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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움베르토 에코/열린책들>
지난 두 세기 동안,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우리 세계는 협량(狹量)과 희망과 절망의 폭풍에 난타당해 왔다. 자, 강을 생각해 보아라. 단단한 땅, 튼튼한 제방 사이를 오래오래 흘러가는 넓고 웅대한 강을... 어느 시점에 이르면 흘러가는 강은 기진하는데, 너무 오랜 시간 너무 넓은 공간을 흘렀기 때문이요, 마침내 바다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로써 강은 더 이상 제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강의 정체성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강은 강 자체의 삼각주가 된다. 주류(主流)는 남을지 모르나 지류는 사방으로 흩어진다. 혹 어떤 흐름은 흐르기를 계속하고, 혹 어떤 흐름은 다른 흐름에 휩쓸리나 어느 흐름이 어느 흐름을 낳고 어느 흐름에 휩쓸리는가는 아무도 모른다. 어느 것이 여전히 강이고 어느 것이 이미 바다가 되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장미의 이름>을 완독(完讀)한 날은 이탈리아 영화 <귀>를 보고 온 날이기도 했다. 두 작품 모두 올해 읽은 (또는 본) 작품 가운데 최고로 꼽을 만하다고 생각하는데, 공교롭게도 둘 모두 이탈리아 산(産)이다. 이탈리아 문화에 관심도 없고, 이탈리아 문화와 인연도 없었는데 하루 사이에 두 개의 훌륭한 작품을 연달아 접하니, 큰 소득을 얻은 기분이었다.
사람들 사이에 자주 회자되곤 하는 작품들은 가능하면 접하려고 한다. 그런 목적에서 <장미의 이름>은 대학교 때 일찍이 독서를 시도했던 소설이다. 그렇지만 소설 전반부터 어려운 레퍼런스들(종교나 신학자, 고문헌에 대한 주석이 많이 등장한다)이 많아서 중도에 읽다 말았다. 그 때 아마 2일차의 기록까지 읽었던 모양이다. 전반부의 내용은 대략 기억나는 부분이 꽤 있었다.
대개 '서양 중세'에 대한 관심은 르네상스 시대나 서세동점의 근현대사에 비하면 덜한 편이다. 흔히 '암흑 시대'라고 묘사될 만큼, 인간의 주체성이나 능동적인 모습보다 '신의 권능'이 강조되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중세 유럽은 당시의 중동이나 극동아시아에 비하면 문명이 앞서 있다고 할 수 없는 시기이기 때문에 더욱 간과되곤 한다. 그러나 중세를 배경으로 이렇게 유려한 소설을 썼다는 것, 또한 이러한 글을 풀어낼 만큼 중세에 대한 박학한 지식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정말 놀라웠다.
단순히 보자면 이 글은 '추리 소설' 류(類)이지만, 움베르토 에코가 궁극적으로 독자에게 던지고 싶었던 질문은 "진리란 무엇인가?"였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청빈'을 둘러싼 프란치스코회와 베네딕트회 간의 해석 논쟁, 그리고 이러한 분쟁에 끼어든 돌치노파(이단)에 이르기까지, 소설 <장미의 이름>은 수도사 및 종파간의 암투를 치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잘 짜여진 퍼즐조각 같다.
'7일간 벌어지는 사건'이라는 큰 틀에서 글을 풀어나가는 동시에 '요한의 묵시록'을 모티브로 차용한 것도 재미있었는데, 또 한 가지 눈여겨본 것은 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었다. 루트비히 황제의 비호를 받고 있는 프란치스코회와 교황 요한 22세의 비호를 받고 있는 베네딕트회간의 협상을 중재하기 위해 파견된 노수도사 '윌리엄', 노수도사 곁에서 보좌하는 인물이자 글의 서술자이기도 한 '아드소', 그밖에 '호르헤 수도사' 등등.
먼저 '잉글랜드의 윌리엄'은 섬나라에서 온 인물답게 사변(思辨) 못지 않게 '경험'을 중시하는 인물이다. 한편 '게르만의 아드소'는 윌리엄의 가르침을 받는 동안 여러 시행착오를 겪고 깨달음을 얻는데, 상대적으로 덜 문명화되어 있던 게르만인이 가톨릭의 본고장 이탈리아에서 우왕좌왕한다는 설정이 그럴듯하다. '에스파냐의 호르헤'는 본인이 믿는 교리(敎理)에 매우 완고하고 배타적이여서 주변 인물과 자주 불화를 일으키는 인물이다. 유럽대륙에서 르네상스가 태동할 시기에 스페인은 오히려 중세 스콜라 철학으로 회귀하고 마녀 재판과 화형식이 횡행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호르헤'가 스페인의 부르고스라는 도시에서 왔다는 설정은 쉽게 납득된다.
그밖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부>라는 모티브도 흥미로웠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 제2부>를 남겼다는 기록은 전해지지만, 아직까지 <시학 제1부>만 발견되고 <시학 2부>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 제2부>에서 전개하는 철학, 특히 인간을 동물과 구분하게 해주는 특징으로서의 '웃음'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지가 '진리에 대한 진지함'을 훼손한다는 호르헤의 주장에 대해, 윌리엄이 정면으로 반박하는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시학 제2부>가 발견되지 않은 이상, 이는 어디까지나 설정된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章)은 제4일의 3시과인데, 아드소가 사랑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고뇌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진리란 무엇인가'에 대해 윌리엄의 목소리를 빌려, 움베르토 에코 자신이 생각하는 답변을 서술하는 마지막 장(제7일)도 기억에 남는다.
작가가 이토록 다양한 종파, 다양한 언어에 통달하고 있다는 사실에 연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맨 처음 <장미의 이름>을 접했을 때 왜 이 책을 끝까지 붙잡고 있지 않았는지 이해되지 않았을 만큼 재밌게 읽었다. 제5일차쯤 되었을 때, 윌리엄이 쫓는 범인이 누구인지 대충 짐작이 되기는 했지만,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빨리 확인하고 싶어서 새벽 3시까지 책을 붙잡고 있었다. 그만큼 재미있었다. 워낙 유명한 소설인데 이제 와서 재미를 느꼈다니 아쉽다.
여튼 이렇게 해서 다른 소설을 찾아 읽고 싶은 작가가 리스트에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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