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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이 바람 될 때일상/book 2016. 12. 10. 17:03
<숨결이 바람 될 때 / 폴 칼라니티 / 흐름출판>
"내 영혼의 대장간에서 아직 창조되지 않은 인류의 양심을 벼리고 싶다"
"모든 의사가 질병을 치료하는 동안, 신경외과의는 정체성이라는 혹독한 용광로 속에서 일한다. 모든 뇌수술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본질인 뇌를 조작하며, 뇌수술을 받는 환자와 대화할 때에는 정체성의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더해 뇌수술은 대개는 환자와 그 가족에게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이며, 그래서 인생의 중대한 사건들의 그렇듯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이처럼 결정적인 전환점에서 요점은 단순히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어느 쪽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이다. 뇌는 우리가 겪는 세상의 경험을 중재하기 때문에 신경성 질환에 걸린 환자와 그 가족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해야 한다. '계속 살아갈 만큼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동생한테 이 책 좀 사와보라고 했다. 그보다는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꾀어내서 사오게 만들었다는 게 정확하겠다. 동생이 읽기도 전에 내가 먼저 낚아채서 읽었으니.
에세이를 읽은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읽은 에세이가 가물가물하다. <멈출 수 없는 사람들>도 수필 같긴 하지만 보통 과학기술 분야로 분류되니, 올해는 수필을 하나도 안 읽은 것 같다.
서점에 이 책이 쫙 깔려 있어서 눈에 띄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아마존 종합 1위"라는 마케팅에 혹해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다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라는 육중한 책을 한 편 읽고 나니, 가볍게 (그러나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읽을거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글의 저자가 참 멋지다고 느꼈던 것이 원래는 영문학으로 석사 학위까지 받았다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사람의 삶과 죽음을 직접 마주할 수 있는 신경외과 의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미치자, 망설임없이 진로를 선회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밀어붙였다는 점이다. 나 역시 학교를 다닐 때 전공으로 경영학을 공부하는 동안, 경영학보다는 정치학이나 문학이 훨씬 재밌게 느껴졌었다. 그러나 저자처럼 어느 한 방향으로 제대로 밀어붙이지는 못했다.
생의 끝자락에서 어렵사리 써내려간 이 글은, 영문학을 전공한 저자의 기본적 소양 때문에 전혀 의사의 글처럼 읽히지 않는다. 표현도 풍부하고 사람을 바라보는 따듯한 시선, 자기성찰이 담뿍 담겨있다. 그렇지만 읽는 이의 마음을 따듯하게 해주는 저자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의 양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죽음의 그림자는 동시에 숙연함을 느끼게 만든다. 환자들의 죽음을 바라보기만 해왔던 의사의 입장에 서 있던 그는, 정작 그 자신의 죽음에 직면해서는 매 순간 익숙해질 수 없었음을 그러나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한다. 그와 그의 아내가 죽음을 마주하고 슬기롭게 헤쳐나간 과정을 읽다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여는 시문(詩文)을 읽는 순간 벌써부터 마음이 고동쳤는데, 그 시를 인용하면서 글을 끝맺는다.
죽음 속에서 삶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는 자는
그것이 한때 숨결이었던 바람이란 걸 알게 된다.
새로운 이름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
오래된 이름은 이미 사라졌다.
세월은 육신을 쓰러뜨리지만, 영혼은 죽지 않는다.
독자여! 생전에 서둘러
영원으로 발길을 들여놓으라.
You that seek what life is in death,
Now find it air that once was breath.
New names unknown, old names gone:
Till time end bodies, but souls none.
Reader! then make time, while you be,
But steps to your eternity.
Baron Brooke Fulke Greville,
"Caelica 83"