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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역사 / 니콜라스 V. 랴자놉스키, 마크 D. 스타인버그 / 까치>
러시아는 르네상스도 종교개혁도 전혀 경험하지 않았고, 근대 초의 항로의 발견이나 과학적 및 기술적 발전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전쟁과 의학이나 광업 같은 실질적인 문제에서 결함은 좀더 분명해졌다. 그러나 그런 결함은 사실상 모든 분야로 확대되었다. 모스크바국 정부는 서구에 대해서, 그리고 서구가 제공할 수 있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는 사실도 지적될 필요가 있다. 모스크바국 사회는 온갖 편견과 편협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단자들"로부터 점차 배우기 시작했다.
차다예프는 사실상 러시아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실제로 서양에도 속한 적이 없고 동양에도 속한 적이 없고, 문화에 기여한 것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러시아는 서구 문명 전체의 기반을 이루는 가톨릭교가 가진 역동적인 사회 원칙을 결여하고 있었다. 실로, 러시아는 "만물의 지적 질서에서 빈자리"로 남아 있었다.
얼마전 KBS에서 방영된 <미리보는 황금제국>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실크로드, 그 가운데서도 초원길을 따라 이루어진 문명의 교류를 "황금"이라는 테마에 초점을 맞춰 제작한 다큐멘터리였다. 실크로드가 끝나는 곳으로 극서(極西) 지점으로 제시된 것이 오늘날 독일인 중세 게르만이었고, 극동(極東) 지점으로 제시된 것이 신라의 경주(慶州)였다. 다큐멘터리는 내몽골에서 발굴된 금관(金冠)과 경주 왕릉에서 발굴된 금관과의 유사성을 비교하면서, 초원길의 동서를 횡축(橫軸)으로 어떤 문화적 공통점이 발견되는지 추적해 간다.
초원길은 오늘날 대개 중앙아시아나 러시아의 스텝지대에 해당한다. 비록 지금은 여러나라의 국경선이 옛 초원길을 조각조각내고 있지만, 초원길을 따라 발달한 옛 문명의 흐름을 연구하는 고고학자들의 국적에는 국경이 없는 듯하다. 그만큼 여러 국가의 학자들의 인터뷰가 다큐멘터리에 등장한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러시아 학자들의 등장이 많았는데,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손꼽히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이 등장하기도 한다. 우발적으로 러시아에 관한 책을 읽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상권에서 발췌한 위의 내용이 러시아에 대해 너무 부정적인 측면만을 실은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참고로 상권은 니콜라이 1세의 통치까지, 그러니까 19세기 중반까지의 러시아 역사를 다루고 있다. 사실 책에서 인상 깊었던 다른 내용도 많았다. 예를 들어, 카이사르(Caesar)에서 유래한 차르(Czar)를 정점으로 하는 전제정이 러시아에 뿌리내리게 된 역사적 경위도 매우 흥미로웠다. 또한 '표트르'라는 카리스마적 리더가 러시아를 유럽의 열강 대열에 올려놓는 과정 또한 매우 인상깊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10세기 경 키예프 루시(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출발한 오늘날의 러시아가, 불모지(不毛地)에 터를 잡고 어떤 역사적 서사(敍史)를 써내려갔는지, 유럽의 변방에서 얼마나 고립되고 폐쇄적인 그러나 끈질긴 역사를 일궈냈는지, 어느 정도는 야만스럽고 거칠지만 동시에 과감하게 역사를 이끌어 왔는지 느낄 수 있게 해준 구절들이었다.
# 지정학적 특수성
서유럽에서 르네상스가 꽃을 피우고 시민사회가 싹을 틔우기 시작하는 동안, 러시아에서는 차르의 폭압적인 정치가 수시로 동원되는가 하면 국교인 정교회의 특성상 일체의 성상(聖像) 제작이 금지됨에 따라 예술 발달도 주춤한다. 또한 유럽의 변방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는 동쪽(시베리아)으로 진출이 용이하다는 강점이 되기도 하지만, 영토 확장과 함께 필연적으로 다민족 국가가 되면서 일원화된 국가행정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지도를 봐도 러시아의 수도(모스크바)를 보면 어떻게 저런 곳에 터를 잡았을까 싶다. 오늘날의 모스크바에 국가의 수도가 어떻게 자리잡게 되었는지에 대한 연원이 책에 소개되는데, 확실히 오밀조밀한 유럽과 달리 모스크바라는 도시는 유럽세계로부터 한참 동떨어진 느낌이 있다. 볼가강을 접하고는 있지만 바다와 멀고 무역거점이라 하기에도 어정쩡한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결정적으로 러시아의 중심이라고 하기에는 서쪽 끝이다. 우랄 산맥 서쪽의 유럽 러시아로 한정해도 모스크바의 위치는 서쪽으로 치우쳐 있다.
