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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에서 고성까지여행/2022 겨울 7번 국도 2022. 12. 30. 22:22
유난히 눈이 잦은 올 겨울, 새로운 일을 앞두고 주어진 2주간의 여유 시간을 활용해 잠시 여행을 다녀올 만한 곳을 고민하다가 동해안 7번 국도를 따라 여행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무계획으로 출발한 여행. 처음에는 부산에서 고성으로 올라갈까, 고성에서 부산으로 내려갈까 고민하다가 북에서 남으로 이동하는 걸 택했다. 그러자면 서울을 출발해 강원도의 굽이굽이 산길을 가로질러야 한다. 좁은 국도에는 아직 빙판길이 남아 있을까 걱정했지만, 도로 상태는 양호했을 뿐만 아니라 염화칼슘을 너무 뿌린 나머지 아스팔트 도로가 뿌연 잿빛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이번 여행은 모처럼 차를 타고 떠났다.
우리나라의 여러 지역 가운데 강원도는 개인적으로 가장 친숙한 곳 중 하나인데, 특히 강원도의 최전방 지역으로 여행을 많이 다녔던 기억이 있다. 나는 고성으로 가는 길목에서 양구를 들르기로 했다. 잠시 휴식을 취할 겸 내가 들른 곳은 양구 도촌리의 한 사이더리(cidery)로 말 그대로 사과 음료를 만드는 곳인데, 이 곳의 가장 특징적인 점은 파지 사과, 그러니까 상품성이 떨어지는 사과를 재료로 음료를 만든다는 점이다. 점심 즈음 도착한 사이더리에서 나는 애플사이더 비니거와 파브르통(far breton)을 주문했다. 가게를 운영하는 두 분의 아주머니와 잠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수 년간 프랑스에 지내시면서 자연친화적인 방식의 음료 제작에 관해 공부하셨다고 했다. 깨끗한 산미가 매력인 음료 한 잔을 마신 뒤, 운전을 하면서 마실 콤부차도 하나 테이크아웃했다. 평소 내가 마시는 것들이라곤 9할이 커피인지라 이런 과일음료나 차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는데, 짧은 시간 이곳에 머물고 주인분들에게 메뉴를 물어보면서 새로운 음료를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첫날은 빙판길이 우려되어 운전이 조심스러웠는데, 가장 걱정되었던 진부령 구간도 무사히 통과했다. 이날 마음 속으로 정한 단 하나의 여정은 통일 전망대를 가보는 것이었다. 통일전망대는 오래 전 가본 적이 있는 데다, 심지어 고성을 거쳐 금강산을 육로로 여행한 적도 있다. 하지만 너무 오래 전 일이라 기억에도 가물가물했다. 그런 생각들을 따라가면서 7번 국도의 북쪽 가장 끝 통일 전망대를 7번 국도 여행의 출발점으로 삼기로 했다. 물론 이 7번 국도라는 것도 실은 함경도까지 이어진다. 이번 여행에서 달리지 못하는 미완의 7번 국도를 잠시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통일전망대는 민통선 안에 있기 때문에 차량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민통선 밖에서 허가서를 얻어야 한다. 민통선 안 검문소에서 통행을 관리하는 군인에게 출입증을 제시했다. 이 추운 날씨에서 최전방에서 일하는 어린 군인들을 보면서, 군대 시절의 기억과 이들에 대한 모종의 측은함이 짧은 순간 교차했다.
차 안에 머물 때는 몰랐는데, 이날 날씨는 굉장히 추웠다. 고성은 우리나라의 서해의 최북단인 백령도보다도 위도가 더 높다. 겨울바람은 살을 에는 듯이 차가웠고, 바다에서는 백사장보다도 커다란 두께의 파도들이 쉼없이 밀려 들어왔다. 밖에서 구경하다가 결국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건물 실내로 들어와 북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민둥민둥한 구선봉은 금강산을 육로로 들어갈 때 보았던 황량한 경관을 연상케 했다. 그리고 시야의 왼쪽 깊숙이 금강산의 능선이 가장 높은 곳에서 물결쳤다. 그 앞으로는 DMZ가 가로놓여 있고, 다시 이 구간을 가로지르는 육중한 철로가 아무런 목적성도 띠지 못한 채 풍경 안에 커다란 분할선을 그었다. '인간이 빚어낸 원시(原始)'라는 DMZ의 역설적인 풍경은 크고 작은 모순으로 점철된 우리의 분단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고 생각했다. 너무나도 거대해서 너무나도 천천히 전진하는 파도의 무리가 모순으로 가득한 해안을 으스러뜨릴 기세로 흰 포말을 밀어내고 또 밀어냈다.
늦은 오후 숙소를 정하고 일찌감치 일정을 마무리했다. 저녁에는 우리나라의 최북단 항구인 대진항에서 저녁을 먹었다. 여행 비수기인 만큼 문을 연 가게는 많지 않았고, 많지 않은 선택지 중에서 회덮밥으로 식사를 해결하기로 했다. 한낮의 추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더 거센 추위가 밤공기를 가득 채웠다. 돌아온 숙소에서는 테라스 너머로 파도가 일었다 부서지는 소리가 귓전을 가득 채웠다. 그 소리를 들으며 수 겹의 푸른 파도가 뭍으로 올라오던 한낮의 동해 풍경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