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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의 역사 II일상/book 2016. 12. 20. 21:30
<라틴아메리카의 역사<하>/벤자민 킨, 키스 헤인즈/그린비>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말하는 콜롬비아적인 '현실' 가운데 하나는 콜롬비아에서 두 개의 전쟁이 동시에 벌어졌다는 점이다. 이중 하나가 마약전쟁이다. 또 다른 전쟁은 군부, 치안부서, 마약재벌, 대지주, 기업가들이 연합해 좌파 운동, 노동조합, 농민조합을 겨냥해 벌이는 '더러운 전쟁'이었다.
후지모리 페루 대통령은 민주적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어쩌면 치명적인 모순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재빨리 배웠다. 성공한 정치가들은 국제은행가와,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국내 엘리트라는 강력한 소수집단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포퓰리즘적인 수사와 선거철의 후원을 통해 하층 계급 지지자들을 기만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지난 200여 년 동안의 미국과 라틴아메리카 관계를 살펴보면 두 가지 일관된 주제가 드러난다. 먼저, 무엇보다도 미국은 이 지역에서 자신의 경제적, 전략적 이익을 보호하고 확대하고자 노력해 왔다. 먼로 정부 이래 미국은 라틴아메리카를 하나의 경제적 부속물로 만들려고 시도해 왔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은 다양한 정치적 압력, 기업의 변화하는 요구 그리고 변동하는 라틴아메리카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여러 수단들을 동원하면서 뛰어난 수완과 융통성을 보여 주었다.
두번째로, 미국의 지도자들은 라틴아메리카를 절망적인 낙후 지역으로 그리고 야만적인 약탈 행위에서 라틴아메리카의 민중들을 구원하고 이상화된 미국의 경험에 기반을 둔 도덕적이고 민주적인 공화국을 세우기 위해 미국의 보호와 후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역으로 일관되게 묘사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책을 정당화해 왔다. 미국의 '문명화 임무'에 관한 '담론'은 19세기 백인우월주의 이념과 20세기에 나타난 근대화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미뤄왔던 <라틴아메리카의 역사> 하권을 다 읽었다. 하권에서는 상권에서 다뤄진 '신식민주의'에 뒤이어 20세기 전후의 역사에 대해 다루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남미 대륙에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이 그어지기까지 각국의 독립혁명에서부터 출발한다. 그 뒤 국가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난 노정의 역사가 나오는데, 그 역사라는 게 대동소이하다. 국가마다 지리적, 문화적, 인종적, 사회적 상황에 따른 차이점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이 겪는 발전상의 갈등과 분쟁의 패턴이 매우 비슷하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하권의 가장 마지막 장(22장)에서 다뤄지는 "두 개의 아메리카 :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의 관계"가 좀 더 앞에 나왔으면 어떨까 싶다. 20세기 라틴아메리카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관계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글의 전개가 연대순에 따르고 있기 때문에,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의 관계를 글의 마지막에 개괄적으로 실은 것 같기는 하다. 그래도 20세기 역사를 읽기에 앞서 미국-라틴아메리카의 관계에 대한 프레임을 짚고 넘어갔다면 글을 이해하는 데 더 유익했을 것 같다.
<영화 <시카리오 : 암살자들의 도시>, 하이네켄 광고에 나온 베네시오 델 토로를 보고 피식했던..;;ㅋㅋ>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의 관계를 다루는 대목에서 떠올랐던 것이 미드 <브릿지>(서로 국경(미국-멕시코간)을 맞댄 두 도시 엘 패소(El Paso)와 후아레스(Juarez)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수사물)와 영화 <시카리오>였다. <시카리오>는 마약밀매의 우두머리를 암살하기 위해 미국의 잠입요원이 투입되어 작전을 전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마지막의 반전에서 알 수 있듯 멕시코의 마약거래에 CIA가 깊숙히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여러가지 허울 좋은 명분(2차 대전 이후에는 냉전 종식, 90년대에는 마약단속, 2000년대에는 테러와의 전쟁)을 내세우고 있지만,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에서 맡고 있는 역할은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래 에스파냐가 라틴아메리카에서 맡았던 역할과 다르지 않다. 상권에서 언급됐던 에스파냐의 "흑색전설(저자는 에스파냐가 라틴아메리카에 문명을 전달했다는 긍정적 측면을 강조하는 관점에서 기존학자들이 "백색전설"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에 대항하여 "흑색전설"이라는 표현을 통해 에스파냐인의 남미 상륙이 원주민에게 미친 부정적인 파급효과를 조명한다)"을 지금은 미국이 새로이 써나가고 있을 뿐이다. 서로 다른 이익집단을 동원하여 미국기업의 이익을 저해하는 정치세력을 탄압하는가 하면, 反신자유주의적인 정권이 수립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각종 공작활동을 펼치고 때로 무력사용도 서슴지 않는...좀 씁쓸한 역사를 발견했다. 동시에 질문을 던졌다. 왜 이 세계에서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논리가 이토록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일까.