# 농노제
가장 경악스러웠던 것은, 단연 농노제였다. 서유럽의 봉건제도와 비견되지 않을 만큼 열악한 러시아의 농노제(저자는 이를 차라리 노예제에 가깝다고 말한다)를 통해, 농민들은 정부에 의해 수탈되고 착취되고 유린된다. 과도한 착취로 농촌 사회가 붕괴되면서 농노제 혁파에 대한 논의는 꾸준히 이루어지지만, 현실적 요구로 인해 모든 차르는 농노제 개편에 매우 소극적인 자세를 보인다. 러시아는 온갖 전쟁과 반란으로 인해 전쟁의 필수물자인 식량을 농민들로부터 어떻게든 쥐어짜내야 하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19세기 이전까지 러시아가 대내외적으로 평화로웠던 기간은 극히 한정적이다.
# 러시아 vs. 미국
한편 표트르 대제의 과감한 정책으로 러시아가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던 17세기에, 마찬가지로 신생국가로 발걸음을 내딛고 있던 미국과 비교하는 대목 또한 인상적이었다. 뉴잉글랜드에서 13개의 주(洲)로 출발한 미국이 서부로 진출하는 과정은,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넘어 극동 아시아에 진출하는 과정에 비유된다. 또한 미국의 흑인노예제를 러시아의 농노제와 비교하면서, 1861년 알렉산드르 2세에 의해 러시아의 농노제가 폐지되는 과정은, 남북전쟁이라는 유혈사태 끝에 노예제를 폐지한 미국과 비교할 때 평화적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제도가 사라졌다고 해서, 농민들에 대한 처우가 일거에 개선된 것은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밝힌다.
# 가짜왕
읽으면서도 이런 코미디가 가능한가 생각했던 대목이 있었다. 바로 동란의 시대(1598~1613)다. '코미디'라는 가벼운 표현을 썼지만, 이 시기는 민중들이 극도의 고통을 겪던 아주 힘든 기간이었다. 이반 뇌제(4세)와 표도르 이후 1614년 로마노프 왕정에 수립되기 이전까지의 15년간은 보야르(귀족)와 참칭(僭稱) 세력이 알력다툼을 벌이던 혼란(混亂)의 시기였다. 러시아가 이토록 혼란을 겪은 것은 바로 불분명한 왕위 계승권에서 비롯된다. (왕위 계승법은 표트르 대제에 의해 정해지기 전까지 명확히 정해지지 않는 상태로 남는다)
'코미디'라고 한 것은 이 시기에 두 명의 "가짜 왕"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모스크바국의 마지막 차르인 표도르의 뒤를 이을 유일한 왕위 계승자, 드미트리가 목이 베인 채로 발견된다. 경위는 불분명하지만 유일한 차르 계승자가 피살된 것에 대해 각종 의혹이 제기된다. 이 와중에 유력한 드보랴닌(봉직귀목) 가문 출신의 보리스 고두노프가 왕위를 계승한다. 이반 뇌제의 후기 폭정으로 삶이 피폐해진 농민 (특히 비교적 역사가 짧고 러시아적 정체성이 옅은 변방의 농민)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치거나 태업한다. 왕조의 중앙집권적 권위는 점점 약화된다. 급기야 두 명의 "가짜 드미트리"가 나타나기에 이른다.
시대가 얼마나 혼란스러웠으면 "가짜 드미트리"를 믿고 따르는 군인과 농민들이 많았고, "가짜 드미트리"는 심지어 모스크바의 왕궁에 입성하여 왕위를 차지하기도 한다. 물론 이들의 재위기(在位期)는 길지 않았다. 너무나 빈약한 지지기반과 정통성은 국정을 이끌어가는 과정에 취약성을 여실하게 드러낸다.
