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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훤당 고택과 용흥못여행/2024 입춘 즈음 달구벌 2024. 2. 19. 18:01
대구에는 못(池)이 많다. 오래 전 한 일본인 친구가 내게 한국에는 일본의 비와호(琵琶湖)―시가현에 자리한 일본에서 가장 큰 호수―같은 호수가 있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 인공 호수나 저수지야 많지만 떠오르는 거라곤 포천의 산정호수 정도여서 괜히 대결(?)에서 진 듯한 기분이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호수는 어휘상으로나 개념적으로는 존재해도 우리나라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고여 있는 물'―물론 완전히 닫힌 공간은 아니다―에 대한 심상은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러한 공간에 대한 경험이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구에 가면 거창한 호수는 아닐지라도 크고 작은 못(池)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된다. 흔히 내륙도시의 대명사로 알려진 대구에서 큰 면적의 수평(水平)을 발견하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못해 반갑기까지 하다. '못'이라는 순우리말로 끝나는 이런저런 지명이 풍기는 아늑한 정취는 물론이거니와.
그렇게 한훤당 고택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발견한 것이 용흥못(龍興池)이다. 나중에 확인했을 때라야 이곳에 용흥지 또는 용흥못이라는 걸 알았고, 이때까지만 해도 이름없는 저수지나 연못 정도로 생각했다. 다만 못에서 한적하게 헤엄치는 고니를 발견한 순간, 고택일랑 그만두고 가까이 다가가 동물들을 관찰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서너 마리 되는 고니 주위에는 마치 스타를 보필하는 스태프들처럼 단청 빛깔의 청둥오리들이 떼지어 몰려 있었다. 물풀 사이에 먹을 것이 많은지 한 무리의 새들이 못 가장자리에서 고개를 주억이며 열심히 먹이활동을 한다. 그 모습이 아무런 꾸밈이 없어 훼방받지 않는 공간에 투명인간처럼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한훤당 고택은 마을의 당산나무로부터 남동향으로 정문을 둔 오래된 한옥이다. 서흥 김씨의 집성촌을 이루는 여러 고택 가운데 하나로, 고택이라고는 하나 기와만 얹었을 뿐 반들반들 새것 느낌이 나는 입구를 보자 어쩐지 실망감부터 든다. 하지만 정문을 통과하면 디귿자 형태로 한옥이 나타나는데, 비록 개량된 것들이기는 하되 빛바랜 처마와 기둥으로부터 오래된 시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당으로 보이는 고택 꼭대기 구역은 왕래를 금하고 있고, 그 뒤로는 대숲이 장수의 눈썹처럼 서슬퍼렇게 호(弧)를 그리고 있었다. 나는 자리를 옮겨 단열을 단단히 해놓은 별채 카페에 앉아 아메리카노와 가래떡을 시켜놓고 박완서 작가의 수필을 읽으며 오전 반나절을 쓸쓸하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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