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거대한 상징 체계 안에서 살아간다. 많은 돈을 벌고자 하는 것도 결국은 자신에게 더 뛰어나고 남다른 상징을 두르기 위함이다. 인간만큼 많은 상징물을 만들어내는 존재도 없을 것이다. 버스 정류장의 옥외 광고 속 모델, 고층 아파트에 장식적으로 붙여 놓은 근사한 영문명, 공원 가로등마다 알록달록 내걸린 도시의 엠블럼. 상징 체계 없이는 사고하기가 불가능할 만큼 내가 호흡하는 공간은 모두 상징물로 꽉 차 있다.
그러한 상징 체계의 거의 대부분은 가공된 것들이다.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미를 규정하기 위해, 부를 드러내기 위해. 태초에는 많은 상징물이 필요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매체(media)와 광고가 발달한 오늘날에는 수많은 이미지와 수많은 텍스트가 쉴새없이 상징을 실어나른다. 행복은 무엇이며, 성공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상징체계는 급속히 팽창하고 복잡해졌지만 상징을 둘러싼 우리의 믿음 체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상징에 따르는 믿음의 정도를 따지자면 태곳적이나 최첨단 기술이 즐비한 오늘날이나 대동소이할 것이다. 참이든 거짓이든 중요치 않다. 우리는 믿을 것이 필요하다. 우리에겐 믿기 위해서라도 상징이 필요하다.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은 징그러울 만큼 그러한 상징에의 믿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공간이다. 근래에 경주의 대릉원이나 공주의 무령왕릉을 다니며 여러 고분군을 둘러봤어도, 지산동 고분군처럼 산줄기를 통째로 왕의 무덤으로 쓴 데에는 뜨악하게 하는 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옛날 왕족의 권세가 형형한 이 공간을 찾은 것은 어떤 연상(聯想)에서였단 말인가? 그건 어떤 믿음을 좇아서라기보다는 이 땅의 확실성을 느끼기 위함이지 않았을까. 수 천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희미한 흔적으로 남은 표식(標識)과, 그 표식이 살아남은 이 땅에 대한 확실성.
줄지어 이동하는 무당벌레처럼 주산 자락에 크고작은 왕릉이 몇 가닥 모숨을 이루며 남향의 안림천(安林川)에 다다를 때까지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주산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에는 때로는 성기게 때로는 바특하게 무덤과 무덤이 군(群)을 이룬다. 지금은 망자를 기리는 상징적 공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공원에 가까운 이 공간을 가꾸기 위해, 얼마나 많이 사람의 손길이 갔을까 싶다. 그럼에도 힘차게 솟아오른 소나무의 굵은 마디마디에서, 설화(說話)조차 남지 않은 작은 왕국들의 네크로폴리스가 켜켜이 덮여 있던 시간의 먼지를 갓 벗어낸 인상을 받는다.
동쪽을 종(縱)으로 가로지르는 회천(會川)에 접해 고령군 읍내가 둥지를 트고 있었다. 터널이 토해낸 고가도로가 회천 위를 높다랗게 가르되, 다리를 저토록 높게 지탱하게끔 만드는 오늘날의 토목공학이 어떤 진보의 상징이라기보다는 고령 읍내를 보란듯이 관통하며 오히려 썰렁한 소외를 상징하는 것 같다. 그리고 멀리서 바라보기에도 감지할 수 있는 마을의 쇠락함으로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미디어에서 쏟아내는 지역 불균형, 고령화 문제 따위의 문구를 떠올린다. 실상은 그런 어휘를 소리와 글자로 접했을 뿐, 담긴 뜻은 헤아리지도 못하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얼마나 많은 잊혀진 내크로폴리스 위에 세워졌을까. 살아남은 네크로폴리스 위에 서서 지척으로 다가오는 네크로폴리스에 대해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