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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스러운 탐정들 / 로베르토 볼라뇨(Roberto Bolaño Avalos) / 열린책들>
비평은 한동안 작품과 동행한다. 이어 비평은 사라지고 작품과 동행하는 이들은 독자이다. 그 여행은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다. 이윽고 독자들은 하나, 둘 죽고 작품만 홀로 간다. 물론 다른 비평과 다른 독자들이 점차 그 항해에 동참하게 되지만, 이윽고 비평이 다시 죽고 독자들이 다시 죽는다. 그리고 작품은 그 유해를 딛고 고독을 향해 여행을 계속한다. 작품에 다가가는 것, 작품의 항로를 따라가는 항해는 죽음의 확실한 신호이다. 하지만 다른 비평과 다른 독자들이 쉼 없이 집요하게 작품에 다가간다. 그리고 세월과 속도가 그들을 집어삼킨다. 마침내 작품은 광막한 공간을 어쩔 도리 없이 홀로 여행한다. 그리고 어느 날 작품도 죽는다. 태양과 대지가, 또 태양계와 은하계와 인간의 가장 내밀한 기억, 즉 만물이 죽듯이. 희극으로 시작된 모든 것은 비극으로 끝난다.
일전에 이 책을 읽다 관둔 적이 있다. 그러고선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을 읽었다. 그 뒤 곧바로 <야만스러운 탐정들>로 되돌아오지 않고, <스페인사>를 읽었다. 그 다음에는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읽었다.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읽은 것은, 먼저 스페인사와 불가분 관계에 있는 신대륙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함이었고, 부차적으로는 <야만스러운 탐정들>의 배경인 라틴아메리카의 정체성과 문화적 토양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야만스러운 탐정들>를 읽으면서 일종의 광기(狂氣)를 느꼈는데,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턱대고 소설을 읽었다가는 헛된 독서에 그치고 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는 로베르토 볼라뇨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포석(布石)이었다.
1000페이지에 달하는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두 번째 시도에서는 첫 장인 <멕시코에서 길을 잃은 멕시코인들>을 읽을 때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읽혔다. 직전에 딱딱한 역사서를 읽은 참이라 소설은 비교적 쉽게 읽혔던 것 같다. 또 한 페이지에 들어가 있는 활자도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특히 두 번째 장인 <야만스러운 탐정들>부터는 첫 장에 비해 줄거리가 다채롭고 입체적인 느낌이 있었다. 맨 처음 소설을 접했을 때보다는 한결 소설이 주는 무게감을 덜어내면서 문장과 표현들이 더욱 흥미롭게 다가왔다.
우선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용어 하나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다음은 소설의 첫 문장이다. "내장(內臟) 사실주의에 동참하지 않겠느냐는 친절한 제안을 받았다." 괄호 안에 들어간 한자까지 포함해서 책에 실린 내용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한자로 봐선 맨 처음 내가 머릿속으로 연상한 그 의미의 어휘가 맞는 것 같은데... '내장+사실주의'는 도대체 뭐지?? 하고 좀 벙쪘다. 다른 사람의 해설을 미리 확인하고 싶지는 않아서, 일단 쭉 읽어봤다. '내장 사실주의'가 주를 이루는 내용인데 첫 장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를 때까지 '내장 사실주의'가 뭔지 감은 오지 않았고, 내용 자체도 성년이 되어가는 청년이 겪는 (도무지 의미를 가늠할수조차 없는) 좌충우돌 성장기여서 맨 처음 소설을 읽을 때는 이쯤 되면 에라 모르겠다 하고 <멕시코에서 길을 잃은 멕시코인들>에서 책을 덮어버렸다.
사실 소설이 끝날 때까지도 내장 사실주의가 뭔지 정확하게 몰랐다;; 다만 주인공과 그 일당이 추구하는 문학적 지향점이라는 정도만 염두에 두고 소설의 나머지를 읽었다. '옮긴이의 말'을 본 후에야 비로소 로베르토 볼라뇨가 사용한 '내장 사실주의'의 의미가 명확해졌는데, 나처럼 소설 초반부터 흐름을 따라가기 어려워 당혹감을 느끼는 독자라면,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내장 사실주의'의 의미를 미리 파악해두면 도움이 될 것 같아 짤막하게 소개한다.
옮긴이(우석균 氏)의 말에 실린 몇 개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한다.
