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양에서 동해까지여행/2022 겨울 7번 국도 2023. 1. 1. 18:31
점심을 먹고 이제는 강릉 방면으로 이동했다. 최대한 드라이빙하는 느낌을 내기 위해 고속도로로 빠지지 않고 7번 국도를 따라 이동한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이번 여행 중 가장 마음에 드는 풍경 중 하나를 발견했는데, 바로 동호 해변이었다. 동호 해변은 양양 공항과 동해 사이에 낀 7번 국도 길목에 자리한 해안이다. 남에서 북으로 이동하면서 동호 해변을 본다면 풍경이 밋밋할 수 있는데, 북쪽의 언덕을 따라 남쪽으로 달리다보면 한눈에 들어오는 광활한 해변에 놀라게 된다. 나는 차를 유턴해 방금 지나온 언덕에 주차한 다음, 차에서 내려 다시 한 번 동호 해변을 바라보았다.
백사장의 폭이 경포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문득 올 여름 노르망디에서 보았던 오마하 해변이 떠올랐다. 그 때도 이런 언덕의 가장자리, 바다를 왼편에 둔 각도에서 널따란 해안을 조망했었다. 여름 노르망디의 바다에서 발견한 바다의 광대함을 이곳에서 다시 발견하면서, 나는 어쩌면 너무나도 먼 곳에서 거창한 것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동호 해변 위로는 움직이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이번에는 동호 해변의 남쪽 끝 하조대(河趙臺)에서 남에서 북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좀 전의 바다를 조망했다. 이쯤이면 태백산맥의 허리줄기가 참 오래도 버텨왔다는 생각이 들 만큼, 무정하리만치 원시적이고 거세게 파도가 해안에 부딪쳐 왔다. 이후에 행로는 강릉으로 이어졌는데, 강릉에서는 크게 세 곳 정도를 둘러보았지만 각각 긴 시간을 할애하지는 못했다. 이날 커피를 한 잔도 마시지 못했기 때문에, 일단은 강릉의 한 카페를 휴대폰으로 검색해 무작정 달려갔다.
계획없는 이번 내 여행(Bohemian)을 비유하는 듯한 상호명을 달고 있는 이 카페는 재일 교포 출신인 고령의 바리스타가 운영하고 있는 곳이었다. 카페 안에 전시된 오래된 기사에서 강릉으로 넘어오기전 서울 혜화동과 안암동에서 카페를 운영했다는 글귀를 발견했는데 대학 시절 갔던 바로 그 카페가 뒤늦게 아차, 하고 떠올랐다. 대학 시절 이 카페는 학생들 사이에선 교수들이 주로 찾는 카페로 알려져 있었고, 실제 커피의 가격대도 주머니가 가벼운 학생이 부담하기에는 비쌌기 때문에 이 카페에 가본 적이라곤 두어 번밖에는 되지 않았으니 기억을 소환하기까지 시간이 걸린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고보니 대학 시절 갔던 카페의 앤틱하고 조금은 케케묵기까지 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다만 이제는 강릉에 터를 잡은 이 카페는 비록 바닷가 코앞은 아닐지라도 채광이 훨씬 좋아졌다. 사람들이 몰리는 만큼 카페 안이 더욱 분주해졌다는 점도 다르다. 메뉴는 계속 개발되는 모양이었는데, 나는 이곳의 시그니처 커피 중 하나인 프렌치 라오스를 주문하고 사장님이 직접 커피를 내리는 것을 구경하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는 아직 갈 길이 멀었기 때문에 도착한 지 채 한 시간이 안 되어 운전하면서 마실 수 있는 커피—15g짜리 남대천 커피—를 하나 더 테이크아웃해서 나왔다.
이후 강릉에서 더 들른 두 곳에서의 일정은 너무나도 단편적이다.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으레 강릉에 오면 간다는 경포대와 정동진을 찍고 지나가듯이 둘러본 것이 전부다. 동지(冬至)는 지났지만 겨울해는 여전히 짧아서 오후 네 시를 넘기면서부터 벌써 사위가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경포대에 도착했을 때는 그림자가 한없이 늘어지는 시간이 되었고, 곧이어 정동진을 갔을 때는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저녁의 초입이 되어 있었다. 숙소를 정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강릉에서 2일차를 끝내기에는 이어지는 일정들이 뒤로 밀리는 느낌이 있어서 내키지 않지만 밤운전을 해서라도 동해까지 가기로 마음먹었다. 국도를 따라간다는 게 그리 어려운 주행은 아닌데도, 동해시 시내에 들어선 뒤로는 초행인데다가 밤길에 어두운 나머지 몇 번이나 길을 헤맸다.
동해시에 숙박할 곳을 서둘러 정한 뒤, 저녁을 먹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섰다. 밤의 동해시는 연말 분위기라곤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쓸쓸했고, TV 속에서 보던 소멸해가는 도시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했다.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찾아간 닭곰탕집도 열댓 개 정도 되는 테이블에 손님이라곤 단 한 명도 없었고 가게를 운영하는 일가족만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어쩐지 1인분을 주문하기도 무안했다. 신속하게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에는 닭곰탕 집으로부터 한 블록 정도 거리에 있는 붕어빵 가게에서 붕어빵 여섯 개를 사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떠들썩한 연말 쥐죽은 듯이 조용한 도시의 어느 허름한 숙소에서 잠을 청하면서, 이모부의 집에서 홀로 열한 살 생일을 맞이하던 해리 포터가 떠올랐으니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내가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