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사소한 악취미가 생겼다. 일이 끝나고 나면 자잘한 보복소비를 하며 기분전환거리를 찾게 된 것.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끝나갈 즈음에도 하지 않던 보복소비를 하게 된 발단은 잦은 야근에서 비롯된다. 작년 연말을 기점으로 밥먹듯 야근을 하다보니 소액이나마 야근수당이 차곡차곡 쌓인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야근수당으로 평소 사지 않던 물건을 사는 것이다. 가령 꽤 값나가는 수첩이나 필기구를 사는 식이다. 원래도 문구류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만큼 사놓고 쓰지 않는 나의 성향도 잘 아는지라 쓸 것 같지 않은 물건이면 사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요즘은 개성 있는 문구류를 쭉 구경하다가, 이따금 마음에 드는 것은 나중에 선물로 쓰든 필기에 쓰든 목적을 따지지 않고 대책 없이 사들이는 것이다.
여행도 내게는 그렇게 보복소비를 합리화하는 또 하나의 명분이 되어주고 있다. 서울은 분명 각양각색의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다양성도 있지만,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서로에 대한 몰이해와 무관심 역시 짙은 공간이다. 마치 적도에서 방향을 잃어버린 나침반같다. 특히 어느 순간부터 직선과 콘크리트로 쌓아올린 빌딩 안에서 정신없이 일을 하다보면, 일을 할 때는 몰랐다가 주말이 되면 내면으로부터 찝찝한 갈증을 느낀다. 해갈을 위해선 눈과 귀를 활짝 열어야 하고, 그러자면 도시 밖으로 떠나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평소의 나는 얼마나 내 감각기관들을 혹사시키고 있던 것일까.
해인사(海印寺)는 가야산 자락에 고요한 바다를 품고 있는 고찰(古刹)이다. 나는 산보다는 바다를 더 좋아하는데, 사찰의 이름에 '바다'가 들어가 있는 것을 떠올리고선 도착하기도 전부터 그 장소가 마음에 들었다. 사실은 언제인가부터 산을 조금씩 좋아하게 되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내게 산은 지평선을 구불구불하게 바꾸고 멍에를 떠올리게 하는 대상이었던 반면, 바다는 막힘 없는 수평선 위에 나의 미래를 투영하는 공간이었다. 지금에 와서 산을 다시 보게 된 건, 억겁의 시간을 묵묵히 견뎌온 이 땅에 대한 일종의 경외심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보자면 바다는 끊임없이 출렁이며 시시각각 생성과 소멸의 탈바꿈을 거듭하는 변덕스런 존재다.
국도를 달리며 언덕을 오르내릴 때마다 나타났다 사라지던 설산을 설레는 마음으로 카메라에 담으며 해인사의 당간지주를 통과한다. 아직 늦겨울의 입김이 남아 있지만 입춘과 설을 맞아 사찰은 경내를 정돈하는 승려들로 분주하고, 대웅전 앞에 달아놓은 색색의 연등을 보며 5월의 초파일을 예감한다. 눈이 녹아 진흙탕이 된 마당은 거추장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다가오는 봄기운에 설레는 마음이 인다. 그 자리에서 나는 마음 속에 존재할 뿐인 바다를, 해인사 삼층석탑에 걸린 파란 하늘에서 휘이 찾아본다. 머리 위로는 총천연색의 연등, 발 아래로는 부단히 흔들리는 점점의 그림자. 그 사이에서 하늘은 무구(無垢)하게 평행선을 그리고 있었고 마치 영원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