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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에서 울진까지여행/2022 겨울 7번 국도 2023. 1. 2. 20:27
시간에 쫓겼던 2일차 일정을 생각해볼 때, 주어진 일정 안에서 여행을 소화하려면 경유지를 조금 줄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가용할 수 있는 일정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나중에 되돌아보건대 2~3일 정도 말미가 더 있었다면 훨씬 더 좋은 여행이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 이번 여행에서 속초, 삼척, 영덕 같은 지역들은 경유하는 데 그쳤고, 포항과 경주, 부산에서는 더 둘러보고 싶었던 곳들도 충분히 둘러보지 못했다. 하지만 경험적으로 모든 여행에는 아쉬움이 뒤따르게 마련이고, 3일차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침에 조금이라도 더 일찍 움직이는 것이었다.
이른 아침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동해항을 빠져나가는 길목에 위치한 만경대(萬景臺)라는 곳이었다. 이곳은 동해안에서 알려진 명승지는 아닌데, 동해시를 그냥 훑듯이 지나가는 게 아쉬워서 추암 지역으로 이동하기 전 잠시 들르기로 했다. 특히 전날밤 동해항 일대를 헤매면서 얼핏 도시 일대의 풍경을 살펴봤을 때, 항구를 에워싸고 공장이 크게 들어서 있는 것 같았는데, 밤에 놓친 도시의 풍경을 아침 만경대에서 다시 확인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소나무숲으로 둘러싸인 만경대에서 동해항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일이 어렵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인적이 드문 이곳에서 동호인들이 창작한 한시집(漢詩集)을 발견하곤 끄적이며 조금씩 읽어보다가 다시 부둣가로 내려왔다.
동해시의 추암 해변은 애국가 첫 소절에 나오는 배경으로 알려져 있는데, 촛대 바위는 이곳의 하이라이트다. 비교적 최근에 새로운 즐길 거리로 출렁다리가 생겼지만, 이곳의 가장 큰 볼 거리는 단연 촛대 바위를 위시한 이곳의 라피에(lapies) 지형이다. 내가 도착한 오전 시간대에는 탐방로에서 보이는 라피에 지형이 역광을 받아서, 기암괴석들이 푸른 바다와 뚜렷이 대비되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라피에는 석회암이 용식(溶蝕)된 결과 발달한 테라로사(terra rossa; 적색토) 가운데 끝까지 침식되지 않고 남은 암석기둥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그러고 보면 강릉에서 시작된 '적색토(terra rossa)'라는 커피 브랜드의 이름의 의미도 새롭게 다가온다.
이후 나는 지체 없이 차를 몰아 울진으로 넘어갔고, 부구리라는 작은 어촌의 한 카페에 멈췄다. 아랍어로 '내 사랑(حَبيبي)'이라는 그럴 듯하게 달콤한 이름을 가진 카페였다. 울진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 카페에는 내가 도착할 때까지 손님이 한 명도 없었던 듯 아주 조용했고, 카페에 달린 테라스로 나오니 남쪽 방면으로 근래까지 한창 언론에 오르내렸던 한울 원전 단지가 보였다. 좀 더 가까운 곳에는 바닷바람을 받아 앙상하지만 강단지게 자라난 소나무 몇 그루가 있어, 이곳 지역이 금강송으로 유명하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고성에서부터 따라온 두터운 파도는 여전히 위협적이었지만, 울진을 기점으로 그 기세도 한풀 꺾이는 듯했다.
이제는 어김없이 식사 때가 되어서 부구리에서 멀지 않은 죽변항에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연말을 맞아 죽변항에서는 지역축제가 한창이었고, 차량과 인파가 몰려 포구의 부두가 거의 끝나는 지점에 간신히 주차를 했다.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식사 종류라고는 물회 정도였는데, 물회를 주문했더니 푸짐한 매운탕과 가자미 구이가 달려 나왔다. 이곳의 생선은 고기를 뜯는 식감이 들 만큼 신선해서, 서울에서 즐겼던 해산물이 무색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뒤 항구 일대를 둘러보니 곳곳마다 오방색 깃발에 어린 댓잎을 꽂아 놓았고, 아마도 항구의 한가운데에서는 무대가 진행되고 있는지 뽕짝조의 신명나는 가락이 철썩이는 파도에 부딪쳐 묘한 울림을 일으켰다. 이후 나는 다시 운전대를 잡고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울진의 월송정(越松亭)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