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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의 천재 : 이탈리아, 맛의 역사를 쓰다 / 알레산드로 마르초 마뇨 / 책세상>
초기 기독교 사회에서, 와인을 마시던 세계와 사과주를 마시던 세계 간에는 치열한 전쟁이 계속되었다. 중동에 기원을 둔 로마교회는 포도주와 깊이 연관되어 있었고 성경에도 포도에 관한 언급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포도송이를 두 사람이 장대에 매달아 짊어지고 가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알프스 산맥 북쪽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에 북쪽 땅에는 드루이드교도가 살고 있었고 이들은 종교의식에 사과주를 사용했다. 이들이 믿었던 천국의 이름은 아발론(Avalon)으로 이는 아발의 섬, 즉 사과의 섬이었다.
켈트족의 성직자들과 로마의 신부들 사이에서는 기독교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국경 없는 전쟁이 계속되었다. 로마교회의 승리는 사과를 가리키는 말을 바꿀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사과와 악을 동시에 가리키던 '말룸(malum)'은 과일의 여신 포모나에서 유래하는 '포뭄(pomum)'으로 바뀐다. 말룸은 세속적이고 이단적이기 때문에 배제해야 할 말이었다.
날씨가 엄청 추워졌다. 추워져서 그런가 요리와 관련된 책이 읽고 싶어졌다(...? 뭔말이지..;;)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는 화집을 사는 데 사치(奢侈)를 부린다. 처음에는 마음에 드는 화가들의 화집을 샀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요리책이 눈에 들어왔다. 레바논음식 레시피라든가, 타파스 사진이 가득한 책이라든가.. 요리를 만들려고 사는 건 아니고(;;) 이국적인 음식들을 보다 보면 왠지 음식도 하나의 예술인 것 같아서 눈요기(?)를 하고자 요리책을 몇 권 샀었다.
이 책은 그런 레시피 책은 아니다. 이탈리아 요리의 유래를 쫓아가는 역사서와 비슷하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피자, 포크, 스파게티, 마케로니, 샐러드, 프로슈토, 판도로/파네토네, 폴렌타, 모짜렐라, 에스프레소, 프로세코, 발사믹 식초, 바롤로, 카르파초, 누텔라, 스프리츠, 티라미수의 총 17개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책은 아마 연대순으로 목차를 구성한 것 같다. 유래가 불분명한 요리도 있기는 하지만 얼추 연원이 오래된 음식에서부터 비교적 최근에 개발된 요리 순으로 나열한 것 같다. 저자는 순서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맨 첫 장(피자)과 맨 마지막 장(티라미수)만 놓고 보아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읽으면서 느꼈던 점을 몇 가지 추려볼 수 있을 것 같다.
나폴리 피자
# 식문화
유일하게 요리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 장이 있는데 바로 2장 <포크> 편이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15세기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포크나 나이프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좀 충격적이었다. 서세동점의 시대가 개막하기 시작하던 그 무렵, 그 때까지도 식기(食器) 없이 식사를 했다니..??
포크는 비잔틴제국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몇몇이 포크를 사용하기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먹을 것을 포크로 찍고 나이프로 써는 행위가 장난질처럼 여겨졌다고 한다. (저자가 '장난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ㅎㅎ) 머릿속으로 도무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서(파스타를 손으로 먹는다고 생각해보길..) 내가 그 당시 유럽사람이었다고 가정하고 최대한 감정이입을 해보았는데,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면 그럴 법도 하겠다 싶었다;;
빵의 색깔이 먹는 이의 계급을 대변한다는 대목도 재미있었다. 밀을 이용한 새하얀 빵은 귀족, 귀리 등 기타 잡곡으로 만든 어두운 색의 빵은 평민을 상징했단다. 요즘은 건강식이라고 일부러 귀리나 호밀빵을 찾아먹는데 말이다.. 옛 사람들은 확실히 영양(榮養)에 대한 관념이 많이 부족하긴 부족했나 보다. 옛날 사람들은 피자에 설탕을 뿌려 먹을 정도로 소금만큼 보편적인 조미료로 설탕을 사용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과식을 미덕으로 여겼다니...
그밖에 나라마다 전채요리-메인요리-샐러드를 즐기는 방식이 어떤 식으로 다른지 나와 있었는데, 그 페이지가 아무리 뒤져도 안 보인다..ㅠ
에스프레소
# 지역
피자와 파스타, 마케로니에 대해 다루는 초반부까지만 해도, 나폴리를 비롯한 남부지방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온다. 그러나 책의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요리의 무대는 북부 이탈리아로 옮겨 간다. 피에몬테 주의 토리노, 롬바르디아 주의 밀라노, 베네토 주의 베네치아, 트리에스테를 주축으로 카르파초, 파네토네, 누텔라, 스프리츠, 티라미수 등등의 요리가 발전한다. (그러고 보니 모짜렐라의 경우는 '물소'의 젖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물소가 자랄 수 있는 환경의 남부지방에서 생산된 것이 품질이 좋다고 한다)
북부 이탈리아는 아무래도 프랑스, 오스트리아와 인접해 있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를 흡수하고 색다른 요리를 개발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트리에스테'라는 도시는 이탈리아 요리 발전에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오는 반면, 수도인 '로마'는 사실상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 눈에 띈다. 트리에스테의 경우, 이탈리아에 편입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게르만 문화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거꾸로 말하자면 완벽히 이탈리아 것이란 게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창조는 기존의 창조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말처럼 말이다.