<左 : 알베르토 후지모리(1990~2000), 右 : 케이코 후지모리(2016.6~)>
<말빨의 대표격인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은 포퓰리즘 공약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연이은 경제파탄과 실정(失政)으로 급히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지난 6월 그의 딸 케이코 후지모리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니 알다가도 모를 나라다.. 원주민(인디오)의 인구비율이 많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남미에서 일본계 이민자의 후손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점도 신선하다>
아마 이 책에서 가장 빈번히 쓰이는 어휘가 "포퓰리즘"인 것 같다. 그래서 포퓰리즘의 사전적 정의를 따로 찾아 보았다. '反엘리트주의적인 민중영합주의, 또는 지배계급에 대항해 피지배계급 또는 종속계급이 펼치는 계급적 투쟁'이라고 나온다. 우리 일상에서 포퓰리즘이라는 어휘가 쓰이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대개 과잉복지를 비판할 때, 복지의 남발은 포퓰리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하권을 통해서 느낀 것은 포퓰리즘 그 자체보다 "포퓰리즘적인 수사(修辭;rhetoric)"가 더 무섭다는 것이다. 책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건대, 개인적으로 20세기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는 포퓰리즘적인 수사가 난무했던 시대라고 정의내리고 싶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각국의 지도자들이 내세웠던 각종 포퓰리즘 공약은 어디까지나 '말' 뿐이었다. 이들 정책이 실제 정책으로 옮겨진 적은 결코 없었다. 오히려 과두지배계층의 이익을 대변하고 신자유주의적인 시장질서에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저소득층의 빈곤층을 더 큰 곤란에 빠뜨리지 않으면 다행이었을 정도다.
<포퓰리즘의 대명사 아르헨티나의 페론 부부(Eva y Juan Domingo Peron)>
# 아르헨티나
같은 맥락에서 과도한 복지정책을 비판할 때 자주 거론되는 "아르헨티나의 경제불황"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아르헨티나가 부강한 나라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단일시장(소고기 등 1차산업)에 과도하게 경제구조가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 수도(首都)인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지방 사이에 존재하는 극심한 빈부격차는, 향후 양차 대전을 거치면서 세계경제가 급변하는 시기에 그 취약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무엇보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포퓰리즘 정책이 제대로 시행됐던 적은 없었다. 앞서 말했듯, 포퓰리즘적인 수사가 넘쳐났을 뿐이다. 대표적인 예가 영국과 벌인 포클랜드 전쟁이다. 국가를 위한 결정이었다고는 하지만, 정말 일반대중의 삶을 걱정하는 지도자라면 이런 즉흥적인 결단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선거를 통해 선출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대통령 아옌데가 처형되기 직전에 촬영된 그의 마지막 모습이다,
소련과의 대결구도 속에서 제2의 쿠바가 출현하는 것을 우려한 미국이 이 쿠데타에 지원한 정황이 이후에 밝혀졌다>
# 칠레
칠레의 경우는 감회가 새로운 것이, 대학교 때 <라틴아메리카의 이해>라는 교양수업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1492"에서부터 차근차근 라틴아메리카의 개괄적인 역사를 배우는 수업이었는데, 칠레의 역사를 다루면서 교수님이 참고자료로 보여준 영상이 아옌데(Salvador Allende) 칠레 대통령의 의회 연설 장면이었다. 쿠데타가 진행되는 와중에 아옌데는 쿠데타군이 당장 자신의 목숨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의회에 남아 연설을 한다. "나는 지금 가지만 머지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로 가는 위대한 길을 열 것이다" 그는 마지막 명연설과 함께 쿠데타군의 총부리에 자신을 내맡긴다. 사실 당시 이 강의를 신청했던 목적이, 스페인어를 배우면서 라틴 문화를 더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영상에 보이는 상황이 심각한 무언가라는 것은 이해했지만, 낯선 칠레라는 나라의 근대사에 대해 별달리 감흥이 없었다. 그저 제3세계 국가에서 흔히 반복되는 쿠데타쯤으로 생각하고 참고영상을 가볍게 감상했다. 더군다나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배워가는 단계에서 칠레의 쿠데타가 어떤 의의를 가지는지는 더더욱 몰랐고..다행히 뒤늦게라도 이 책을 읽으면서 칠레의 역사를 쭈욱 훑어볼 수 있었다.
칠레의 역사를 읽어가면서 느낀 것이 '과거사의 청산이 얼마나 어려운가'하는 점이다. 아옌데 대통령을 암살한 뒤 집권한 피노체트 정권은 헌법을 뜯어고치고, 반정부 인사를 무자비하게 탄압한다. 17년간의 독재가 끝나고 아일윈(Patricio Aylwin)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민주정권이 수립되지만, 피노체트의 구체제가 일소(一消)되지는 않는다. 급진적인 체제 개혁이 또 다른 정국의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로 인해, 아일윈 정부는 구체제 인사를 처벌하는 문제에 대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인다. 당연히 이는 대중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지만, 그만큼 피노체트가 심어놓은 독재체제가 뿌리깊고 광범위하며 이를 척결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준다.
