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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지나간 새로운 이야기주제 없는 글/印 2025. 12. 24. 17:27

세종수목원에서 조치원(鳥致院)이라는 이름으로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이 일대가 세종특별자치시라는 더 번듯한 이름과 함께 명판을 바꾼지도 십수 년이 흘렀다. 내 기억력은 종종 놀라울 만치 허술해서 조치원에 관한 기억은 열차를 타면 대전을 목전에 두고 잠시 멈춰가던 도시로 남아 있을 뿐, 2000년대 초반 수도 이전이 논의되었던 것도, 관습헌법이 인정되어 위헌 결론이 난 것도, 이후 행정중심행복도시라는 새로운 외피를 두르고 지금의 행정구역이 출범한 것도 한때 좌충우돌하며 지나간 가벼운 사건 정도로 여겨진다. 이 지역을 둘러싼 사건들은 TV 속 화면이나 기사란에서나 접할 뿐 실은 내 일이 아니었던 수많은 일들 중 하나였고, 멈춰선 열차 안에서 지루하게 바라보던 세 글자로 된 역명만이 내가 이곳에 대해 경험하여 알고 있는 유일한 지식이었다.

용산역으로 향하는 출장길 
세종수목원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정기관을 수도 바깥으로 옮긴다는 건 큰일일진대, 세종시는 일로도 개인 용무로도 좀처럼 찾을 일이 없어 근래까지도 그저 이름으로만 기억하는 장소 중 하나였다. 그러던 중 세종시를 처음 찾은 게 대략 2년 전의 일로, 업무 출장 때문이었다. 단지 스쳐지나가는 곳이었던 이 동네에 대한 기억 속에는 늘 그랬듯 육중한 조차장 외에는 다른 풍경이 남아 있지 않기에, 눈앞에 보이는 신식 건물과 거대한 정부청사 건물을 보고도 이곳이 얼마나 상전벽해가 된 것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이곳에 여러 이름이 쓰여졌다 지워졌겼지만, 내가 이 장소에 대해서 아는 건 보잘 것 없었다. 이곳에 남아 있는 풍경, 새로운 풍경, 바뀐 풍경이 무엇인지 나는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었다.

세종수목원에서 
세종수목원에서 나와 직장 선배는 청사에서 진행된 회의에서 그간의 논의내용 중 미진한 것들을 매듭지은 후, 늦은 점심을 먹고 기분전환 겸 수목원을 찾았다. 이른 아침 안개로 자욱했던 이 도시는 한낮을 넘긴지 한참 되었어도 희뿌연 기미가 가시지 않았다. 이 도시에 새로운 명판을 걸고 사람이 우르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 10년도 넘었다지만, 나무가 자라는 것이 한두 해로 될 일은 아니어서 이곳 나무들의 줄기와 가지는 연약해 보였고 이례적으로 온화했던 가을 날씨 탓에 단풍 또한 무르익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가 하면 수목원 곳곳에 물길을 낸 습지 가장자리마다 메마른 억새들이 무성했고, 뉘엿거리며 기울어 가는 태양이 수면에 조촐하게 물수제비를 띄웠다. 여명(黎明)과 황혼(黃昏)이 뒤섞인 이곳 풍경은, 다가올 새로운 이야기도 언젠가 지나가 잊혀질 이야기도, 그 어느 맥락에도 머물지 못하는 내 상태를 닮았고, 이 도시에 관한 빈약한 기억 또한 닮았다.

연극보러 간 날 
연극보러 간 날 수목원 안에 위치한 식물관에는 테라리움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직장 선배의 지인이기도 한 직원의 설명에 따르면 이 조형물들은 올 초 경북 지역 산불 당시 불에 탄 나무를 재료로 만든 것들이라고 했다. 몇 초짜리 뉴스 화면에 흘러가던 도로 위 불기둥과 바람에 흩날리는 불씨의 적색 이미지가 아닌, 새까맣게 그을린 나무 위에 자라나는 이끼의 싱그러움과 정지화면처럼 일체의 미동 없이 휴식을 취하는 귀여운 도마뱀이 내 주의를 끈다. 들숨날숨에 가볍게 오르락내리락하는 도마뱀의 옆구리를 홀린 듯 바라보면서, 소멸과 생성의 질긴 모순을 느꼈다. 다가오고 이내 지나가는 것, 새롭지만 이내 낡는 것, 나타나지만 이내 사라지는 것. 그 사이의 긴장. 거기에 사람들은 이름을 붙이고 뜻을 불어넣지만 우리는 어디까지나 그 둘 사이에서 보이지도 않는 경계를 따라 아슬아슬하게 한 걸음씩 내딛는 것일 뿐, 그저 왼발을 내딛으면 이어서 오른발이 따라오는 고되고도 서투른 춤일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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