티라미수
# 어원
한편 요리명의 의미를 알고 신기했던 것도 꽤 있었다. 특히 '티라미수'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말 그대로 "Tira mi su!(나를 끌어올려!)"라는 이름을 갖게 된 데에는, 티라미수에 포함된 커피(카페인) 성분이 사람들을 각성시키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란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 음식을 말할 때 굉장히 직관적으로 이해가 갈 것 같다.
'누텔라' 역시 새로이 알게 된 사실로, 견과류(Nut)와 작고 귀여운 것을 가리키는 이탈리아어 접미사(ella)를 합성한 단어란다. 원래는 "supercrema"라는 아주 당돌하고 촌스러운 이름을 썼었으나, 세계화를 추진하면서 새로이 작명했다고.. 누텔라가 페레로 로쉐에 들어가는 재료라는 것은 알았는데, 페레로 자신이 직접 개발한 크림이라는 것은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었다.
'모짜렐라' 또한 '누텔라'와 같은 원리가 활용되었다. 손으로 원하는 크기만큼 잘라낸다(mozzare)는 의미의 이탈리아어 동사에 동일한 접미사를 붙여서 만든 표현이란다. 흔히 모짜렐라라고 하면 길게 늘어지는 치즈를 떠올리지만, 정통 모짜렐라는 탱글탱글한 표면에 손에 부스러지듯 떨어져 나온다고 한다.
그밖에 트리에스테에서 발달한 '스프리츠'는 독일어의 '뿜어내다(spritzen)'에서 따왔다는 것도 신기했다.
스프리츠
# 사업수완
오늘날 이탈리아 요리의 대명사가 된 피자나 스파게티가 세계화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사실 미국이다. 미국으로 건너온 이탈리아 이민자들은 고향의 요리를 대중이 보다 가볍게 즐길 수 있도록 개량하고, 이에 더해 대대적인 생산과 마케팅으로 외국에 자국요리를 수출하는 데 기여한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피자와 스파게티는 이탈리아 본토에서 사람들이 먹는 것과 상당히 다르다는 점을 저자는 지적한다.
하지만 이탈리아 자국에서도 자국의 요리를 보편화하기 위한 사업적 노력이 많이 이루어진 것 같다. 20세기 초 밀라노를 중심으로 하는 '모타'의 '파네토네'와 베로나를 중심으로 하는 '멜레가티'의 '판도로'가 북부 이탈리아에서 대결구도를 형성하는 동안, 사업을 확장하고 마케팅을 펼치는 과정에서 자연히 이탈리아 바깥의 유럽으로 이탈리아의 빵이 널리 알려진다. 또한 불과 20세기 초반에 이들이 만든 광고 디자인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봐도 감각적이고 시선을 끈다.
'누텔라'의 개발자인 '페레로'의 부지런함도 눈에 띈다. 페레로는 초기에 신속하게 사업을 확장하기 위하여, 오늘날로 치자면 푸드트럭을 활용한 이동점포 전략을 쓰는가 하면, 누텔라가 고열량이면서 영양가는 없다고 생각하는 학부형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누텔라 구매시 유리컵을 증정하는 마케팅을 펼치기도 한다. 누텔라가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면서 nutella라는 단어가 이탈리아어 사전에 등재되자, 상품명 자체의 고유성을 헤친다는 이유로 Nutella로 명기할 것을 회사가 요구했다는 대목에서는 어떤 고집마저 느껴졌다.
파네토네(左)와 판도로(右)
작년 <요리본능>이라는 책을 읽은 후로, 음식이나 요리를 소재로 한 책은 처음인 것 같다. 이탈리아 음식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목이 제법 도발적이어서 읽기 시작했다. 익숙치 않은 이탈리아 사람들의 이름이 좀 헷갈리기는 했지만, 재미있게 읽었다. 음식에 관한 책인 만큼 컬러풀한 사진이 가득 실렸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욕심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자료가 제시되어 있어서 내용을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에스프레소 편에서 에스프레소 기계의 발전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사진자료도 좋았다)
이탈리아 여행을 생각하는 사람이나 이탈리아 요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읽어볼 만 한 책이다. 물론 심심풀이로 읽어도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