<左 : 피델 카스트로, 右 : 체 게바라, 혁명가와 독재자라는 평을 동시에 받는 피델 카스트로, 옛날 사진만 싣다보니 다 흑백이다..>
# 쿠바
오바마 정부가 쿠바와 국교를 정상화하기 전까지, 그리고 얼마전 피델 카스트로가 타계하기 전까지 쿠바는 관심밖에 있던 국가였다. 카스트로 형제와 체 게바라가 1959년 혁명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들이라는 상식(?) 정도만 알고 있을 뿐, 쿠바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전무(全無)했다.
쿠바가 사회주의에 성공적인 모델이며, 최근 라틴아메리카의 분홍 물결(남미에서 좌파 정권이 도미노처럼 수립되는 현상)에 영감을 준 국가라고 본문에 묘사가 되어 있던데,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생각을 해보았다. 먼저 한계점을 지적하자면, 쿠바는 남미국가 가운데 가장 괄목할만한 경제성장 (그리고 사회발전)을 보여주었지만, 피델 카스트로 (이후 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권력이 양위되는..)의 일인 독재체제가 민주주의적 가치를 훼손했다는 있다는 점을 먼저 지적하고 싶다.
더불어 사회주의가 비교적 성공적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요인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는데, 소련이나 중국과 달리 쿠바는 작은 섬나라라는 점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물론 쿠바는 카리브해에서는 가장 큰 섬이다. 하지만 일원화된 정책의 적용이나 통제가 어려웠던 소련과 중국에 비하면, 정부가 관리해야 하는 지리적 영토가 훨씬 작았다. 따라서 사회주의를 실험 또는 적용하기에 보다 용이했을 것이다. 물론 다양한 인종 구성(크리오요의 후예들, 흑인, 물라토 등) 등 국가의 통합을 저해하는 요소가 잠재해 있다는 악조건과 더불어, 1990년대 동구권의 연쇄붕괴로 인해 무역국이 대폭 축소되는 등 여의치 않은 환경에 처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라는 큰 틀을 유지하면서 안정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룬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떠오른 것이 풍부한 자원과 온화한 기후인데, 쿠바는 영토는 작지만 원유와 니켈이 많이 생산되는 나라다. 또한 기후가 사탕수수 농업에 안성맞춤이어서 일찍이 경제성장의 동력을 갖출 수 있었다. 물론 칠레나 볼리비아의 주석 광산처럼 다른 라틴아메리카의 국가들도 얼마든지 자원이 풍부했지만, 문제는 광산업을 좌지우지하는 외국자본을 통제하는 데 실패하면서 쿠바와 같은 수준의 사회안정은 달성하지 못한다.
<걱정이 많아 보이시네요... 지우마 호세프(Dilma Rouseff) 브라질 대통령, 브라질의 정치는 안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 and so on..
독립혁명의 첫 포문을 연 멕시코의 역사, 페루부왕령(에스파냐가 식민지를 관리하면서 설치한 부왕청으로 오늘날의 페루, 칠레, 볼리비아 일대)에서 유일하게 내륙국가로 남은 볼리비아, 천일전쟁의 결과 급격한 국경선의 변동을 겪은 파라과이, 운하를 둘러싼 미프영의 이권 다툼으로 질곡의 역사를 경험한 파나마, 비좁은 땅임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내전으로 고통을 겪은 중미의 여러 군소국가들(니카라과,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라틴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은 국가로서 비교적 수월하게 독립을 달성한 브라질에 이르기까지.. 모두 흥미로운 내용들이었고 새로 배워 간 내용들이었다.
끝으로 인상적이던 내용이 베네수엘라의 현대사 대목이었다. 우고 차베스를 필두로 하는 라틴아메리카의 분홍물결을 통해, 국가지도자들이 포퓰리즘적인 수사에서 그치지 않고 진짜 포퓰리즘 정책을 실행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대중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정치인들이 나서기 시작하면서, 베네수엘라의 절대빈곤율은 낮아지고 교육수준은 향상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포퓰리즘 정책이 어디까지 통할지는 미지수다. 앞서 포퓰리즘 그 자체보다 무서운 것이 포퓰리즘적인 수사라고는 했지만, 포퓰리즘 그 자체가 지닌 역효과나 부작용까지 부정한 것은 아니다.
브라질의 역사와 관련하여 본문에는 룰라와 지우마 호세프가 2000년대 브라질에서 펼친 포퓰리즘 정책에 대한 언급이 나와 있다. (현재 제9판까지 개정판이 나온 상태다) 그렇지만 최근에 불거진 정치스캔들과 지우마 호세프의 탄핵까지는 업데이트되어 있지 않다. 기득권에 편승하여 사익을 도모한 20세기 이전의 정치인들도 문제지만, 대중을 위한 정책을 펼치겠다는 2000년대의 정치인 역시 "부패"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라틴아메리카가 그 동안 반복해온 역사적 실수는 앞으로도 똑같이 되풀이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얼마전 읽은 <목민심서>에서 관료의 청렴함을 강조한 정약용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