내장 사실주의는 원래 시로 문학을 시작한 볼라뇨가 산티아고 파파스키아로와 함께 주도한 전위주의 그룹인 인프라레알리스모(infrarrealismo, 밑바닥 현실주의)의 이름을 바꾸어 작품에 넣은 것이다. 이는 초현실주의(superrealismo)라는 이름의 반대말이지만 저항과 파괴라는 전위주의 특유의 정신은 공유하되 밑바닥 생활이나 거리의 언어 등을 날것 그대로 시에 담겠다는 뜻을 천명한 것이다.
이 정도만 인용해도 뜻을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소설에는 정말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다양한 공간이 등장한다. 니카라과, 칠레, 멕시코, 페루에 이르는 남미는 물론이거니와, 주인공 '울리세스 리마'의 여정에는 이스라엘과 오스트리아가 등장하고, 또 다른 주역 '아르투로 벨라노'의 여정에는 스페인과 프랑스, 심지어 아프리카의 앙골라, 르완다, 라이베리아까지 등장한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우리의 주인공 '가르시아 마데로'-첫 번째 장과 마지막 장에서 관찰시점을 제공하는 인물이자, 로베르토 볼라뇨의 자전적 캐릭터-는 비록 멕시코를 벗어난 적은 없지만, 그 역시 멕시코시티 구석구석을 활보하고 다니는가 하면, 소노라(멕시코 북부 일대) 지역을 순회하기도 한다. 방랑자들도 이런 방랑자들이 따로 없다. 하는 행동을 보면 현대판 돈키호테들이 한 명도 아니고 여럿이서 우르르 몰려다니는 모습이다.
요지는 로베르토 볼라뇨의 소설이 다양한 부류의 인간상과 공간을 제시함으로써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축약시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두 권으로 분권된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읽은 뒤 소감에 대해서도 밝혔지만, 1492년 콜럼버스에 의해 신대륙이 발견된 이래 그들의 땅에는 비참한 역사가 루프에 갇힌 양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10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소설에서 비록 두세번 정도밖에 등장하지 않은 단어이지만 바로 '타자성'은 그러한 라틴아메리카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달리 말해, 그들이 그들이 살고 있는 물리적, 문화적 공간에서 주인이 되지 못하고 주변에 머무른다는 것(1492년을 기점으로 타자(유럽인들)에 의해 규정되고 지배당하는 존재로서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는 그 첫 여정을 시작한다. 역사의 첫 단추를 끼우는 단계에서 타자성이 출현했다는 것, 이는 이후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에서 핵심적인 문제를 이룬다)은, 끝내 그들이 역사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역사에 좌절하는 비운으로 이어진다.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라는 수레는 마치 관성(慣性)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듯이, 그 땅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짓이기는데도 도대체 멈추질 않는다. 수레가 산산조각나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을 것 같다. 같은 맥락에서 칠레의 피노체트 쿠데타,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봉기, 페루의 빛나는 길, 멕시코의 틀라렐롤코 학살 모두 소설에 등장하는 라틴아메리카 역사의 뼈아픈 편린(片鱗)들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옮긴이의 표현이 떠오른다. '폐허'. 야만스러운 문명의 결말은 폐허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삶으로부터 유리(遊離)되고, 문명의 만행에 유린(蹂躪)당하고, 마침내 이룩한 문명이 자멸하고 마는 거대한 서사를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담고 있다. 울리세스 리마, 아르투로 벨라노, 가르시아 마데로, 루페 4인이 내장 사실주의의 근원을 따라가기 위해 끈질기게 쫓은 세사레아 티나헤로가 살던 마을의 이름이 '비야비시오사(Villa viciosa)'다. '사악한 마을'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로베르토 볼라뇨는 악(惡)의 근원을 규명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끝으로 마지막 장 <소노라의 사막들>에서 가르시아 마데로가 남긴 2월 15일자 일기에 점선으로 그려진 창문 형상을 보며, 우리가 또한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떤 틀모양을 하고 있는지, 무엇이 허(虛)이며 무엇이 실(實)인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어느 소설가가 쓴 표현처럼 가슴 한 구석이 무너져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절망스러웠다는 것이 아니라, 소설에서 얻은 충격 때문에 보이지 않은 내면의 장벽 하나가 허물어졌다는 의미에서.
로베르토 볼라뇨가 독서광이었다고도 하던데(물론 작가라는 직업적 특성상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정말 방대한 문학작품 인용하는 것을 보며 천재적이다 싶었다. (정말 이 책들을 다 한 번씩 읽어봤단 말인가?) 여튼 두 번째의 독서 시도 끝에 우여곡절로 작품을 다 읽었다. 읽을 만한 좋은 작품이 많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여실히 느끼며, 모두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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