고려말 무신정권과 비슷한 경우가 아닌가 싶다. 왕정이 개인의 사조직이 된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차이점도 있다. 동란의 시기에는 스스로를 정통왕이라 일컫는 참칭 세력이 노골적으로 활개치고, 군인들과 농민들이 이에 동조할 만큼 사회가 무너진 상태였다. 무신정권은 자신의 권좌를 지키는 것 외에 민생에는 관심도 없었는데, 그렇다고 백성들이 무신들을 지지한 것은 아니다. 두 경우 모두 국란의 시기였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러시아의 경우가 더욱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동란의 시기에 러시아의 민중들은 자신들을 구원해줄 사람을 찾던, 그야말로 이판사판의 상황에서, 정체불명의 사람에게 의지하기에 이른 것이다.
아직까지도 차례로 등장한 이들 "가짜 드미트리"의 신원은 불분명하지만, 기록에 남아 있는 복장 묘사나 침투경로로 미루어보건대 경쟁국이었던 폴란드의 사주를 받아 모스크바에 입성한 것으로 추론될 뿐이다.
#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
아픈 근현대사를 경험한 폴란드, 지금은 발트해의 자그마한 국가로 남은 리투아니아 모두, 15~16세기경까지만 해도 모스크바국을 능가하는 힘을 지닌 연합국이었다는 사실이 새로웠다. 합스부르크 왕조와 모스크바국 사이에 끼어 있다는 지정학적 약점은,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가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걷는 것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세기 후반 표트르 대제가 프랑스와 독일의 정부/행정 모델을 전격적으로 도입하기 이전까지 폴란드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갔다는 사실이 인상깊었다.
현재는 하권을 읽고 있는데, 오늘날 동유럽의 국경선이 어떻게 형성되게 되었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흔히 슬라브족으로 묶는 것과 달리 동유럽과 러시아간의 문화적 이질성이 꽤 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러시아와 폴란드만 놓고 보자면 러시아는 정교회를, 폴란드는 가톨릭교를 주된 종교로 삼고 있다. 또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만 놓고 보자면, 모스크바국에 일찍이 '전제정'이 자리잡은 반면, 오랜기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국의 영토에 속했던 우크라이나에서는 '선출된 왕정체제'에 익숙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러시아의 경우도 처음부터 차르 중심의 전제정이 우세했던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 북서부의 노브고로드에서는 민주정/과두정에 가까운 정치체제가, 남서부의 볼리니아와 갈리치아에서는 보야르 중심의 귀족정이 모스크바의 전제정과 세력다툼을 벌인다. 여러 역사적 사건 속에서 결국 승자는 '전제정'의 모스크바였고, 이로부터 러시아에 차르의 전통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저자가 의도적으로 세 도시간의 대립구도를 설정한 것 같기도 하지만, 눈여겨볼만한 대목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러시아의 역사는 신기하다. 아직 하권을 절반 정도 읽어서 끝까지 읽어봐야 알겠지만, 과격하게 표현해서 러시아의 정치와 역사는 '주먹구구식'으로 돌파해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 발췌한 두 문단 중 앞의 문단은 저자의 글에서, 뒤의 문단은 책에 실린 어느 러시아 지식인(차다예프)의 글에서 따온 것이다. 힘을 가진 열강에 등극했지만, 여전한 문화적 열등감과 빈약한 경제기반, 극심한 빈부격차, 미성숙한 시민의식 속에서 지식인들이 느낀 좌절감은 러시아 역사 내내 끊임없이 분출된다. 그들이 왜 모국에 대해 비판을 서슴지 않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다 못해 국가 개혁에 착수한 표트르 대제도 러시아적인 것이 아닌 서유럽적인 것에서 러시아의 변혁을 위한 해답을 구했다.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가 걸어 온 역사적 경로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가 국제사회에 기여한 것도 많다. 그렇지만 러시아가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하권에 좀 더 비중있게 다뤄지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대문호(大文豪)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는 근대에 와서야 나타난다. 사회주의 혁명이 국제질서에 끼친 영향이 지대함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아직은 하권을 다 읽어봐야 러시아라는 나라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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