 진부함을 폭로한다. 루이 푀이야드의 1915년작 <뱀파이어(흡혈귀들)>을 재해석하기 위해 캐스팅한 여배우가 프랑스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 홍콩 배우 장만옥이다. 무성 흑백 영화를 20세기 말에 다시 구현한다는 발상도 미심쩍지만, 매사에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감독 비달 르네는 급기야 신경쇠약으로 영화촬영 현장에서 빠지기에 이른다. 게다가 영화 스태프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불협화음을 보이고, 영화를 만드는 것에 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Le cinéma n'est pas une magie.
c'est une technique et une science,
une technique née d'une science et mise au service d'une volonté
이 영화는 '영화란 무엇인가'에 관한 브레인스토밍을 위한 크로키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지적 자만에 심취한 프랑스 영화의 고립된 현실을 고발하는 것 같다가도, 자본으로 중무장하고 관객에게 즉각적으로 포만감을 안겨주는 헐리우드 영화를 고발하는 것 같기도 하다. 클래식 기타로 연주되는 서정적인 스페인 가요(Silvio Rodríguez의 La era está pariendo un corazón)와 일렉기타 베이스의 프랑스 가요(Luna의 Bonnie and Clyde)가 영화의 배경에 번갈아 깔린다. 뿐만 아니라 르네 비달의 <이마 베프>에는 라텍스 복장을 한 장만옥의 흑백 실루엣을 에워싸고 과감한 스케치와 패턴이 덧붙여진다.
파리의 한 호텔에 머물던 장만옥은 마치 <멀홀랜드 드라이브>에 등장하는 몽유병 환자처럼 한 객실에 침입한다. 객실에는 한 여자가 발가벗은 채 수화기를 너머로 연인과 다투고 있다. 뒤이어 화장실에 들어간 장만옥은 한손에 넣기에도 버거워보이는 커다란 목걸이를 훔쳐 방을 빠져나온다. 이윽고 잿빛 옥상으로 올라온 장만옥은 거센 비를 헤집고 난간에 서서 좀전의 목걸이를 던져버린다.
자신의 역할을 인지하지 못한 채 파리에 도착한 홍콩배우가 자신의 역할과 화해하는 장면이랄지, 또는 고집 센 영감 르네 비달의 불가해한 영화세계가 마침내 투사된 장면이랄지, 이 아리송한 씬은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면서도 영화의 전반적인 흐름을 크게 환기하는 대목이다. 르네 비달에 의해 완결되지 못한 영화는 그의 동료인 호세 모레노에게 바통이 넘겨지지만, 동양 배우를 섭외한 이 실험적인 영화는 결국 미완성인 상태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마 베프(Irma Vep)>가 <뱀파이어(Vampire)>의 애너그램인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는 관객에게 수수께끼와도 같은 모호한 질문을 내리꽂는 것 같다. 영화라는 것, 보는 행위, 이미지, 표현, 생각의 전달, 의미의 발현에 관하여.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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